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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춘단 대학 탐방기
박지리 지음 / 사계절 / 2014년 2월
평점 :
《양춘단 대학 탐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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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수한 사투리, 평생 제대로 거울 한번 보지 못한, 딸이라고 돈 없다고, 부모님 대신 동생들 돌보느라 못 배운 게 한인, 우리들의 엄마. 양춘단. 그녀는 실제 인물이다. 분명 어디선가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양춘단 여사와 똑 같은 이유로 못 배운 게 한이 되어버린 우리 엄마를 떠올렸다. 그리고 참으로 신기하게도 일요일 늦은 밤 TV에서 그런 어르신들이 그 한을 풀러가는 성인 중, 고등학교 다큐멘터리를 방송해주는 것을 보고 있자니 눈물이 줄줄 흘러내린다.
그녀는 일제 강점기 말기 남도의 작은 섬에서 석공의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낮잠을 자다가 큰 망치로 돌을 깨부수는 태몽을 꾸어 자신의 대를 이어 석공의 길을 갈 아들로 철썩 같이 믿었건만 아무것도 달지 않고 태어나 제때 출생신고도 하지 않았던 딸이었다. 해방이 되고 나서 뭍으로 이사를 나와 육지에서 살게 되고 곧 전쟁을 지났다. 그녀는 학교에 갔지만 그 시대 딸들이 누구나 그랬듯이 부모님을 대신해 동생들을 돌보느라 학교는 그만 두어야 했다. 그리고 시골 남자에게 시집을 가 평생 농사를 짓는다. 그렇게 착실히 자식을 낳고 마을에서도 신망을 얻으며 착실하게 자신의 삶을 디디고 걸어왔다.
그러나 어느 날 남편이 암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 치료를 위해 서울 둘째 아들내로 이사를 와 수술을 하고 치료에 매달린다. 함께 병원에 다니던 병자의 가족을 알게 되면서 그 사람의 소개로 대학 청소용역 회사에 취직을 하여 청소부로 대학에 다니게 된다. 그녀는 비록 청소를 하러 가는 것이지만, 대학에 다니는 것이 그렇게 좋을 수 없다. 춘단의 65년 인생은 대학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바라고 바라던 대학에 다니게 된 것이다.
소설은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이런 '양춘단' 여사의 삶을 담백하게 보여준다. 내가 보기엔 정말로 우울하고 슬픈 인생이지만 그녀는 누구보다 담담하게 삶을 받아들이며 누구보다 착실하게 그 길을 걸어왔다. 먼저 생을 마감한 어메, 아베, 큰아들을 환영으로 보기도 하고 그들에게 전하는 듯한 독백으로 그녀의 삶을 짐작하게 한다. 일제 강점기 말부터 전쟁을 거치고, 군부독재의 서슬 퍼런 시대도 지나, 눈부신 경제 발전 뒤편 어두운 이면의 비극들을 온몸으로 체험하며 한 시대를 걸어온 것이다. 그렇게 지나온 그녀는 할머니가 되어서야 청소부의 자격으로 결국 대학에 가고, 비정규직 노동자의 설움을 또 온몸으로 견뎌내고 있다. 그녀에겐 '이상'의 장소였을 대학 또한 거친 세상과 다르지 않다. 그 곳 또한 끔찍한 현실을 도피하기 위해 돈을 갖다 바치는, 오히려 멀쩡한 사람까지 슬픈 사람들로 만들어내는 거대한 예수 석상아래 세워진 교회와 다를 바가 없다. 그 대학의 상징물인 거대한 코끼리 또한 슬픈 눈을 하고 있는 아버지가 조각한 예수상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녀의 삶, 그녀가 보내는 하루하루를 따라가다 보면 슬픈 우리의 현실을 거짓 없이 만나게 된다. 젊은이와 늙은이는 서로 다른 이념으로 싸우고 있고, 돈이 있어야만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있으며, 대학에 들어가야만 인간 취급을 받을 수 있고, 악착같이 살려는 사람들, 또 그래야 한다는 환상들이 삶의 집착들만 만들어 내고 있다. 그래도 양춘단 여사의 삶은 계속되고 이 세상, 이 시대 수많은 '양춘단' 여사들이 그나마 그 어둠을 상쇄하고 있지나 않은지.
입에 착착 감기는 문장, 구수한 사투리, 사랑할 수밖에 없는 양춘단 여사와 미워할 수없는 등장인물들. 작가는 마지막에 이 모든 사람들이 실제 인물이라고 했다. 확실하다고 분명 어디에서 본 적이 있을 것이라고. 나도 우리 가족도, 그들 3대가 살아왔던 세상에 함께 살고 있다. 양춘단 여사의 삶처럼 우리 엄마, 아부지도 그렇게 지나왔고, 지금 우리도 양춘단 여사의 가족들처럼 삐걱거리며 살고 있다. 어쩌면 슬프고 우울할 지도 모르는 소재를 작가는 참으로 경쾌하고 즐겁고, 따뜻하고 재미있게 그려냈다. 책장을 펼치고 다른 일 때문에 잠시 덮어 두었던 시간이 그렇게 아까울 수가 없었다. 글이 참 맛나다. 참 맛있는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