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과 6펜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8
서머셋 몸 지음, 송무 옮김 / 민음사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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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스가 전하는 가출 사고 소식은 언제나 판에 박혀 있다. 청소년들의 가출은 비행으로 이어질 우려가 있어 위험하고, 부녀자들의 가출은 모정을 저버린 무정한 짓으로 간주된다. 그에 비하면 집안의 가장(주로 아버지)이 가출했다는 사건은 잘 다뤄지지 않는 것 같다. 실제 통계 수치가 그런 것인지, 성인 남자의 가출은 사회혼란에 그다지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간주되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아빠가 돈 많이 벌어올게, 그때까지 엄마 말씀 잘 듣고 있어야 한다”는 식의 합의(?) 가출이 아닌,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 같다고 선언하고 집을 떠난 아버지를 둔 친구가 있다. 홀어머니와 함께 일찍부터 고생을 겪어온 그 친구를 보면서 드는 생각은 복잡했다. 일차적인 정리情理로는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그네 아버지가 야속하게 여겨졌지만, “도대체 무슨 연유로 처자식들을 버리고 떠났을까?”에서 피어나는 물음표들은 꽤 길게 이어졌다. 역마살이 있었다고도 하고, 못 다 이룬 꿈이 있었다고도 하는 친구의 말을 들으면서 또 한편, 그 아버지에 대한 안쓰러움이 피어올랐다. 

아버지는 돈 잘 벌어다주고, 어머니는 가사를 야무지게 돌보고, 자식들은 공부 잘하고, 말 잘 들으면 보통 그 가정은 건실하다는 평을 받는다. 더 잘하고, 못하고의 차이는 있겠으나, 일단은 제 자리를 지키는 것이 기본이라고들 여긴다. 만약 이들 어느 한 구성원이라도 위치를 이탈하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쑤군거릴 준비를 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사람들 사이의 평판과 시선이야말로 사회의 비공식적 안전책 중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시선’의 감옥에 갇히는 데서 오히려 더 큰 불행과 위선이 생겨나기도 한다. 

런던의 증권 브로커인 윌리엄 스트릭랜드는 마흔이 넘은 나이에 지금껏 구축해온 궤도를 벗어날 결심을 한다. 이유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이다. 그는 17년 동안 가족들을 위해 봉사한 성실한 가장이었지만, 이제는 더 이상 자기 안의 창작 욕구를 누를 수 없어졌다. 하지만 그림을 그리기로 한 순간부터 그는 가장의 책무를 벗어던진 천하의 몹쓸 놈 소리를 듣기 시작한다. 그동안의 수고에 대한 인사는 어디에도 없다. 그러니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이란 뻔뻔해지는 수밖에 없다. 

「세상 사람들이 아주 비열하다고 생각할 겁니다.」
「그러라지요」
「사람들이 미워하고 멸시해도 상관없단 말인가요?」
「상관없어요」

반면, 그의 부인인 에이미는 사회의 통념을 아군 삼아 자신이 누려왔던 안정을 계속 유지하려고 한다. 에이미는 남편의 사랑을 잃은 것보다 구설수에 오를 것을 더욱 두려워한다.     

「아직도 그 분을 사랑하십니까?」
「글쎄요. 모르겠어요. 아무튼 돌아오길 바래요. (…) 그이가 돌아오기만 하면 만사가 순조롭게 해결될 것이고, 그러면 아무도 이 일을 모를 거예요.」       


이쯤 되면, 과연 가족을 버리고 떠난 자가 철면피인지, 남은 자들이 불행한 자들인지 혼돈스럽게 된다. '가족주의’는 선량한 미풍양속의 ‘탈’을 쓰고 있지만, 때로 그것은 ‘덫’이 된다.  

* 덧 : 이 소설을 처음 만난 것은 초등학교 6학년 때다. 그 무렵, 주말이면 아버지를 따라 다대포 근처로 낚시를 가곤 했는데, 낚시에는 별로 재미를 붙이지 못했던 나는 맛없는 식빵을  씹으며 문고판을 읽곤 했다. <달과 6펜스>는 초등학생이 읽기에는 확실히 무리였다. 태양 아래서 잔뜩 얼굴을 찡그리고 싸우듯 읽노라니, 엄마가 땡볕에서 무슨 책을 그렇게 보느냐고 혼을 냈고, 마지못해 바위 틈 그늘로 갔더니, 그곳엔 갯강구들이 득실거려서 미칠 것만 같았던 기억이 난다. 

이십대 중반에 이 책을 다시 읽고, 여러 군데 줄을 긋고, 위의 서평을 썼다. 몇 해가 흐른 후, 지금 다시 책을 펼쳐보니 “추는 항상 좌우로 흔들리고, 사람들은 같은 원을 늘 새롭게 돈다.” (18p, 민음사 판)는 문장이 눈에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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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aru 2007-11-22 17: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초등학생이 읽기에는 확실히 무리죠, 암만요~
전 고3 졸업 앞두고 있었는데... 문고판으로요. (그건 무리는 아니죠 호호)
그림 그리겠다고 집 나간건 이해하는데.. 이 아저씨 사생활(아마 타이티에서 새여자 얻고 그런 과정을 보면서 그랬나??)이 난잡하군! 했던 거 같슴다 ^^

자일리 2007-11-24 16: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평 쓸 당시엔 에이미의 뻔뻔함이 눈에 크게 들어왔었답니다.
이카루님 댓글을 읽고 보니, 제가 만약 에이미 입장에 놓인다면? 하는 생각이 드네요.
이카루 님, 가정적이신 것 같아요.(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