렉싱턴의 유령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사상사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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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지루한 여름날이었다. 공포영화를 보러 갔다가 배 아프게 웃고 돌아온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신경을 긁는 날카로운 현악기 소리, 화면 여기저기를 물들이는 핏자국, 관객을 째려보는 배우들의 섬뜩한 얼굴, 가빠져 오는 맥박 소리, 뚜벅. 뚜벅. 뚜벅 건조한 발자국 소리… 관객들 모두 악! 소리를 지르려던 찰라…의 바로 직전, “워훠훠허! 음마앗! 나살려!” 어느 겁 많은 관객이 오두방정난리블루스를 추며 비명을 질러댔다. 

클라이맥스 때마다, 꼭 한 박자 앞선 비명이 터져 나왔고, 키들거리는 실소가 뒤를 이었다. 실없이 긴장이 풀리면 그렇게 웃음이 나오는 것일까. 도저히 웃음이 멈추질 않았다. 으허험, 헛기침을 해봐도, 양손으로 입을 여며보아도, 흡, 하고 숨을 멈춰보아도, 웃음이 멈추질 않아 고생했던 기억이 난다.

영화를 보고 나니, 옆구리는 당기는데 속은 어딘지 헛헛했다. 검붉은 색채와 음향, 비명과 놀람, 쫓고 쫓김, 악몽과 환각으로 이어지는 ‘말초적’ 공포물이 이젠 좀 지겹다 싶기도 했다. 뭣 좀 새로운 것 없을까? 실없이 소름 돋게 만드는 그런 것 말고, 내 안의 깊고 깊은 공포샘을 자극할 ‘진짜 공포’. 그 즈음 만난 책이 『렉싱턴의 유령』이다. 물론 이 소설집은 ‘공포’ 소설을 표방하고 있지도 않고, 하드코어와는 더더욱 거리가 멀다. 하지만 읽다보니 어느덧 ‘공포’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공글리게 되었다.

『렉싱턴의 유령』에 실린 일곱 편의 작품은 인간의 어둔 심연을 다루고 있어 꽤나 묵직하게 느껴진다. 하루키 소설에 단골로 등장하곤 하던 ‘맛난 요리를 먹고, 감미로운 재즈를 듣는’ 인물들 보다는 ‘식겁’(食怯)한 인물들의 비중이 크다. 한밤중 커다란 저택에 나 홀로 있는데 어디선가 노래와 웃음소리가 들린다든지(「렉싱턴의 유령」) 정원에 앉아 나무를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흉측한 짐승이 튀어나와 사랑 고백을 한다든지(「녹색 짐승」) 복싱도장에 다닌다는 이유로 자살원인제공자로 몰린다든지(「침묵」) 얼음사나이와 결혼하여 남극에 유배된다든지 (「얼음 사나이」)하는 식이다. 

  주인공들은 공포의 대상 앞에서 ‘모른 척’ 피해버리거나, 과민반응하거나, 오래도록 상처를 안고 악몽에 시달리며 살아가거나, 또는 속수무책이기도 하다. 하루키는 이처럼 공포 앞에서 나약한 (한편 잔혹한) 인간의 모습을 낱낱이 드러내 보여준다. 어쩌면 우리들 인간이란 공포 앞에서 가장 적나라해지는 존재들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소설을 읽는 우리들은 공포영화를 볼 때처럼 소리를 꽥 지르거나 얼른 눈을 가려버릴 수 없다. 옆 사람이 내지르는 타이밍이 맞지 않는 비명에 실소를 날릴 수도 없다. 대신 자신의 어둔 심연을 대면하는 경험을 갖게 될 것이다. 『렉싱턴의 유령』이 공포스럽게 여겨지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하루키는「일곱번째 남자」주인공의 입을 빌어 ‘공포의 대면(對面)’보다 더 무서운 ‘공포의 외면(外面)’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공포는 물론 존재합니다. … 그것은 여러 가지 다양한 모습으로 출현하고, 때로는 우리 존재를 압도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무서운 것은, 그 공포에 등을 돌리고, 외면하는 행위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우리는 우리 안에 가장 중요한 것을, 내가 아닌 다른 무엇에게 내어주게 됩니다.”

『렉싱턴의 유령』은 내 안의 공포를 향한 길잡이 노릇을 해주는 소설이다. 어느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했던 이야기, 내 영혼을 잠식하고 불안케하는 바로 그 이야기의 그림자를 따라가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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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aru 2007-11-30 1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허우...훕 리뷰 도입 부분요. 배꼽을 잡았슴다.. 리뷰 읽으며 키득거리도 넘 간만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