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술
하일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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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결혼 10주년에 살인혐의로 경찰서로 끌려온 이의 진술로 시작되는 이 소설은 전개방식이 주제와 어울린다.  

진술이 진행되면서 점차 들어나는 것은 주인공이 현실이라 믿고 있는 것과 의미가 또 다른 현실에서는 정반대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의 전처(윤영미)와 처남, 장인, 주변인들의 진술과 자신이 기억하고 말하는 진술은 어긋나 있다.

이미 죽은이가 살아있고 자신에게 축북을 했었다는 이들이 실은 저주를 퍼붓었다는 사실들이 하나씩 밝혀지면서 독자는 화자가 <병적 애도반응>이란 테두리에서 외치는 것만으로 단정지울수 없음을 알아간다.

주인공이 말하는 현실에서 실재는 대상에 대한 믿음의 왜곡이다. 그는 끝임없이 믿는다 하고 치밀하게 그것을 이어가며 살아간다. 이미 대상자체 대한 의미나 고찰은 없다. 대상에 대한 의미가 그를 장악하고 있다. 마치 현상학에서 대상<노에마>는 일체 없어지고 <노에시스>만 겹겹이 둘러싼 형상이다. 그러니 대상은 없어져도 상관은 없고 의미로만 뭉쳐진 믿음의 대상은 계속 살아움직인다. 그런데 문제는 그 의미의 성격과 기원이다.

그는 왜 이미 죽은 이를 놓치 못하는가? 그를 깨닫게 해줄수 있는 것은 없는가?...작가는 여기서 세사람의 실패를 말하고 있다. 하나는  해운스님이라는 현실의 고통을 해결할수 없고 생사일여, 몽매일여라는 공허한 말로 깨달음대신 도피처를 제공한 종교인과 정신과 의사이면서도 환자를 치료를 못하고 환자에게 죽는 이, 그리고 <환상과 실제>라는 철학책을 내면서도 전작 자신의 현실을 보지 못하는 논리적 인간이 그것이다.

작가는 이들..종교와 정신과 철학을 불신하는 것 같다. 이것은 위에 말한 <믿음>에 대한 해결책이 세명의 모습으론 해결할수 없다고 보기 때문인 것 같다. 믿음은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사물과 사람에 대한 욕망이고, 의미이고 이름이다. 주인공의 아내대한 반응처럼 잠시도 떨어질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이런 믿음은 시간이 지날수록 견고해 질 뿐이지 넘어서지는 못한다. 후설이 말하듯 타인을 <내가 타자를 나의 복제復制로서 통각할 뿐>인 것이다.

주인공이 끝임없이 한시도 포기못한 이 믿음을 받치고 있는 기원과 의미는 무엇일까.. 표면적으로 보기에는 사랑이지만 이미 주인공의 진술은 믿을수가 없다. 오히려 전처와 처가식구의 주장대로 이기적일수 있으며 알수 없는 형국이다. 여기서 한가지 염두할 것은 주인공이 그 믿음과 기원이 되는 사랑의 힘으로 사람을 죽였다는 것인데 주인공의 진술대로면 허상을 제거한 것이다. 주인공이 말하는 허상은 자신이 믿고 있는 허상을 방해하는 것으로 정의된다. 즉 자신이 욕망을 방해하는 것이 허상이고 그것은 제게되어야 한다고 믿는 것이다. 그리고 이미 허상<아내>은 책 후반부에서 볼수 있듯이 그와 하나가 되어있다.

책 초반에 식사장면에서 마약과 IMF에 무관심한 주인공과 교수들 처럼 이들은 타인에 대해 무관심과 자신의 욕망에 의미만 실제인 것인양 믿는 것이 <믿음>을 받치고 있는 단초다. 한치도 물러서지 않는 자시중심적 해석, 타인의 무관심, 욕망의 현실을 부정하는 것을 허상이라 여기고 제거하려는 모습. 그것은 실은 홀로선 인간의속성이라 하겠다.

주인공을 보면서 루카치가 한 말이 떠올랐다. < 절대적으로 고독한 사람의 언어는 서정적이고 독백적이다>

홀로 주장하고 욕망하고 정의하고 이름을 붙이고 의미를 말하는.. 신이 되어버린 서정적 주인공이 현대인의 한측면이 아닐까라는 생각은 과장일까. 소설속 인물이지만 자신마저 속이고 결국 고독감에 몸무림치는 것 같아  읽는 내내 답답함을 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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