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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체 읽는 남자
안토니오 가리도 지음, 송병선 옮김 / 레드스톤 / 2016년 11월
평점 :
《시체 읽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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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아무리 봐도 독특했다. 13세기 송나라의 판관 ‘송자’의 일대기를 동양 사람이 아닌 스페인의 작가가 썼다니. 스페인 최고의 역사소설가로 평가 받는다는 작가 ‘안토니오 가리도’는 하고 많은 이야기 중에 하필이면 왜 아시아의 국가, 문화도 정서도 완전히 다른 고대 남송시대의 판관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을까. 이에 대한 답은 ‘작가의 말’에 소상히 밝히고 있다.
그가 문학적인 이유로 법의학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고 있었고 법의학 초기의 역사를 다룬 자료들 사이에 ‘세계적인 법의학의 선구자이자 아버지’라고 알려진 ‘세원집록’의 저자인 중국 남송시대의 학자 ‘송자’를 발견하게 되었다는. 그리고 두 달 넘게 매혹적인 이야기를 찾지 못해 수 십장을 끼적이던 작가는 바로 이 이야기를 소설로 쓰게 된 것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이 소설은 법의학, 범죄 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범죄나 사체, 부검 장면들을 실감나게 묘사하고 있다.
이 소설을 제대로 즐기려면 그 시대의 사회, 문화, 법체계 등을 좀 이해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같은 동양권이라 해도 현재와 그 시대의 문화적 차이로 생소함을 많이 느끼는데 과연 스페인의 독자들은 이 소설을 어떻게 상상하며 읽을까 내심 궁금하다. 조상, 부모 (특히 아버지)와 장자, 스승, 나아가 황제의 권위를 신성시 하던 가부장제를 기반으로 한 엄격한 신분제 사회, 남녀 차별은 당연하고 사람을 사고팔며, 폭력은 일상화되어있고 자본의 소유 여하에 따라 또 다른 계급이 존재하는 복잡한 사회와 문화. 이런 부분은 법의학을 한 축으로 한 소설의 다른 한 축을 담당한 아주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송자는 수도 린안에서 회계원으로 일하는 아버지를 도우며 열심히 공부하여 뛰어난 성적 덕에 아버지의 직속상관인 ‘펭’판관의 조수가 된다. 송자는 그에게서 범죄수사와 소송 등 수사의 기초와 해부학의 기초를 배우게 된다. 그러나 그의 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는데, 어느 날 형이 살인사건에 휘말리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의 집에 불이 나 부모님은 돌아가시고 그는 도망자가 되어 아픈 여동생을 데리고 우여곡절 끝에 다시 린안으로 도망치게 된다.
결국 그는 현상금이 내걸린 범죄자가 된다. 그를 향한 추적 속에서도 그는 돈을 벌기위해 사기꾼 점쟁이와 묘지에서 시체를 매장하는 일을 하고 법의학의 실전을 익히며 ‘시체 판독 가’ 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그러던 그는 ‘밍 학원’ 교수의 눈에 들어 학원에서 공부하게 되는데, 은밀히 황궁에서 일어난 엽기적인 연쇄 살인사건을 해결하란 명을 받고 ‘칸 내상’의 지휘아래 사건을 조사해 간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많은 일들은 베일에 쌓여있고 일을 도와야 할 칸 내상은 정작 그의 수사를 방해한다. 범죄의 배후에 과연 누가 있는지 소설은 점점 그를 구석으로 몰아간다. 수사는 지지부진한데 설상가상 그를 추적해 오던 수사관이 시체로 발견되자 그는 살인자의 누명까지 쓰게 된다. 과연 그는 사건을 해결하고 살인자의 오명을 벗을 수 있을 것인가?
소설은 그의 아픈 가족사에 얽힌 이야기를 앞서 말 한 그 시대의 사회, 문화, 법체계 속에서 풀고 있고, 황궁 안에서 일어난 엽기적인 살인 사건을 법의학의 시각에서 다루며 적절한 긴장감을 유지하고 얽히고설킨 인물들을 등장시켜 매우 흥미롭게 풀고 있다. 주인공은 믿었던 자에게 배신당하고, 억울하게 가족들을 잃거나 배경이 좋은 인물들에게 부당한 일을 겪으며 지독히도 불운한 인생을 살아간다. 그는 성리학이 지배하는 사회 속에서 존경해야만 하도록 강요받은 아버지의 비위사실을 알게 되며 지독한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다. 실존 인물인 주인공을 더 극화 시기키 위해 설정한 ‘선천성 무 통각 증’, 이로 인해 엉망이 된 그의 신체로 인한 콤플렉스도 소설을 더욱 다채롭게 만드는 소재이다.
당시의 불안한 국제 정치상황, 유약하여 자리가 불안한 황제, 황제의 자리를 위협하는 숨은 세력, 끊임없는 음모와 계략들, 그 속에서 주인공은 억울한 누명을 썼고 끝내 최고 관료의 살인자로 둔갑해 있었다. 이로 인한 마지막 100페아자 가량의 재판장면은 이 소설의 백미다. 470페이지 가량 촘촘하게 이어진 이야기들이 완벽하게 연결되며 그의 목숨 앞에 놓여있다. 그가 수집한 증거들과 완벽한 논리, 그를 죽이려는 배신자들 사이에서 그는 홀로 자신의 변호하며 사건의 범인을 밝힌다. 많은 분량이었지만 마치 영화를 활자로 옮겨놓은 듯 실감나는 묘사와 빠른 전개와 놀라운 반전은 한시도 지루하게 만들지 않았다. 소설의 소개 글처럼 정말 ‘압도적인 소설’이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