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철호 275 - 계윤식 시나리오집
계윤식 지음 / 작가와비평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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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호 275》

 

 

 

처음으로 시나리오라는 것을 읽어 보았다. 늘 영화는 어떻게 만들어 질까, 그 시나리오라는 것은 어떻게 생겼을까 궁금하던 차에 《이철호 275》를 읽게 된 것이다. 이 시나리오는 모 영화사에서 영화 준비 중이었고, 남북 첩보전이기 때문에 북한의 도움을 받아 평양에서의 촬영 협조까지 끝낸 상태였지만 아마도 남북 간의 관계가 냉각되면서 영화화가 불발 되었다고 한다. 남북 간의 관계는 이명박 정권부터 급속도로 냉각 되었고, 정권이 바뀐 지금은 더욱 고착화 되고 있으니 이런 시나리오가 영화화되기는 거의 불가능 하지 않았을까 한다.

 

 

이 시나리오의 가장 큰 줄기는 정치와 국가를 초월한 인물들의 우정과 사랑, 그리고 또 하나는 '식량문제' 이다. 남북 관계가 악화일로를 걷고 있는 현재도 통일은 대박이라는 이야기가 나오는 아이러니한 정치적 상황에 만일 하나의 목적으로 정치와 국가를 초월한 합작이 가능하다면 얼마나 환상적일까? 거기다 현재도 큰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식량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획기적인 프로젝트를 위해서.

 

 

남북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여러 소재를 통해 우정과 사랑을 그린 영화들은 이미 많이 나와 있다. 대표적으로 공동경비구역JSA, 웰컴투 동막골, 고지전, 쉬리 등이 있고 북한의 식량문제를 다룬 간첩 리철진 도 있었지만, 이 시나리오가 다른 영화들과 다른 점은 식량문제를 전면에 내세웠다는 것이다. 보다 저렴한 가격에 수입할 수 있어서 국민의 가계에 도움이 된다는 효율과 자본의 논리로 바라봐서는 안 되는, 심각하고 중요한 사안이 바로 '식량'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종자' 회사는 다국적 기업에 모두 합병되었고, 우리가 국산이라며 재배하여 먹는 '종자'들은 다시 싹을 틔울 수 없도록 개량된 다국적기업에서 제공하는 종자들이다. 지금은 저렴하지만 우리가 자급자족할 수 있는 능력이 거의 사라지는 시점에 그들이 가격을 올려 버린다면 식량은 핵무기보다도 더 무시무시한 무기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참고] 행복을 일구는 젊은 농부의 농사 이야기 http://africarockacademy.com/10136281815

http://blog.daum.net/yoonseongvocal/7343239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기아에 허덕이는 북한과 이런 미래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남한이 전략적으로 손을 잡고 <슈퍼 옥수수 종자>를 키운다는 것이 시나리오의 큰 줄기다. 또한 이를 저지하려하는 것은 북한 내 쿠데타 세력과 손잡은 다국적 기업이다. 주요 등장 인물은 남한 정보원 이민규, 북한 정보원 송희립, 북한 유전공학 박사 정다혜, 일본 정보원 다께시, 그리고 남한 정보원 초희와 북한 정보원 석두 등이다. 이들은 적으로 만나 여러 번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지만 결국 남북 합작 프로젝트가 시작되면서 동지가 되고 남녀 간에 이루어 질 수 없는 사랑이 싹트게 된다. 이들의 프로젝트는 남한과 북한, 일본을 오가는 첩보전을 통해 긴장감 있고 아슬아슬하게 진행된다. 그런 아슬아슬함 속에 국가에 대한 충성과 배신 등의 고민이 섞여 있고, 신출귀몰한 정보원들의 활약이 대담하게 그려진다.

 

이 책은 시나리오 이므로 모든 내용은 지문과 간단한 그림, 대사들로만 구성 된다. 참 신기한 것이 대사만으로 인물의 성격과 분위기를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름대로 머릿속으로 각 배역에 맞는 인물들을 캐스팅하고 지문과 간단한 그림을 참고하여 한편의 영화를 완성하는 재미가 참으로 쏠쏠하다. 배우들은 이 시나리오를 가지고 자신이 하나의 인생, 인물을 창조하는 것이고 모든 스태프들 또한 자기만의 상상력과 분석력으로 한편의 영화를 만들어 가는 것이 참으로 대단하게 다가온다.

 

 

이 책은 좋다 안 좋다, 재미있다 아니다, 영화화 되었을 때 상품성이 있겠다 혹은 관객이 많이 들겠다 이런 생각보다는 나에게는 시나리오라는 것을 처음 볼 수 있었다는 것에 더 큰 의미가 있다. 물론 재미도 있다. 첩보물이라 화끈하고 긴장감도 있으며, 긴장감을 풀어주는 유쾌하고 코믹한 부분이나 달달한 애정 씬도 있다. 남북 이야기를 다룬 영화나 소설들이 대게 그렇듯이 민족주의에 기댄다는 비판에서 비껴갈 수는 없겠지만, 어쩔 수 없이 우리 유전자에 새겨진 이산가족의 슬픔, 한 민족이라는 동질성 혹은 언젠가는 통일이 되어야 한다는 당위성을 가졌기에 이 시나리오는 참으로 여러 가지 생각이 들게 했다. 또한 식량문제에 대해 경각심을 일깨워 준다는 부분이 참으로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남북이 합작해 만들고 비무장 지대에서 키우게 된 옥수수 종자 <275> 그리고 남북한의 남녀의 사랑으로 극적으로 태어난 <이철호>, 그리고 그들의 체제를 뛰어넘은 진한 우정. 우리에게 이런 따뜻하고 행복한 날들이 다가올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찹찹함도 숨길 수 없었던 한편의 시나리오. 영화화도 되었으면 좋겠지만 실제로 현실에서 이런 일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간절함을 가져본다. 더 나아가 서로 대척하는 이런 일이 끝났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통일의 이유가 '개발'과 '대박' 등의 자본의 논리가 아닌 당위성, 해원, 용서와 미래를 향한 것이기를 바라는 것은 순진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지방 선거를 앞두고 이 책은 과연 어떤 평을 얻을까? 북풍이 거세지는 2014년 4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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