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기린의 날개 ㅣ 재인 가가 형사 시리즈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17년 2월
평점 :
《기린의 날개》

믿고 보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신작, 가가 형사 시리즈. 생각지도 못했는데 신작소식을 듣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다작으로 유명한 작가인데 그럼에도 내용까지 충실하니 좋아하는 독자들이 많을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신작이라고는 하지만 일본에선 이미 오래전에 출간되고 영화로까지 만들어진 작품이다. 이리저리 검색해보니 가가형사 시리즈는 2017년 현재 총 9권 발간되었는데 순서대로 1.졸업, 2.잠자는 숲, 3.악의, 4.둘 중 누가 그녀를 죽였다, 5.내가 그를 죽였다, 6.거짓말 딱 한 개만 더, 7.붉은 손가락, 8.신참자 이고 마지막이 바로 ‘기린의 날개‘다. 일본에선 전작인 ‘신참자’가 TV드라마로 제작되어 방영되었고, 그 후속작인 ‘기린의 날개’가 ‘기린의 날개: 극장판 신참자’로 2011년 개봉했다._네이버 영화_
나는 이 작품들 중 1, 6, 7권을 빼고는 다 읽은 것 같다.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가가형사 시리즈의 특징이라면 바로 가가형사의 ‘발품’이 아닐까 생각한다. 추리소설의 주인공들은 셜록 홈즈 같은 ‘안락의자 탐정’ 스타일도 있고 몸으로 부딪혀가며 사건을 해결하는 액션 스릴러 형사스타일도 있는데 가가 형사는 ‘발품 파는’ 형사다. 증거물을 기본으로 피해자가 가해자가 했을 행동과 그 이유를 주변 인물을 만나 인터뷰를 하고 관련 장소 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추적한다.
《기린의 날개》에서도 끊임없이 걷고, 택시를 타고, 질문을 하고 살핀다. 또 관련 장소에 가면 어김없이 커피를 마시거나 식사를 하고 물건을 산다. 파트너이자 사촌 동생인 ‘마쓰미야’와의 케미도 느끼며 함께 걷고 또 각자 발품을 파는 장면을 따라가다 보면 사건의 배경이 되는 도시를 함께 걷는 것 같은 느낌도 들고, 그 도시 특유의 정휘, 노포들의 정감어린 분위기에 젖어들게 된다. 그러니 당연히 속도는 느리다.
천재적인 탐정의 도약하는 추리도, 활극으로 줄 수 있는 긴장감도 아닌 주변인물의 행위와 장소들에 담긴 특별한 의미, 질문과 답변을 토대로 사건을 구성하다보면 가가형사와 함께 사건의 경위를 추리하는 특별한 여정을 함께 하게 된다. 바로 이 점이 가가 형사 시리즈의 매력이다.
《기린의 날개》의 배경은 도쿄의 니혼바시. 일본 도로의 중심이 된다는 ‘니혼바시’ 다리 ‘기린 조각상’ 앞에서 칼에 꽂힌 체 발견된 남자의 사건을 추적한다. 남자는 근처 지하도에서 칼에 찔렸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굳이 몇 백 미터를 걸어와 조각상 앞에서 쓰러진 것인데 병원으로 후송된 후 결국 사망하고 만다. 곧 경찰은 근처에 있을지도 모르는 범인을 추적하는데 용의자로 보이는 남자가 경찰을 피하다 차에 치여 의식불명 상태가 된다.
경찰은 용의자를 범인으로 잠정 단정하고 사건을 수사하고 가가형사와 마쓰미야는 한 팀이 되어 탐문수사를 시작한다. 여기서 가가형사의 발품이 시작 된다. 시간을 역으로 피해자의 경로를 추적하는 두 사람, 피해자와 용의자가 만난 이유, 결정적 증거물인 칼의 소유경로 등 그 둘의 행적을 추적하다 뜻밖의 사실이 밝혀진다. 용의자가 파견 노동자로 일하던 공장에서 산재사고 은폐가 있었던 것, 그리고 용의자가 그 일의 피해자 였으며, 그 범죄에 고위직이던 피해자가 연루되어 있었던 것. 언론에선 피해자와 가해자의 입장이 뒤 바뀐다.
그런 와중에서도 침착함을 유지하며 하나하나 새로운 단서를 추적하는 가가형사. 소설은 여러 가지 단서들을 던져주며 독자들을 시험한다. 나도 잠깐 이상한 쪽으로 사건을 바라보기도 했는데 소설의 후반부로 갈수록 생각지도 않은 방향으로 소설은 흘러간다. 그리고 결국 직면하기 어려운 진실 앞에 서게 된다.
뭔가 화끈하고 뒤통수 때리는 반전을 원하는 독자라면 이 소설은 읽기 힘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작가의 스타일을 알고, 좋아하는 독자라면 절대 실망하지 않을 작품이다. 잔잔하지만 늘어지지 않을 만큼의 적당한 긴장감, 니혼바시 특유의 정취, 사건 이면의 진실. 책장을 덮고 나서도 긴 여운을 남기는 매력적인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