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언제나처럼 좀 긴 서설
어제 회사 체육대회 끝나고 서점에 아돌프에게 고한다 를 사러 갈랬더니, 세미콜론...... 9000원짜리 5권이라니 이건 너무 무섭잖아! 그래서 그냥 나오다가 드미트리 글루콥스키의 메트로 2033 을 사왔다.

제우미디어... 제우미디어... 어디였나 했더니 판타지·무협 등의 덕질에 강한 회사였다. 덕분에 책이 싸게 나온 듯. 황금가지였으면 11~11.5pt 때리고 행간·마진 박고 e-light에 찍어 두툼하게 400페이지짜리 두 권으로 나왔을 책이, 9.5~10pt 정도의 빡빡한 조판에 묵직한 600쪽짜리 페이퍼백으로 나와 줬다. 만사천팔백원. 오 굿. 홈페이지 뒤져 보니 딘 쿤츠의 Watchers낯선 눈동자 라는 이름으로 재출간됐던데, 이거 정말 대단한 작품임. 일독을 권함.


2. 여튼 소설로 돌아와서.
상상력이 기똥차다. 핵으로 인해 모든 인구가 지하철역으로 기어들어가 지하철 역 하나마다 국가를 세운 상황을 바탕으로 하는 모험물. 역명도 그렇고 역사적인 면에서도 소련과 러시아라는 특이성이 있어 읽는 게 조금 벅차긴 하다. 모스끄바 친구들은 맨날 보는 노선도에 역명이라 쉽게 적응을 했을 텐데, 쎄울메트로 노선도만 외우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겐 좀 벅찰 수 있겠다.

그래서 친절하게 이걸 한국으로 옮겨 봤다. 서울지하철에서 1호선은 어버련이 먹고, 3호선의 삼성제국과 동맹을 맺는다. 4호선을 북조선이 점령하고, 민노당이 무장투쟁으로 회현-대학로 라인을, 사회당이 홍대-상수 라인을 점거한다. 2호선 바깥쪽은 자치구가 서 있고, 동대문 바깥쪽은 돌연변이가 침투한다. 이 상황에서 경복궁 자치구에 사는 주인공은 친구의 부탁을 받아 터널을 타고 문명이 발전한 용산-서울역으로 메시지를 전하러 떠난다. 이게 대충 프로도 배긴스가 샤이어를 떠나는 정도의 결단.

지금 여기까지 읽었는데, 앞으로 벌어질 일이 꽤 재미있어 보인다. 100개가 넘는 역 중에서 지금 딱 두 개 진군했는데도 두근두근하다. 한 가지 아쉬운(아니, 한계라 할 만한) 점이 있다면 역 이름이나 역 간 간격, 각 역이 상징하는 것들이나 주변 상황을 모르다 보니 이해에 한계가 좀 있다는 것. 특히 뒷날개의 노선도를 자주 봐야 하는데, 아예 별도로 잘라 책갈피 쓸 수 있게 만들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있다. 그래도 20개국에 번역 출간도 되었다 하고, 한 50쪽 읽고 나니 꽤 흡인력이 있고, 대충 출근길에 100쪽 넘게 읽어 치웠으니 꽤 재미있는 책인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아무래도 지하철로 3분거리인데 도보로는 하루 이상 걸리는, 그나마 위험천만한 대장정이라는 것, 하나의 세계가 한 도시의 지하철 노선 안에 응축되어버린다는 것 등이 사람들의 구미를 자극하지 않았을까 싶다. 뭐 일단 러시아 사람들 중 모스끄바 지하철 노선도를 서울 지하철 노선도만큼 빡빡하게 외우고 그 안에서 재미를 찾아낼 사람이 많지 않은데도 러시아에서 큰 인기를 끈 걸 고려해 보면 소설 자체로도 충분히 매력은 있지 않았나 싶다.

3.
작가는 후속작인 메트로 2034를 출간하여 러시아 베스트셀러에 올려 두었으며, 헐리우드와도 접촉 중이라고 한다. 다만 여러 개의 지하철 세트를 설득력있게 재현해 내고 그 안에서 크리처물에 가까운 액션 장면도 넣고 하려면 아무래도 자금 문제 등이 있을 것 같다.

이에 제우미디어 쪽에서도 2권 발매와 발맞춰 서둘러 1권의 2판을 내놓았다. 그래도 1권이 이미 4쇄까지 찍은 걸 보면, 장르 문학 쪽에서도 제우미디어 류의 또 마이너한 취향이 있어서, 그쪽 팬덤이 강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개인적으로는 반길 만하다.

다만, 번역자가 영어·독어 전문이고 고유명사 중에서도 헌터/스토커 등이 등장하는 것을 보면 영어 중역일 가능성이 높은데, 원본 판본을 제대로 제시하지 않는 것 같아 좀 그렇다. 덕을 겨냥한 출판사라 그런 건지는 몰라도 역자의 말이나 해설 같은 것 하나 없이 깔끔하게 소설 내용만으로, 간지도 거의 없이, 빡빡하게 찍어 버린 것 보면 이것도 나름 에코매니지먼트인가 하는 농담도 나올 법한 부분이 있다(물론, 농담이다.).

4.
그건 그렇고, 책 일부만 읽고 리뷰 쓰는 이 고약한 버릇은 좀 어떻게 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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