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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직 스피어
김언희 지음 / 해냄 / 2017년 7월
평점 :
《매직 스피어》
만일 시간 여행을 할 수 있다면 돌아가 바꾸고 싶은 인생의 한 지점은 어딜까. 만일 이런 능력을 나만 쓸 수 있다면, 혹은 누구라도 쓸 수 있다면 이 세상은, 나의 인생은 또 어떻게 달라질까. 만일 이런 능력을 가진 물건이나 사람이 있다면 온갖 권력과 세력의 표적이 되기 쉽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과연 이 능력은 그걸 가진 사람에게 축복일까?
늘, 그때 공부만 열심히 했어도, 누구를 만나지만 않았더라도, 그때 이런 선택을 했더라면 하고 아쉬워하거나 후회 했으면서 막상 과거 어느 시점으로 돌아갈까 물어보면 또 딱히 그런 시점은 떠오르지 않았다. 후회는, 아쉬움은 남더라도 그 모든 바보 같은 행동과 선택, 생각들이 날 만들어 왔으니까. 이번 생은 포기했다 우스갯소리도 하지만 그 모든 시점, 모든 순간이 모여 나를 만들었으니 부족하나마 그걸로 충분하단 생각이 드는지도 모르겠다.
소설 속에는 죽은 소녀를 살리기 위해 몇 번이나 과거로 돌아가는 남자가 있다. 한 천재 과학자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쳐 비밀리에 성공한 프로젝트가 있었다. 그 과학자는 민주화 투쟁의 중심의 자욱한 최루탄 연기 사이에서 아름다운 사랑 K를 만났고 결국 그 일 때문에 인생이 뒤틀리고 말았다. 다른 남자를 만나 가정을 꾸리고 딸을 낳았지만 억압된 기억 속에서 잊혔던 K가 떠오르자 그녀의 인생은 철저하게 무너졌다. 그녀의 딸은 하늘을 바라보며 우주를 꿈꾸는 소녀로 자랐지만 엄마를 너무 많이 닮았다. 그리고 그녀의 딸은 정해진 운명에 따라 사그라졌지만 그녀를 구하기 위해 몇 번이고 인생을 걸며 과거로 돌아가는 남자가 곁에 있다.
소설은 ‘매직 스피어’라는 물건을 둘러싸고 소녀의 목숨과 소녀를 구하려는 남자의 목숨을 여러 번 앗아간 사람이 누구인가란 비밀을 푸는 과정을 거대한 상상력으로 그려낸 소설이다. 불가의 깨달음에 닿기도 하고 양자역학이라는 과학과도 닿아있는 ‘시간’과 ‘존재’라는 비밀, 꿈을 통해 과거의 나와 접속해 인생을 바꿀 수 있는 기계 ‘매직 스피어’를 둘러싼 암투, 주인공이 매직 스피어를 통해 과거의 비밀을 풀고 소녀를 구할 수 있을지.
시간여행을 소재로 한 작품들을 여러 번 보아왔지만 시간여행의 원리를 불교 철학과 과학을 연결시킨 것으로 설정했기에 굉장히 친숙하면서도 더욱 신비로웠던 것 같다. 여러 번의 인생을 살면서 서서히 깨달음에 다가가고 소녀의 죽음의 비밀을 푸는 주인공과 조력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인생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사랑과 집착, 권력에의 욕망, 정보의 독점 혹은 공유가 가져올 미래, 아픈 역사 속에 스러졌던 많은 죽음들까지. 소설 속에 등장하는 많지 않은 인물들이 던지는 메시지들을.
흥미롭고 깊이 있는 소재, 적지만 다양한 모습을 한 등장인물들, 추리와 반전, 끝까지 이어지는 긴장감, 아름답고 처절한 사랑, 첫 장을 넘기고 순식간에 다 읽어버릴 정도로 좋은 가독성까지. 한 편의 멋진 영화를 본 듯 만족스럽고 여운이 남는 소설이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노래<보리수>를 찾아 들으며 나도 한 동안 하늘 저 너머 우주를 꿈꾸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