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브프라임 시장 붕괴로 인해 세계 경제가 휘청휘청하고 있을 때, 당연히 여러 가지 책들이 쏟아져 나왔을 것이다. 생각나는 대로 읽든말든 하는 나 같은 사람이 산 책이 뭐 가이드라인이 될 리는 없지만, 일단 몇 자 적어 본다.

필자들의 권위와 기타 여러 가지 요인을 놓고 보자면 이만한 책도 드물지 않을까 싶다.

서론에서 말하는 책의 아웃라인은, 지금까지의 정부가 지나치게 관리를 안 해 온 면이 있으니 이것을 해결해야 하며, 수출국의 수입국 국채 매입 전략으로 인한 무역 불균형의 문제가 어떻게든 해결될 필요가 있다는 점, 이를 위해 세계 경제 질서를 재편할 필요가 있다는 점 정도가 되겠다.

뻔한 얘기와 결론일 수 있지만, 그만큼 현실에 대한 면밀한 분석과 그럴 듯한 결론이 중요해진다. 디테일이 중요하고, 이를 위해서는 걸출한 내공이 필요하다. UN 하에 위원회가 생겼고, 총괄 감독 역할을 맡은 조셉 스티글리츠가 끌어모은 각 파트의 책임자들은 무시무시한 사람들인 것 같다(책이 회사에 없어서 이름을 적진 못하겠다.).

그런데 이런 책들에는 리스크가 걸리는데, 의견 충돌도 많고, 민감한 얘기들을 빼거나 억지로 넣는 과정에서 배가 산으로 가거나 반대로 너무나 교과서적인 이야기만 늘어놓다 끝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그리고, 내 짧은 깜냥 때문인지, 1장을 읽다 잠깐 장탄식을 했다. “무서운 놈들일세...... 뭔가 대단한 걸 만들었어...... ”

내용들이 깨알같고 논의 하나하나가 잘 다듬어져 있다. 압축률이 높기 때문에 사소한 오역 하나가 글을 좀 뒤틀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역자 박형준이나 동녘 편집/외주 교열자나 고생이 많았을 것 같다. 문제는 이게 단점도 된다는 건데, 슥슥 읽다 잠깐 딴 데 갔다 와서 앞장을 실수로 펼쳐도 뭔가 새롭다는 것. 문장의 정보/논의 밀도가 높다보니, 슥 읽고 넘어간 부분이 사실 깨알같이 독해했어야 하는 부분인 경우가 꽤 많다. 출퇴근 길에 팟캐스트 귀에 꽂고 대강 읽는 사람에게는 쥐약인 셈이다.


그래서 일단 이 책은 집어치워 두고, 아래의 책을 또 샀다(그래요! 나 집중력 떨어지고 끈기 없어요! (......)).

이 책을 쓴 라구람 라잔은 FRB에서 그린스펀의 전략을 깐 전설적인 경제학자로 알려져 있다. 당시 발제문을 읽었을 때는 뭐 맞는 얘기구만 했는데, 2005년에 경기가 고공행진을 하고 그린스펀이 역대 최고인지 최고 중 한 명인지 논쟁을 하고 있는 마당에 리스크 헷징이 리스크를 키운다고 주장했을 때의 충격은 대단했을 것이다(물론 대단하지 않았다. 씹었거든).

그때 발제문:
http://www.kc.frb.org/publicat/sympos/2005/pdf/rajan2005.pdf

여튼 일이 터지고 나니 우왕 라잠신 하고 사람들이 달려들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고, 결국 책이 나왔다. 몇 권 낸 것 같은데, 녹두거리 그날이오면에서 발견한 책은 이것. 국외자(인도계)의 입장에서 미국 경제를 뜯어보고 쓴 책인데 아무래도 레퍼런스나 논의의 단단함은 모자란 것 같다. 크루그먼 책도 완전히 단단하게 메꾸기보다는 예시나 일화를 많이 끌어오는 것을 보면 “대중서는 대중서답게”라는 트렌드도 작용한 것 같다.

에...... 또 잡설이 길었는데, 이 책의 미덕 중 하나는 사람들의 행동이 정말정말 합리적이었다고 생각하는 저자의 자세다. 일단 바텀업을 해 보자.

매니저는 왜 그런 리스크를 키웠을까? 이율이 국채나 기준금리보다 세다는 얘기는 리스크를 안았다는 증거다. 하지만 이 리스크를 MBS로 묶어 발생 확률을 줄이고(10% 부도율 증권 두 개를 상하위 관계로 묶고, 하위에서 손실이 날 때만 상위가 개입하여 메꾸는 기준으로, 동시부도율은 1%로 떨어진다. 산술적으로는.), 여기다 보험까지 걸고 하면, 등급도 센 놈이 대박 이율이 난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러면 다들 뛰어들 수밖에 없고, 리스크 분산 메커니즘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면 리스크가 분산되어야 할 메커니즘이 무너진다(이를 테면 두 개가 같은 지역, 같은 계층에 집중되면 동시부도가 날 확률은 10%에 가까워지고, 시장이 붕괴하면 대강 터진다.).

CEO도 합리적이다. 공격적 경영으로 자신의 몸값을 높여야 하고, 회사가 발전하는 것을 보기를 즐긴다. 따라서 매니저와 리스크매니저가 싸우고 있으면, 회사를 위해 몸바쳐서 일하는 사람을 태클거는 사람보다 선호할 수밖에 없다. 그런 태클이 자꾸 걸리면 회사가 뒤뚱거린다고 생각할 수 있으니까. 그래서 리스크매니저는 기대치가 낮고, 이로 인해 몸값이 낮게 책정될 수밖에 없으며, 저급 인력이 몰려드는 데다가, 의지도 꺾인 상태가 된다. 그렇게 실무자는 리스크에 적극적으로 뛰어든다.

큰 그림과 규제를 짜야 할 정부는 뭐하고 있었나? 행정부가 주택 경기를 활성화한답시고 돈을 부었다는 사실에서 이미 끗. 클린턴 이후 닷컴붕괴 등의 악재를 견디기 위해 정부가 한 짓이 대출로 경기를 유지한다는 것이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생각해 보자. 정책적으로 패니메이, 프레디맥 등의 적극적 구매를 유도했고, 자본을 부어 굴렸다. 그린스펀은 문제가 나면 정부가 보증해 준다고 암묵적 메시지마저 던졌다(저자는 아예 그걸 그린스펀 풋이라고 불렀다.). 이율이 겁나게 나면 니가 먹고, 망하면 정부가 구제한다. 이런 마당에 이 골든칩을 물지 않는 민간 기관을 찾기가 더 힘들 게다.
그럼 FRB가 미쳤으니 저리껒여 하면 행복하겠지만, 미국의 실업률이 또 문제가 된다. FRB는 실업률이라는 변수를 콘트롤하기 위해 금리를 낮게 유지해야 한다는 함정이 있다. 어떻게든 소비진작을 해서 실업률을 낮추지 않으면 난리가 날 판인데 어떻게 은행들, 투자자들보고 입 씻고 저리 꺼지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FRB는 계속 시장 붕괴를 막기 위해 개입하겠다는 사인을 냈고, 그것이 금융권의 무자비한 투자를 불렀다.


모든 이들은 자신의 여건에 따라 합리적으로 행동했으나 그 결과는 처참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이런 논리에 따르면 정부 규제나 시장 개입을 통해 질서를 정립하는 것은 저자의 대안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저자는, 지금 현재의 규제가 과잉 규제로 이어질 가능성을 경계하고 있다. 어차피 위기 상황에서는 다들 몸을 사리는데, 이걸 더 규제하는 법을 만들면 변동 폭이 더 커진다는 게다(반대로 시장이 장밋빛일 때는 정부가 더 경기를 부양하여 붕괴를 유발하기도 한다.), 저자는 온갖 파생상품들 덕에 우리가 더 좋은 삶을 살 수 있음을 더 강조하며, 현상을 그대로 둔 상태에서 어떻게든 튜닝하며 갈 것을, 오히려 시장성을 더욱 강조할 것을 주문한다.
이를 테면 그는, 정부가 자꾸 대마불사(Too big to fail)이니 구조적으로 중요한(Systemically Important Financial Instutition) 금융기관을 구제하고 방어해 주기 때문에 얘네가 사고를 치는 것을 현재의 문제로 본다. 이 상황에서는 “실수하면 절대로 망한다”는 인식이 사라지도록, 정부가 회사를 망하게 내버려두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망하면 정부가 보장해 준다는 자신감 자체가, 정상적인 시장 논리를 훼손하기 때문이다. 기업은 앞날이 어찌될지 모르는 상태에서 이를 악물고 추측하고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따라서 잘못된 은행을 망하게 하여 경종을 울려야 한다. 대신 파도타기 효과의 영향으로 인해 한 기업의 패망이 전체 경제로 파급될 가능성을 없어기 위해 SIFI의 조건을 명확하게 제한할 것을 요구하면 된다고도 말한다.
더 나아가 저자는, 기업은 무조건 리스크를 공개하도록 하고, 소비자가 판단할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고 말한다. 사람들이 리스크에 대한 명확한 정보를 얻는다면, 이를 감안하여 투자를 하므로, 위험하기 그지없는 상품들은 퇴출될 가능성이 높다. 이런 부분들을 통해 합리적 판단의 근거를 제공하고, 이를 시장을 통해 조율하여 오히려 리스크를 날리자는 전략. 굉장히 우파적이고 보수적인 해법이다. 이러한 제안은 정체성이 모호하여 리버럴에게는 우파적 정책으로, 우파에게는 좌파적 정책으로 사이에 끼어 버릴 수도 있고, 한 사람의 해법이라 조금은 애매할 수 있다.

하지만 뭐가 됐건간에 중요한 것은 이러한 과정을 통해 벌어진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서는 많은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생각만큼 눈이 멀지 않았다. 이미 2006년 경 한 간부가 이 제품들을 떨어내기 위해 고군분투해 왔고(해고당했다.) 루비니도 있었다. 그들의 의견은 기존 패턴에 반영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 패턴 자체가 조금씩 변화해야 한다.


덧) 이 글은 책의 일부분에만 집중하여 적었는데, 그 외에도 무역 불균형 등에 대해서도 다루는 등 커버 범위는 좀 더 넓다. 다만, 전문성이나 권위성 면에서는 역시 스티글리츠 보고서는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덧) 이 책의 한계 중 하나는 굉장히 강력하게 “미국 입장에서 취할” 일들을 적었다는 점이다. 이 책에 나오는 많은 해법(이를 테면 고등교육 확충)은 이미 고졸자의 수가 많은 한국에는 맞지 않는다든지, 관치금융을 겪은 나라의 시장 허약성이 아닌 오랜 역사의 자율 경쟁형 금융 시스템을 가정한다든지 하는 문제가 있다. 따라서 이 책의 내용을 우리나라의 현실을 읽는 데 쓰기에는 많은 문제가 있을 것이다. 이 부분을 감안하고 읽는다면 더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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