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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임금 잔혹사 - 그들은 어떻게 조선의 왕이 되었는가
조민기 지음 / 책비 / 2014년 4월
평점 :
절판
《조선 임금 잔혹사》
역사는 정말 마르지 않는 샘처럼 끊임없이 이야기들을 만들어 낸다. 같은 사건, 인물을 보아도 정권이나 역사관, 혹은 자신이 속한 사회적 지위나 직업 등에 따라 전혀 다른 해석을 내 놓게 되니까 말이다. 환웅, 단군 시기부터 고려까지는 시기적으로 멀고 전해지는 사료가 많지 않아서 그런지 크게 논쟁이 되는 경우가 드물지만 조선은 현대에서 시기적으로 가장 가깝고 '조선왕조실록'이라는 거대한 역사, 경제, 사회, 문화의 자료가 있기 때문인지 참으로 다양한 관점에서 많은 이야기들이 쏟아진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광해군은 연산군처럼 폭군일 뿐이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자신의 뜻을 제대로 펼치지 못한 비운의 왕이 되었고, 악녀중의 악녀로 낙인 찍혀있던 희빈 장씨도 정쟁의 희생양으로 보는 시각이 대두되었다. 정도전 또한 희대의 간신으로 여겨지다가 요즘은 청렴하고 올 곧은 개혁자의 이미지로 변화됨을 보고 있으니 어떤 면을 어떤 시각으로 보는가에 따라 해석은 참으로 다양할 수 있음에 큰 즐거움을 느끼게 된다. 이 책《조선 임금 잔혹사》는 조선의 역대 임금들 중 가장 관심을 많이 받았던 12명의 임금들을 1)왕으로 선택된 남자, 2) 왕이 되고 싶었던 남자, 3) 왕으로 태어난 남자, 4)왕이 되지 못한 남자, 이 4가지의 분류로 묶어서 보여준다.
보통 학교를 졸업하고 나면 외우는데 지쳐서 그런지, 급격하게 역사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며 영화나 드라마 속에서 조금씩 변형된 역사를 만나게 된다. 때로 사극을 보며 '역사는 이렇게 전개 되었으니, 드라마 속 인물은 결국 이렇게 된다'는 말을 했더니 스포일러라고 하며 욕을 먹었다는 일화가 SNS에서 등장하기도 하는 것이나, 교학사 현대사 왜곡 교과서 문제, 중국과 일본의 역사왜곡 문제에 대처하는 역사학계와 정부의 모습을 보며 우리에게 역사란 대체 어떤 의미인가 생각해 보게 된다. 대를 이은 자신들의 이론만 정설로 인정하고 새로운 연구들은 무시하는 너무나 경직되고 폐쇄된 역사학계의 관행과 모습은 우리 사회가 처한 모습을 보여주는 바로미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래서 역사적 인물과 사건에 대해 다양한 해석을 쏟아내는 비 역사학자인 저자들, 사료가 부족한 고대사를 발로 뛰며 연구하고 온 인생을 바치는 일명 재야 사학자들의 연구는 정말 정사로 인정받고 아니고를 떠나 반갑기만 하다. 이 책《조선 임금 잔혹사》의 저자 조민기 또한 역사학자가 아닌 문화인류학을 전공하고 다양한 매체에 대중문화와 인문학에 대한 칼럼을 연재하고 강연을 하는 사람이다. 그러니 딱딱한 역사, 증명과 논거가 중심이 되는 역사와는 다른 새로운 관점에서 역사를 '들려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우리는 왕이라고 하면 단순히 왕의 아들로 태어나 세자가 되어 착실하게 제왕 학 수업을 받은 사람, 절대적 권위를 가지고 마음껏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사람,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마음껏 품을 수 있는 사람 정도로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조선에서 이렇게 왕이 된 사람은 손가락에 꼽을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또한 조선에서의 왕은 다른 나라의 왕처럼 절대 권력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신하들과 늘 권력 투쟁을 해야 하는, 사대부들의 대표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아이러니 하게도 자기 마음대로 권력을 휘둘렀던 사람은 연산군 정도밖에 없는 듯하다. 그러니 결국 반정으로 막을 내리게 되었는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이 책《조선 임금 잔혹사》는 이런 왕들과 왕이 되지 못한 세자들, 12명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그들은 때론 원치 않는 왕이 되어 조강지처를 내 쫒아야 하기도 하고, 자신의 아들을 독살했다는 의혹을 받기도 며느리에게 사약을 내리기도 했으며, 자신의 아들을 최대의 정적으로 생각하며 경계를 해야 하는, 당쟁으로 인해 자신의 아들을 뒤주에 넣어 죽이기도 해야 하는 참으로 불운한 사람들이기도 했다. 조선에서의 왕은 늘 정통성의 시비에 놓여 있었고 언제나 당쟁의 소용돌이 혹은 공신의 권력에 맞서 이리저리 줄타기를 해야 하기도 했으며, 그들의 아내인 왕비는 자신의 친정 식구들이 역모로 몰려 처형당하는 것을 보기만 해야 하기도 했고, 때론 아들과 남편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기도 했다.
이 책에서 나는 조선왕의 민낯을 볼 수 있었다. 또한 그 전에 알았던 왕들의 모습과 다른 새로운 면을 발견하기도 했다. 처음부터 무능한줄 알았던 선조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초기 집권 때에는 꽤 성군의 모습을 보였다는 점, 로맨티스트로만 그려졌던 연산군의 아버지였던 성종의 이중적인 면, 누구보다 성군의 자질이 있었던 광해군의 조금은 잘못된 선택, 왕을 중심으로 보게 되는 당쟁의 역사까지 흥미롭고 재미있게 이야기는 이어진다. 역사에 기본 지식이 있거나 없거나 아주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우리가 예전에 배웠던 왕의 재위기간 업적, 연도 등의 자세한 이야기가 아니라, 조금 멀리서 전체적으로 조망해 볼 수 있는 이야기라 조선사에 대한 큰 흐름을 잡을 수 있으며, 각 챕터의 끝에 정리된 재위연표, 부록으로 실린 관직의 조직도, 당파 등을 정리한 페이지는 상식을 채워주는 좋은 자료다. 학생들에게도 일반인의 교양서로도 손색이 없는 아주 괜찮은 책인 것 같다. 많은 분들께 읽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