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A케어
구사카베 요 지음, 현정수 옮김 / 민음사 / 2013년 12월
평점 :
절판
A케어
우리에게 닥칠 수도 있는 미래이기에 더욱 섬뜩한 소설

이 소설을 읽기 전까지《폐용신》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이 소설에서 《폐용신》이란 말 그대로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진 신체란 말이다. 덧붙이자면 의료현장에서 사용되는 의학용어로 뇌경색 등의 이유로 마비되어 회복의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 팔다리를 가리키는 말이다. 자, 이 말은 원래 "폐용"에서 나온 말인데 이는 설비나 기계가 사용할 수는 있으나 경제적으로 사용 가치가 없어지는 일, 쓸모가 없어진다는 말이다. 실제로 우리나라의 의료현장에서도 쓰이는 말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뜻이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마치 인간을 기계처럼, 사용가능한지 아닌지를 경제적인 가치로만 보는 관점이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이런 말이 그리 생경하게 여겨지지 않는 것은 이 사회가 이미 '물질', '돈', '효용' 등의 개념으로 모든 것을 바라보는 분위기기 되어 가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자, 상상해 보자. 어느 날 나는 뇌경색 때문에 팔, 다리에 마비가 왔다. 그런데 이 팔 다리가 생활하는데 '불편'을 준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간호' 하는데 '불편'을 준다. 간호의 주체는 내가 아닌 가족이나, 물리치료사, 간호사, 의사, 활동 보조사 등이다. 마비되었지만 평소에는 멀쩡하다가 옷을 입으려는 순간 경련을 일으키거나, 혈액순환이 되지 않아 늘 차갑고 시리다. 잘 움직이지 못해 체중이 불어나고, 먹고, 싸고, 씻고, 움직이는 모든 것에 다른 이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나는 엉덩이에 욕창이 생기기도 하고 나를 돌봐주는 가족, 간호사, 물리치료사 등에게까지 불편을 끼친다.
처음에 열심히 간호하던 가족들도 하나 둘 지치고, 나를 방치해 두는 '학대'를 하기 시작한다. 기저귀를 제때 갈아주지 않고, 씻기지도, 똥을 많이 싸니 잘 먹여주지도 않는다. 나는 차가운 방바닥에 늘 천정만 보고 누워 있다가 욕창이 생긴다. 나는 우울증이 생기고 죽고만 싶다. 다행이 간호보험이 시작되어 요양소에 가서 도움을 받지만, 요양소는 인력이 부족해 늘 업무과다에 시달리고 있어 그들조차도 요통과 과로, 스트레스에 시달리니 나는 늘 죄인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고, 차라리 못 쓰는 팔 다리를 잘라내고 싶다.
이 소설 속에 《폐용신》 을 잘라내는 시술 《A케어》를 개발한 노인 데이케어 시설의 원장 우루시하라. 이 소설은 그의 유고로 시작이 되는데, 그가 어떻게 이 시술을 시행하게 되었는지, 시술 후 노인들의 삶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왜 이런 시술이 필요한지 그 당위성을 설파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이 소설을 이끌어가는 화자는 그의 논문을 출판하기로 한 출판사의 편집부장인데, 이 논문이 미처 책으로 발표되기 전 그의 시술은 한 언론사의 특집 취재로 말미암아 사회에 알려지게 되고, 모든 이슈들이 그렇듯 그가 원장으로 있는 시설과 그의 충격적인 시술은 세인들의 입방아에 오르며 그를 끔찍한 악마로 몰아간다.
우루시하라의 유고를 따라가면 그가 이런 시술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 이런 시술을 시행할 때까지의 고민, 그 결과들이 별 무리 없이 이어지는데, 이를 바라보는 세인들의 눈에 그는 사지가 마비된 노인들을 괴롭히는 싸이코페스일 뿐이다.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팔 다리를 자르고, 한 우리에 몰아넣고 다른 사람의 노리갯감정도로 만드는. 똑 같은 일이지만 보는 시각에 따라 천차만별로 달라질 수 있는 문제이기에 일본 사회는 《폐용신》문제로 들끓게 되고 연일 방송되는 소문과 조작, 의도적인 발췌보도로 문제는 더욱 부풀려진다.
이 소설은 마비되어 다시 소생할 가능성이 없는 사지를 절단하는《A케어》라는 새로운 시술법이 나오게 된 의료계의 모순과 부조리한 배경, 이 시술을 개발한 의사의 진짜 의도 즉, 진짜 환자를 위하는 의사인지 가학적 성향이 있는 사람인지를 궁금하게 만드는 설정, 이를 보도하는 언론의 행태와 이를 통해 여론이 만들어지고 부풀어지고 왜곡되는 과정을 번갈아 보여주며 독자와 아슬아슬한 줄다리기를 한다.
일본에서 벌어지는 <노인 의료와 간호 문제>를 다루고 있는 이 소설의 의료적 배경은 이렇다. 1970년대부터 급증한 노인 병원은 침대 속박, 주사 남용, 검사 남용의 삼종세트로 폭리를 취해왔기에 이를 개선하기위해 '노인 보건법'을 제정했지만 그 결과는 극단적 치료에서 방치치료로의 변모뿐이었다고 한다. 늘어나는 노인 의료 경비를 관리하기 위해 간호보험 제도를 만들었지만 점점 늘어나는 수요를 감당 할 수 없으며, 재정적인 면만 중시하고 실질적인 간호에는 관심이 없어, 결국 고령자로부터 보험료와 자기 부담금의 이중 수취를 제도화 했을 뿐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초고령 사회는 노노 간호, 노인 학대, 노인의 고독사, 마비장애, 노인성 치매 등 파멸의 징후를 감추지 않고 있다는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 소설에서 보여주는 일본 사회의 단면은 미래의 우리의 모습이 아니라고 자신 있게 말 할 수 없다. 출산율은 점점 낮아지는데 늘어나는 인간의 수명은 젊은 층의 의료비 부담을 가중시킨다. 이것은 이 소설의 배경인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다. 젊은 층이 벌어서 고령층을 부양하는 지금의 의료 시스템이라면 얼마 지나지 않아 문제가 생길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하고 있다. 거기다 의료를 민영화하려는 움직임을 과연 어떻게 봐야할까. 인간을 기계적인 효용의 가치로 바라보는 사회가 "초 고령 사회" 를 맞이하는 모습은 《A케어》와 다를 수 있을까? 과연 감당할 수 없는 위기에서 노인을 사회의 《폐용신》이라고 여기는 사회가 오지 말하는 법이 있을까 하는 무서운 생각까지 들었다.
이미 우리 사회도 고령화 사회에 접어들었다. 고령층을 책임지기는커녕 젊은 층은 자기 자신의 삶조차도 살아내기에 힘든 시기를 지나고 있다. 연애, 결혼, 출산을 모두 포기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우리에게 닥친 고령화 사회의 문제는 비단 의료문제에만 국한 되지는 않을 것이다. 자식들을 위해 노후를 포기한 우리 부모님 세대부터 그 균열은 이미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이것이 바로 이 소설을 그저 소설적 재미만으로 읽을 수 없는 이유이다. 일독을 권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