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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언제나처럼 좀 긴 서설
어제 회사 체육대회 끝나고 서점에 아돌프에게 고한다 를 사러 갈랬더니, 세미콜론...... 9000원짜리 5권이라니 이건 너무 무섭잖아! 그래서 그냥 나오다가 드미트리 글루콥스키의 메트로 2033 을 사왔다.

제우미디어... 제우미디어... 어디였나 했더니 판타지·무협 등의 덕질에 강한 회사였다. 덕분에 책이 싸게 나온 듯. 황금가지였으면 11~11.5pt 때리고 행간·마진 박고 e-light에 찍어 두툼하게 400페이지짜리 두 권으로 나왔을 책이, 9.5~10pt 정도의 빡빡한 조판에 묵직한 600쪽짜리 페이퍼백으로 나와 줬다. 만사천팔백원. 오 굿. 홈페이지 뒤져 보니 딘 쿤츠의 Watchers낯선 눈동자 라는 이름으로 재출간됐던데, 이거 정말 대단한 작품임. 일독을 권함.


2. 여튼 소설로 돌아와서.
상상력이 기똥차다. 핵으로 인해 모든 인구가 지하철역으로 기어들어가 지하철 역 하나마다 국가를 세운 상황을 바탕으로 하는 모험물. 역명도 그렇고 역사적인 면에서도 소련과 러시아라는 특이성이 있어 읽는 게 조금 벅차긴 하다. 모스끄바 친구들은 맨날 보는 노선도에 역명이라 쉽게 적응을 했을 텐데, 쎄울메트로 노선도만 외우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겐 좀 벅찰 수 있겠다.

그래서 친절하게 이걸 한국으로 옮겨 봤다. 서울지하철에서 1호선은 어버련이 먹고, 3호선의 삼성제국과 동맹을 맺는다. 4호선을 북조선이 점령하고, 민노당이 무장투쟁으로 회현-대학로 라인을, 사회당이 홍대-상수 라인을 점거한다. 2호선 바깥쪽은 자치구가 서 있고, 동대문 바깥쪽은 돌연변이가 침투한다. 이 상황에서 경복궁 자치구에 사는 주인공은 친구의 부탁을 받아 터널을 타고 문명이 발전한 용산-서울역으로 메시지를 전하러 떠난다. 이게 대충 프로도 배긴스가 샤이어를 떠나는 정도의 결단.

지금 여기까지 읽었는데, 앞으로 벌어질 일이 꽤 재미있어 보인다. 100개가 넘는 역 중에서 지금 딱 두 개 진군했는데도 두근두근하다. 한 가지 아쉬운(아니, 한계라 할 만한) 점이 있다면 역 이름이나 역 간 간격, 각 역이 상징하는 것들이나 주변 상황을 모르다 보니 이해에 한계가 좀 있다는 것. 특히 뒷날개의 노선도를 자주 봐야 하는데, 아예 별도로 잘라 책갈피 쓸 수 있게 만들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있다. 그래도 20개국에 번역 출간도 되었다 하고, 한 50쪽 읽고 나니 꽤 흡인력이 있고, 대충 출근길에 100쪽 넘게 읽어 치웠으니 꽤 재미있는 책인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아무래도 지하철로 3분거리인데 도보로는 하루 이상 걸리는, 그나마 위험천만한 대장정이라는 것, 하나의 세계가 한 도시의 지하철 노선 안에 응축되어버린다는 것 등이 사람들의 구미를 자극하지 않았을까 싶다. 뭐 일단 러시아 사람들 중 모스끄바 지하철 노선도를 서울 지하철 노선도만큼 빡빡하게 외우고 그 안에서 재미를 찾아낼 사람이 많지 않은데도 러시아에서 큰 인기를 끈 걸 고려해 보면 소설 자체로도 충분히 매력은 있지 않았나 싶다.

3.
작가는 후속작인 메트로 2034를 출간하여 러시아 베스트셀러에 올려 두었으며, 헐리우드와도 접촉 중이라고 한다. 다만 여러 개의 지하철 세트를 설득력있게 재현해 내고 그 안에서 크리처물에 가까운 액션 장면도 넣고 하려면 아무래도 자금 문제 등이 있을 것 같다.

이에 제우미디어 쪽에서도 2권 발매와 발맞춰 서둘러 1권의 2판을 내놓았다. 그래도 1권이 이미 4쇄까지 찍은 걸 보면, 장르 문학 쪽에서도 제우미디어 류의 또 마이너한 취향이 있어서, 그쪽 팬덤이 강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개인적으로는 반길 만하다.

다만, 번역자가 영어·독어 전문이고 고유명사 중에서도 헌터/스토커 등이 등장하는 것을 보면 영어 중역일 가능성이 높은데, 원본 판본을 제대로 제시하지 않는 것 같아 좀 그렇다. 덕을 겨냥한 출판사라 그런 건지는 몰라도 역자의 말이나 해설 같은 것 하나 없이 깔끔하게 소설 내용만으로, 간지도 거의 없이, 빡빡하게 찍어 버린 것 보면 이것도 나름 에코매니지먼트인가 하는 농담도 나올 법한 부분이 있다(물론, 농담이다.).

4.
그건 그렇고, 책 일부만 읽고 리뷰 쓰는 이 고약한 버릇은 좀 어떻게 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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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브프라임 시장 붕괴로 인해 세계 경제가 휘청휘청하고 있을 때, 당연히 여러 가지 책들이 쏟아져 나왔을 것이다. 생각나는 대로 읽든말든 하는 나 같은 사람이 산 책이 뭐 가이드라인이 될 리는 없지만, 일단 몇 자 적어 본다.

필자들의 권위와 기타 여러 가지 요인을 놓고 보자면 이만한 책도 드물지 않을까 싶다.

서론에서 말하는 책의 아웃라인은, 지금까지의 정부가 지나치게 관리를 안 해 온 면이 있으니 이것을 해결해야 하며, 수출국의 수입국 국채 매입 전략으로 인한 무역 불균형의 문제가 어떻게든 해결될 필요가 있다는 점, 이를 위해 세계 경제 질서를 재편할 필요가 있다는 점 정도가 되겠다.

뻔한 얘기와 결론일 수 있지만, 그만큼 현실에 대한 면밀한 분석과 그럴 듯한 결론이 중요해진다. 디테일이 중요하고, 이를 위해서는 걸출한 내공이 필요하다. UN 하에 위원회가 생겼고, 총괄 감독 역할을 맡은 조셉 스티글리츠가 끌어모은 각 파트의 책임자들은 무시무시한 사람들인 것 같다(책이 회사에 없어서 이름을 적진 못하겠다.).

그런데 이런 책들에는 리스크가 걸리는데, 의견 충돌도 많고, 민감한 얘기들을 빼거나 억지로 넣는 과정에서 배가 산으로 가거나 반대로 너무나 교과서적인 이야기만 늘어놓다 끝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그리고, 내 짧은 깜냥 때문인지, 1장을 읽다 잠깐 장탄식을 했다. “무서운 놈들일세...... 뭔가 대단한 걸 만들었어...... ”

내용들이 깨알같고 논의 하나하나가 잘 다듬어져 있다. 압축률이 높기 때문에 사소한 오역 하나가 글을 좀 뒤틀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역자 박형준이나 동녘 편집/외주 교열자나 고생이 많았을 것 같다. 문제는 이게 단점도 된다는 건데, 슥슥 읽다 잠깐 딴 데 갔다 와서 앞장을 실수로 펼쳐도 뭔가 새롭다는 것. 문장의 정보/논의 밀도가 높다보니, 슥 읽고 넘어간 부분이 사실 깨알같이 독해했어야 하는 부분인 경우가 꽤 많다. 출퇴근 길에 팟캐스트 귀에 꽂고 대강 읽는 사람에게는 쥐약인 셈이다.


그래서 일단 이 책은 집어치워 두고, 아래의 책을 또 샀다(그래요! 나 집중력 떨어지고 끈기 없어요! (......)).

이 책을 쓴 라구람 라잔은 FRB에서 그린스펀의 전략을 깐 전설적인 경제학자로 알려져 있다. 당시 발제문을 읽었을 때는 뭐 맞는 얘기구만 했는데, 2005년에 경기가 고공행진을 하고 그린스펀이 역대 최고인지 최고 중 한 명인지 논쟁을 하고 있는 마당에 리스크 헷징이 리스크를 키운다고 주장했을 때의 충격은 대단했을 것이다(물론 대단하지 않았다. 씹었거든).

그때 발제문:
http://www.kc.frb.org/publicat/sympos/2005/pdf/rajan2005.pdf

여튼 일이 터지고 나니 우왕 라잠신 하고 사람들이 달려들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고, 결국 책이 나왔다. 몇 권 낸 것 같은데, 녹두거리 그날이오면에서 발견한 책은 이것. 국외자(인도계)의 입장에서 미국 경제를 뜯어보고 쓴 책인데 아무래도 레퍼런스나 논의의 단단함은 모자란 것 같다. 크루그먼 책도 완전히 단단하게 메꾸기보다는 예시나 일화를 많이 끌어오는 것을 보면 “대중서는 대중서답게”라는 트렌드도 작용한 것 같다.

에...... 또 잡설이 길었는데, 이 책의 미덕 중 하나는 사람들의 행동이 정말정말 합리적이었다고 생각하는 저자의 자세다. 일단 바텀업을 해 보자.

매니저는 왜 그런 리스크를 키웠을까? 이율이 국채나 기준금리보다 세다는 얘기는 리스크를 안았다는 증거다. 하지만 이 리스크를 MBS로 묶어 발생 확률을 줄이고(10% 부도율 증권 두 개를 상하위 관계로 묶고, 하위에서 손실이 날 때만 상위가 개입하여 메꾸는 기준으로, 동시부도율은 1%로 떨어진다. 산술적으로는.), 여기다 보험까지 걸고 하면, 등급도 센 놈이 대박 이율이 난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러면 다들 뛰어들 수밖에 없고, 리스크 분산 메커니즘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면 리스크가 분산되어야 할 메커니즘이 무너진다(이를 테면 두 개가 같은 지역, 같은 계층에 집중되면 동시부도가 날 확률은 10%에 가까워지고, 시장이 붕괴하면 대강 터진다.).

CEO도 합리적이다. 공격적 경영으로 자신의 몸값을 높여야 하고, 회사가 발전하는 것을 보기를 즐긴다. 따라서 매니저와 리스크매니저가 싸우고 있으면, 회사를 위해 몸바쳐서 일하는 사람을 태클거는 사람보다 선호할 수밖에 없다. 그런 태클이 자꾸 걸리면 회사가 뒤뚱거린다고 생각할 수 있으니까. 그래서 리스크매니저는 기대치가 낮고, 이로 인해 몸값이 낮게 책정될 수밖에 없으며, 저급 인력이 몰려드는 데다가, 의지도 꺾인 상태가 된다. 그렇게 실무자는 리스크에 적극적으로 뛰어든다.

큰 그림과 규제를 짜야 할 정부는 뭐하고 있었나? 행정부가 주택 경기를 활성화한답시고 돈을 부었다는 사실에서 이미 끗. 클린턴 이후 닷컴붕괴 등의 악재를 견디기 위해 정부가 한 짓이 대출로 경기를 유지한다는 것이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생각해 보자. 정책적으로 패니메이, 프레디맥 등의 적극적 구매를 유도했고, 자본을 부어 굴렸다. 그린스펀은 문제가 나면 정부가 보증해 준다고 암묵적 메시지마저 던졌다(저자는 아예 그걸 그린스펀 풋이라고 불렀다.). 이율이 겁나게 나면 니가 먹고, 망하면 정부가 구제한다. 이런 마당에 이 골든칩을 물지 않는 민간 기관을 찾기가 더 힘들 게다.
그럼 FRB가 미쳤으니 저리껒여 하면 행복하겠지만, 미국의 실업률이 또 문제가 된다. FRB는 실업률이라는 변수를 콘트롤하기 위해 금리를 낮게 유지해야 한다는 함정이 있다. 어떻게든 소비진작을 해서 실업률을 낮추지 않으면 난리가 날 판인데 어떻게 은행들, 투자자들보고 입 씻고 저리 꺼지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FRB는 계속 시장 붕괴를 막기 위해 개입하겠다는 사인을 냈고, 그것이 금융권의 무자비한 투자를 불렀다.


모든 이들은 자신의 여건에 따라 합리적으로 행동했으나 그 결과는 처참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이런 논리에 따르면 정부 규제나 시장 개입을 통해 질서를 정립하는 것은 저자의 대안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저자는, 지금 현재의 규제가 과잉 규제로 이어질 가능성을 경계하고 있다. 어차피 위기 상황에서는 다들 몸을 사리는데, 이걸 더 규제하는 법을 만들면 변동 폭이 더 커진다는 게다(반대로 시장이 장밋빛일 때는 정부가 더 경기를 부양하여 붕괴를 유발하기도 한다.), 저자는 온갖 파생상품들 덕에 우리가 더 좋은 삶을 살 수 있음을 더 강조하며, 현상을 그대로 둔 상태에서 어떻게든 튜닝하며 갈 것을, 오히려 시장성을 더욱 강조할 것을 주문한다.
이를 테면 그는, 정부가 자꾸 대마불사(Too big to fail)이니 구조적으로 중요한(Systemically Important Financial Instutition) 금융기관을 구제하고 방어해 주기 때문에 얘네가 사고를 치는 것을 현재의 문제로 본다. 이 상황에서는 “실수하면 절대로 망한다”는 인식이 사라지도록, 정부가 회사를 망하게 내버려두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망하면 정부가 보장해 준다는 자신감 자체가, 정상적인 시장 논리를 훼손하기 때문이다. 기업은 앞날이 어찌될지 모르는 상태에서 이를 악물고 추측하고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따라서 잘못된 은행을 망하게 하여 경종을 울려야 한다. 대신 파도타기 효과의 영향으로 인해 한 기업의 패망이 전체 경제로 파급될 가능성을 없어기 위해 SIFI의 조건을 명확하게 제한할 것을 요구하면 된다고도 말한다.
더 나아가 저자는, 기업은 무조건 리스크를 공개하도록 하고, 소비자가 판단할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고 말한다. 사람들이 리스크에 대한 명확한 정보를 얻는다면, 이를 감안하여 투자를 하므로, 위험하기 그지없는 상품들은 퇴출될 가능성이 높다. 이런 부분들을 통해 합리적 판단의 근거를 제공하고, 이를 시장을 통해 조율하여 오히려 리스크를 날리자는 전략. 굉장히 우파적이고 보수적인 해법이다. 이러한 제안은 정체성이 모호하여 리버럴에게는 우파적 정책으로, 우파에게는 좌파적 정책으로 사이에 끼어 버릴 수도 있고, 한 사람의 해법이라 조금은 애매할 수 있다.

하지만 뭐가 됐건간에 중요한 것은 이러한 과정을 통해 벌어진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서는 많은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생각만큼 눈이 멀지 않았다. 이미 2006년 경 한 간부가 이 제품들을 떨어내기 위해 고군분투해 왔고(해고당했다.) 루비니도 있었다. 그들의 의견은 기존 패턴에 반영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 패턴 자체가 조금씩 변화해야 한다.


덧) 이 글은 책의 일부분에만 집중하여 적었는데, 그 외에도 무역 불균형 등에 대해서도 다루는 등 커버 범위는 좀 더 넓다. 다만, 전문성이나 권위성 면에서는 역시 스티글리츠 보고서는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덧) 이 책의 한계 중 하나는 굉장히 강력하게 “미국 입장에서 취할” 일들을 적었다는 점이다. 이 책에 나오는 많은 해법(이를 테면 고등교육 확충)은 이미 고졸자의 수가 많은 한국에는 맞지 않는다든지, 관치금융을 겪은 나라의 시장 허약성이 아닌 오랜 역사의 자율 경쟁형 금융 시스템을 가정한다든지 하는 문제가 있다. 따라서 이 책의 내용을 우리나라의 현실을 읽는 데 쓰기에는 많은 문제가 있을 것이다. 이 부분을 감안하고 읽는다면 더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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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하도 일일일 하다 보니 사놓은 책들이 진도가 안 나간다. 열어 두기만 한 책들만 대여섯 권 되고, 몇 권은 한 2~3년째 20% 언저리를 왔다갔다 한다. 얼마 전 시작한 르낭 책과 신상희의 하이데거 책은 “아 요즘 머리가 제대로 썩었구나” 하는 장탄식을 내뱉게 하고 있으니, 마음이 안 좋다. 그래서 읽히는 책을 보자 하여 아래 두 권을 질렀다(...)


1.
야로슬라프 올샤 2세와 박상준이 공동 기획한 체코 SF 걸작선이다. 제일 부러웠던 게 몇 가지 있었다. 체코에서는 20대 초반에 SF 팬진을 내면 읽어 주는 사람이 있고, 그 팬진을 쓸 만큼 뭔가 출간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실 제일 부러운 건, 이런 덕질(...)을 하면서도 사람이 일을 해서 국가를 대표하는 외교관이 될 수 있다는 것이겠지(물론 좀 슈퍼맨 같긴 하다.).

잡설이 길었는데, 보통 체코 소설하면 생각나는 건 카렐 차펙이라 할 것이다. 이 책 말미에 실린 해설을 보면, R.U.R.이 1925년에 우리말 번역으로 출간된 적이 있다 하니, 역시 덕질은 만국공통 당시에도 작품에 대한 감식안과 열정이 있는 사람이 있었던 것 같다.

또 잡설인데, 에에... 작품들의 완성도가, 질투가 날 만큼 높다. 지금까지 '브래드베리의 그림자'까지 읽었으니 짧게 정리. 한 작품도 버리기 힘들 정도인데, 지금까지의 베스트는 '스틱스'와 '지옥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이르지 네트르발의 '스틱스'는 돌아올 수 없는 황천의 강을 '아리아드네'라는 행성으로 옮겨 놓았다. 초공간 물리학을 이용하여 돌아올 수 없는 강을 만들어 두고, 저편에 있는 땅을 밟을 것인가를 고뇌하는 인간을 그 위에 심었다. 순문학의 영역과 SF의 영역 사이의 균형이 적절하다. 반면 페트르 헤테샤-카렐 베베르카의 '지옥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는 장르문학 두 가지를 잘 섞어 두었다. 워쇼스키의 '매트릭스' 이후 많이 나온 주제인 가상 현실과 현실 세계의 관계지음이 첫째요, (좀비 게임을 살짝 뒤틀어) 좀비 입장에서 플레이하는 게임 시나리오 기반의 스토리텔링이 둘째다(이를 테면, '디스트릭트9'이 철거민/게토의 문제 위에 '헤일로'의 액션을 얹었다든지, 오시이 마모루의 '아바론'이라든지...). '아인슈타인 두뇌'는 요즘 내가 '열심히 살기'에 대한 회의가 많아 객관적으로 읽을 수 없었던 관계로 패스(많이 흔들렸다......).


2.
위 책에서 읽은 분량이 문학적인 깔끔함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면, 김보영의 이 단편집은 꽤 하드한 내용 기반이다. 하지만 이 작품집이 담고 있는 과학적 질문보다는, 이 작품들이 근간으로 삼고 있는 몇 개의 질문을 살펴 보는 것이 좋겠다. 스포일러가 되는 질문들을 생략하다 보니 몇 개의 작품은 빠졌다. 이건 고메나사이~

유기 생명체가 멸종한 지구에서, 인간이 만든 로봇이, 인간의 존재 자체를 망각한 상태에서 살아가고 있다가, 유기물에 대한 연구를 기초부터 쌓아 올린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종의 기원'을 읽으면 되고, '종의 기원; 그 후에 있었을지도 모르는 이야기'는 이를 바탕으로 좀 더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말하면 스포일이에요~).

경험론자들의 백지설(타불라 라사)에 따르면 인간은 자신이 받아들인 경험과 지식으로 결정된다. 그렇다면 감각이 완전히 박탈된 클론은 무엇을 느낄까? 그는 어떤 방식으로 사고할까? '촉각의 경험'은 그 질문에 답하고 있다.

'우수한 유전자'는 제목에서도 보듯 인간의 아종분화 가능성을 다루고 있다. 그 점에서 H.G. 웰즈의 '타임머신'에 겹쳐 읽었는데(몰록과 엘로이), 김상훈은 백인과 홍인(미국 원주민)의 갈등에 방점을 찍고 있다. 나도 김상훈 의견에 좀 더 가까워졌다. 아무 것도 모르는 순박한 키바의 주민들과, 문명의 이기에 꽁꽁 둘러싸여 사는 스카이돔의 주민들을 대립항으로 두는 것.

빛에 가까이 다가가면 시간은 무한에 가깝게 느려진다. 한 인간이 몇십 년을 아광속으로 달렸을 때 그는 우주의 끝까지 이동해 갈 수 있다. 이러한 인간은 결국 시간을 가로질러 달리게 된다. 이 '시간 여행자'는 문명의 명멸을 어떤 방식으로 관조할 것인가? '미래로 가는 사람들' 4연작을 읽어 보면 되겠다.


3.
전체적인 질문들의 무게나, 이에 기반한 기술들을 보면 상당히 깊고 정교한 고민을 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김상훈이 책 말미에 '본격 SF'라는 말을 달아 둔 것도 그렇고, 이 작품들이 발표되었을 때 SF 비평계의 감격은 상당하지 않았을까 싶다. '와 드디어 걸출한 하드 SF 작가가......'라든지.

하지만 여기 대해서는 약간의 유보 조항을 두고 싶은 것도 사실이다. 그건 내가 SF가 '사이언스'인가 '픽션'인가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고, 정답은 '둘 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둘 다인 동시에 우선권 다툼 같은 것도 생긴다. SF는 사고의 지평을 열어야 하는 동시에, 소설로서의 재미도 갖추어야 한다. 결국 SF는 두 개의 기준을 가지고 있으며, 둘 중 하나의 강점이 다른 하나의 약점을 커버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김상훈이 듀나와 김보영을 비교하는 부분에서의 문제가 이것인데, 김상훈은 유려한 문장이나 사고의 구조에서 듀나를 위시한 작가들이 과학적 상상력보다는 문학적 상상력 쪽에 치우친 것 아닌가 생각하는 쪽이고, 사실 '한국 SF 풍토'를 걱정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한 고민이다. 하지만 난 그 부분에 대해서 내 유보조항을 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재미있고, 잘 짜여진 이야기가 만들어졌다는 것과, 그 이야기의 디테일이 조탁되었다는 것, 이 두 가지는 양립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SF는 소설적인 재미와 정교함을 갖추어야 한다. 그런데, 500쪽에 달하는 이 책을 폭풍처럼 하루만에(정확히 말하면 출·퇴근길에) 몰아쳐 읽는 와중에도, '아 이 부분은 사건들을 좀 더 콤팩트하게 쳐서 질주하듯 달렸으면 좋겠어' 하며 아쉬워하게 한다든지, '이 부분을 굳이 이렇게 강조한 의도가 뭐지?'하고 고개를 갸웃하게 되는 부분이 생긴다. 이건 저자들한테 '쌤 그건 이렇게 하는 게 더 좋을 것 같은데요?'를 입에 달고 살던 편집자 출신의 한계인지도 모르겠다(이런 걸 '빌어먹을 편집자 놈의 돼먹지 못한 욕심'이라고 부를 수 있을 수도 있겠으나, 선배들 그늘에서 너댓 권 만들어 본 게 다라 그런 말을 할 자격은 없다. 그리고, 어쨌든 편집자가 손대기 시작하면 좀 conventional한 얘기들이 강해지게 마련이라......).

사실, 그래서 초기 중·단편에 대한 감동만큼이나 작가의 발전상을 보고 싶은 것이 사실이고,  더 많은 책들을 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기게 마련이다. 문제는 여기저기 컴필레이션 형식으로 뿌린 책들이 '우라지게' 많다는 점이고, 그래서 그 다음 작품들을 모은 또 한 편의 작품집이 끌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배명훈 등 반가운 얼굴도 있고 하여 쓸어담다가 흠칫(13권 정도 되더라...... 다 담기 귀찮아서 작가 파일을 첨부함 -_-). '적당한 수준에서 멈추어, 나도 모르게 입덕의 관문을 넘는 일은 피한다'는 지론이 무너질 뻔했다.. 그것이 어쨌든 요즘 한정된 두뇌 용량으로 살아가는 내 지혜이므로, 여기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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