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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주석의 한국의 美 특강
오주석 지음 / 솔출판사 / 2005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문외한’의 편견일수도 있겠지만, 내게 있어 미술관이란, 푸들강아지 같은 유한부인의 이미지로 저장되어 왔다. 그런데 몇 해 전 방문했던 간송 미술관은 좀 달랐다. 입구에는 실사 출력의 화려한 현수막 대신 화선지 위에 쓴 정갈한 붓글씨가 전시를 알리고 있었고, 뜰에는 잡종 강아지가 더없이 천진한 얼굴로 놀고 있었다. 마당에 놓인 가을 국화는 아름다운 장닭의 울음을 들으며 노랗게 익어가고 있었다.
간송 미술관은 그렇게 조용한 충격으로 다가왔지만, 나는 그날 그림을 완전히 ‘헛봤다.’ 옛 그림은 ‘우상 좌하(右上 左下)’ 의 시선 흐름으로 보아야 한다는 기본적인 사실조차 모른 채 전시회장 입구에서 동선을 왼편으로 틀어 그림들을 보아나가기 시작했다. 그림 크기에 따라 간격을 달리 두고 보아야 한다는 것도 몰랐다. 큰 작품이든 작은 작품이든, 전시 유리장에 코를 대고 그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아나갔다. 하나하나 뜯어보면 주제와 부주제, 페이소스와 유머, 동세와 여백, 붓터치에 실린 작가의 마음, 때로는 작가의 농담과 실수까지도 보아낼 수 있다는 것도 몰랐다. 옛 그림, 하면 ‘고색창연하다’는 편견도 갖고 있었기에 깊은 묘미를 느끼기 어려웠다. 그렇게 1층과 2층을 ‘막막하게’ 둘러보고 나니 피로감이 몰려왔다.
관람 후 “어떤 그림이 제일 좋았냐?”고 묻는 친구에게, “글쎄, 한국 미술은 잘 몰라서…”하고 말끝을 흐렸다. 『오주석의 한국의 미 특강』이라는 책이 있다는 것, 그 책을 지은 분이 간송 미술관의 연구원이라는 것을 그 친구에게서 들었다. 얼마 후 이 책을 펴든 건 그날의 ‘피로감’을 반복해서 느끼고 싶지 않다는 생각 때문이었다.『오주석의 한국의 미 특강』은 “아는 만큼 보인다”는 경구를 거듭 실감하며 되뇌게 했다. “부지런히 많이 보면 보일 줄”알았던 내 오랜 착각은 이 책을 만나 깨어졌다.
오주석 선생은 옛 그림 읽기의 ‘기본 상식’으로 작품 크기의 대각선 또는 그 1.5배 만큼 떨어져서 볼 것, 오른쪽 위에서 왼쪽 아래로 쓰다듬듯이 바라볼 것,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세부를 찬찬히 뜯어볼 것, 이 세 가지를 강조하고 있다. 한번만 언급하고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책 군데군데서 거듭 강조하고 있다. 이 ‘기본 상식’만 알아도, 관람의 기본 매너는 갖추는 셈이다. 완전히 엉터리로 그림을 보았던 지난날이 부끄러워 “아, 내가 이 책만 읽고 갔었더라도!” 하는 탄식을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책을 읽다보니 이런 경구도 떠올랐다. “아는 만큼 화가 난다.” 김홍도의 <송하맹호도>에 서린 기상에 감탄하다, 그림을 망치고 있는 일본식의 화려한 표구를 보자 얼마나 속상하던지. “아, 이건, 조선 사람들이 기모노를 입은 꼴”이라는 저자의 탄식이 절로 나올 만했다. 일제 강점기를 지나면서 우리 옛 그림 70퍼센트 정도가 이런 식으로 표구되어 있다고 하니, 기가 차고 뼈아프기 그지없는 일이다. 약탈로 인해 국내에 남아 있는 유물이 워낙 적다보니,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작품까지 국보나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상황이라고 한다. 국력이 한 나라 국민의 감식안마저 좌지우지 할 수 있음을 느끼게 하는 서늘한 대목이다. 논개와 춘향, 이순신의 초상이 친일 경력이 있는 작가 김은호에 의해 ‘일본식으로’ 예쁘장하게 그려졌다는 대목 또한 어이없게 만든다. 한국혼을 상징하는 인물들의 초상을, 그런 화가에게 맡긴 담당 공무원은 얼마나 의식 없는 자인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그 일을 맡은 화가의 양심은 대체 얼마나 무딘지. 우리 미술을 알고 더 나아가 감식안을 길러야 할 필요성은 이처럼 지난한 우리의 현실 때문이기도 한 것이다.
흥분했던 호흡을 가라앉히며, 다시 “아는 만큼 보인다”는 경구로 돌아가본다. 결국 잘 보려면, ‘알아야’ 하는 것이다. 무엇을 알아야 하는가. 저자의 말마따나 “옛 사람의 눈으로 보고, 옛 사람의 마음으로 느끼기” 위해서는 결국 ‘옛 나날’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고구려 고분벽화를 잘 보려면 도교사상과 토착 신앙을, 고신라 이래 불교 왕국 동안의 문화재는 당시 사람들의 불교적 심성을, 조선시대 그림은 사서삼경 정도는 이해하는 교양이 있어야, 그림의 진정한 뜻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머리로만 안다고 다되는 것은 아니다. 2년 동안 오로지 단원만을 연구한 적이 있었던오주석 선생은 글씨만 봐도 대충 몇 살 무렵에 쓴 것인지, 또 어떤 마음 상태에서 쓴 것인지가 보일 정도라고 하는데, 이는 진실로 심취하지 않고는 얻어질 수 없는 경지일 것이다. <송하맹호도>를 연구할 때는 야생 호랑이 전문가를 찾아가 자문을 구하고, <모계영자도>를 해석할 때는 오랫동안 양계장을 하셨던 분으로부터 조언을 듣기도 하고, <이재의 초상>과 <이채의 초상>속 인물이 동일인이라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해부학을 전공한 의사를 찾아가는 저자의 모습에서 학구열 이상의 진한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 “아는 만큼 보려면” 결국 “좋아하고” 또 그것을 “즐겨야” 하는 것이다.
『오주석의 한국의 미 특강』은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知之者不如好之者 好之者不如樂之者)는 경지를 향해 든든한 마음으로 첫걸음을 내딛게 하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