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모두의 눈을 피해 숨어서 책을 읽는 아이였고, 이제 나 자신이 소중히 여김 받는 한 권의 책이 되고 싶었다. 익명의 존재, 여자, 아이, 친구의 손에서 넘어가는 몇 장의 삶이 되어 다만 몇 시간만이라도 그들을 내 곁에 붙잡아둘 수 있으리라. 이에 비길 만한 소유가 있을까? 이보다 우애 넘치는 침묵, 이보다 완벽한 이해가 있을까?-259쪽
엄마는 당혹스러운 듯했다. 그렇지만 내가 일상보다 허구를 더 좋아하게 되었다면 그건 어디까지나 엄마 때문이었다. 엄마는 나에게 이미지의 힘, 적확한 단어 하나가 드러내 보이는 사물의 경이로움, 수수하지만 아름다운 문장이 담을 수 있는 모든 사랑을 가르친 장본인이었다. -261쪽
"글쓰기는 가혹하지. 그거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까다롭고 요구가 많은 일일 게다……. 정말로 진실한 글을 쓰려면 말이야. 말하자면, 자기를 두 쪽으로 쪼개는 셈이 아닐까. 한쪽은 아등바등 살아야 하고, 다른 쪽은 응시하고 판단하는 거지……."-261쪽
그래도 나는 여전히 모든 것을 갖기 바랐다. 안식처처럼 따뜻하고 진실한 삶-이따금 가혹한 진실을 견딜 수 없더라도-과 영혼 깊은 곳의 울림을 포착할 수 있는 시간을 모두 바랐다. 걷는 시간과 잠시 멈춰 서서 이해하는 시간이 다 내 것이기를 바랐다. 길에서 조금 비껴나는 때도 있고 남들을 얼른 따라가서 신나게 외치는 때도 있었으면 했다. -262쪽
"크리스틴, 무슨 일을 하면서 살 건지 생각해봤니? 이제 너도 졸업반이잖아. 찬찬히 생각해봤어?" "하지만, 엄마, 저는 글을 쓰고 싶은데요……." "엄마는 진지하게 말하는 거야, 크리스틴. 너도 직업을 선택해야만 할 거야. (엄마의 입술이 살짝 떨렸다.) 밥벌이를 해야지……."-296쪽
밥벌이라니! 그 말이 얼마나 비루하고, 자기밖에 모르고, 탐욕스럽게 다가왔는지 모른다. 밥벌이를 해야만 사는 건가? 단 한 번의 생애를 아름다운 충동으로 사는 게 더 가치 있지 않나? 아니면, 삶을 유희하고, 목숨을 무릅쓰고……. 아아, 나도 모른다! 하지만 하루하루를 고만고만한 밥벌이로 살아가다니! …… 그날 저녁 나는 꼭 누구에게 ‘살아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넌 돈을 치러야 해’라는 말을 까놓고 듣는 기분이었다.-29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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