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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책읽기 - 김현의 일기 1986~1989
김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은 김현이 사망하기 전 86년부터 89년까지의 독서 일기를 엮은 것이다. 대부분 그 당시에 출간된 시, 소설, 평론, 번역서들을 그 때 그 때 읽고 쓴 글이라, 20대 중반을 맞이하고 있는 나에게는 낯선 작가들이 많다. 낯선 작가들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짧게 문단을 스쳐 지나간 작가들이 많았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할 것이다. 이름이 친숙한 작가들 또한 어느덧 중견 내지 대가로 불리우며 휴필, 내지 절필을 맞이하고 있다. 십몇년 사이 어떤 이들은 잊혀지고, 또 어떤 이들은 기억되는 무상함을 돌이켜보면서 '힘 있는 글, 내지 생명력 있는 글은 어떻게 씌여지는가?' 하는 물음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된다.
김현의 가차없는 비평글을 읽다보면 '좋은 글'을 쓰는 것보다 '나쁜 글'을 피해 가는 것이 더 어렵겠다는 생각이 든다. 김현은 '나쁜 글'에 대해 무척이나 예민한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다. 그는 마치 극성스러운 하우스키퍼처럼 먼지떨이를 들고 이 곳 저곳을 부산하게 청소한다. 책과 책 사이를 종횡무진 누비며 부지런히 먼지를 떨어내는 그에게 '북키퍼(book keeper)'라는 별칭을 지어주고 싶다. 멀거니 구경하고 있는 글쟁이 지망생들에게 김현은 이렇게 말하는 것만 같다. '자, 봐. 더럽지? 이렇게 쓰면 안된다-잉!'
김현이 떨어낸 먼지들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 깊은 울림이 없다/ 교과서의 세련된 연습문제 답안지 같다/ 삶의 근저를 흔들지 못한다/ 피상적이다/ 상투적인 기원, 감탄, 흥분, 열망/ 도식적이다/ 표피적이다/ 비진정성이 진정성의 탈을 쓰고 있다/ 지루한 다짐/ 응축된 감정이 없는 절제를 위한 절제/ 거짓 초연함/ 득도한 체/ 깊이가 없다/ 낭비다/작위적이다/ 제스쳐의 왕성함/ 역겨운 기교투성이/ 모범 답안/ 꾸며낸 고통/ 자기방어적/ 오만/ 독선/ 자만심/ 옳다고 알려진 것만을 사유하는 순응주의/ 달관의 제스쳐/ 치기 투성이/ 재미있다, 그러나 그것 뿐이다/ 토포스의 나열/ 관념의 체조/ 말주정…
작가의 저마다의 성격이나 기질, 심리, 태도, 의식/무의식 등에 따라 저마다 다른 먼지들을 갖고 있겠지만, 대충 그 기원을 그려볼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은 첫째로 '착하게 보이고 싶다, 멋지게 보이고 싶다, 의식 있는 인간으로 보이고 싶다. 그렇게 해서 칭찬받고, 이름도 알리고 싶다'는 공명심을 숨기지 못할 때, 또는 어설프게 아닌척 할때 둘째, 옳다고 여겨지는 가치에 열렬히 기탁하는 제스츄어를 취할때, (그것은 모범생 기질일 수도 있고, 또 다른 컴플렉스일 수도 있다) 셋쩨, 신인의 경우 젊음을 무기 삼아 치기를 휘둘러댈 때, 중견 이상의 경우 지금까지의 인정을 발판 삼아 권위주의나 매너리즘에 빠질 때 넷째, 부족한 재능을 어떻게든지 봉합하려는 안타까운 몸부림이 드러나고 말 때, 다섯째, 한계를 조건화 해내는 과정에서의 충분치 못한 모색, 즉 이 허방을 피하려다가 저 허방에 빠지고 말 때, 여섯째, '먼지'를 떨어내려다 결벽증에 걸려 뻣뻣해지고 말 때
글을 쓰는 이상 위와 같은 경우를 '완전히' 피해갈 수 있는 방법이란 없다. 작가들이란 비루함을 숨기고자 애쓰는 완벽주의자들이지만 결국은 저도 모르게 슬쩍슬쩍 치부들을 내비치고 마는 불완전한 인간인 것이다. 그래도 덜 쪽팔리려면, 끊임없이 가다듬고 또 가다듬는 수 밖에 없다. 김현의 표현을 빌자면. '악마같은 고통이 더 필요하다'(198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