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인
차무진 지음 / 엘릭시르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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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

 


 

세상이 바뀌었으면 하고 절실하게 염원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부조리하고 썩어빠진 현실에 비관하여 세상을 등졌고 어떤 사람들은 불특정 다수를 향한 살인과 파괴로 가슴에 쌓인 분노를 풀었다. 어떤 사람들은 조용히 사람들을 모으고 세를 규합하여 변혁을 꿈꿨고, 또 어떤 사람들은 더러운 세상을 일거에 구원해줄 진인이 오시기를 기도했다. 그러나 참으로 의아한 일이다. 몇 천 년 그 오랜 세월이 흐를 동안 세상은 눈부시게 발전했다지만 여전히 우리는 세상이 바뀌기를 바라고 있다. 오히려 더 비참해졌는지도 모른다. ‘헬조선’이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퍼진 것을 보면.

 

독자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하다. 미륵이나 메시아 같은 진인이 이 더러운 세상이 한 순간에 확 바꿀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지 아니면 시민 하나하나의 각성으로 변혁은 바닥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하는지. 슬프게도 우리는 먼 과거의 선조들이 했던 고민을 아직 끝내지 못 한 것 같다. 과거에는 다른 왕을 세우고자 반정을 꾸미거나 한발 더 나아가 왕 위의 왕을 꿈꾸고자 했던 사람들도 있었고, 반대로 힘없는 민초들의 왕을 세우고자 했던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도 신분을 없애자는 생각까지는 못한 것 같다. 세월이 흐르고 사람들의 의식도 변하면서 신분제도 없어지고 왕도 사라졌지만 우리는 다른 형태의 신분제와 왕을 여전히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소설《해인》은 세상을 바꿀 진인, ‘아기장수’를 꿈꾸던 사람들의 이야기다. 어디선가 태어나 이 세상을 구원해줄 단 한명의 사람. 이 은밀한 비밀 혹은 전설은 저 멀리 가우리국(고구려) 그 위로부터 시작되어 얼마인지도 모를 시간동안 우리 민족과 함께 해 왔다. ‘해인’은 바로 진인을 품을 여인 즉 ‘성모’ 에게 새겨지던 인장을 말한다. 성모가 품을 아기장수를 모실 ‘박마’가 그녀를 찾아내 해인으로 ‘인식’을 하고 무사히 출산하여 진인으로 성장하도록 종신토록 보필할 상징적인 것.

 

이 ‘해인’은 그래서 대대로 역사의 주인이 되고자 했던 권력자, 욕망이 있는 자들의 먹잇감이 되었다. 자신이 혹은 자신의 아들이 다음 세상의 주인이 되기를 바라는 자들의 은밀하고 위협적인 공격 속에서 성모를 찾아내 지키는 ‘박마’들의 이야기가 소설 속에서 펼쳐진다. 소설 속 주인공 박마 ‘백한’은 어떤 이유로 불사의 몸이 되어 역시 계속해서 성모로 환생하는 여인을 찾아 몇 백 년을 역사의 중심에 서 있었다. 백한의 대척점에 선 불사 ‘정만인’ 그는 영혼을 바꾸는 해인의 힘을 이용해 불사를 끊으려 또 백한처럼 성모를 찾아 헤매며 백한과 대적 한다.

 

소설은 현대에서 고려 말 ‘이자춘’ 에게까지 올라간다. 바로 거기에서 백한과 성모의 인연은 시작되고 어떤 계기로 윤회를 거듭하며 다시 조선 이순신, 조선말의 흥선 대원군과 정봉준의 동학 혁명군, 일제 강점기의 윤심덕의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백한과 정만인의 성모를 둘러싼 안타깝고도 끔찍한 대결을 통해 거대한 상상력을 펼친다. 그리고 서서히 밝혀지는 백한과 정만인의 비밀이 소설의 결말을 이끈다.

 

소설은 현대에선 잘 쓰지 않는 고어적인 표현들과 해인, 박마와 아기장수, 성모의 관계를 둘러싼 독특한 세계관과 도약하는 역사를 따라가야 하기 때문에 쉽게 읽히진 않았지만 이들이 겪어야 하는 처절하고도 아픈 운명과 아슬아슬한 대결장면, 앞서 언급한 철학적인 고민들이 자연스럽게 용해되어 있기 때문에 끝까지 잘 집중 할 수 있었다. 역사를 이미 알고 있기에 이어지는 이야기들의 결말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지만 매 윤회의 생마다 결국 끔찍하고 아픈 죽음을 맞아야 하는 성모와 백한의 이야기를 챕터마다 마주쳐야 할 때 순간순간 이런 이야기를 쓴 작가가 미워지기까지 했다.

 

이는 그만큼 이야기와 캐릭터들이 살아있다는 얘기이기도 하고, 아기장수의 탄생을 목전에 두고 번번이 실패하는 장면에서 반복 되어 온 아픈 역사를 마주해야 하는 고통이 컸다는 얘기기도 하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면 소설 속 등장인물들 중 누구는 아기장수를 통해 일시에 세상을 바꾸기 위한 방도로 해인을 가지려 하고 또 누구는 그렇게 일시에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며 백성들의 각성이 필요하다 일갈하기도 한다. 나는 이 두 세력, 혹은 이 두 사상과 생각 앞에 이리저리 마음을 옮겨 다니며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아픈 사랑, 그 보다 더 아프고 처절한 역사, 그 안에서 소리 없이 사라졌을 백성들의 이야기, 백한과 정만인의 대결, 그리고 결말의 반전은 더운 날을 잊게 해줄 멋진 시간을 선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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