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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집행인의 딸 ㅣ 사형집행인의 딸 시리즈 1
올리퍼 푀치 지음, 김승욱 옮김 / 문예출판사 / 2013년 12월
평점 :
절판
사형집행인의 딸

영화나 소설을 보면서 사형집행인에 대해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저 야수 같은 모습을 하고 사형수의 목을 자르거나 고문을 하며 즐기는 모습이 다였다. 그러나 이 소설 속 대대로 사형집행인을 하고 있는 집안인 퀴슬가의 사람들은 그런 선입견과 편견을 사뿐히 뛰어넘는다. 의학과 약품에 대해 누구보다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으며, 사형수의 고통을 경감하기위해 몰래 약을 주거나, 사형집행 전날에는 남들 모르게 술을 퍼 마시며 자신의 운명을 저주하는 누구보다도 인간적이며 앞서갔던 지식인이다.
제목은 사형집행인의 딸이지만 진짜 소설을 이끌어가는 주인공은 사형집행인인 야콥 퀴슬과 젊고 서툰 의사 지몬 프론비저 이다. 그리고 그 사이에 사건 해결에 큰 역할을 하는 딸 막달레나 퀴슬이 있다. 야콥과 지몬은 사형집행인과 의사로써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대척점에 있는 사람들이지만, 둘 사이의 관계는 때로는 스승과 제자이기도 하고, 함께 살인사건을 해결해 가는 파트너이기도 하다. 드라마 허준이나 영화 투캅스의 두 주인공이 떠오르게 만들기도 하는 진지하면서도 다소 코믹한 요소를 두루 갖춘 아주 매력적인 주인공들이다. 지금의 시각으로 본다면 지식이 많고 스승 역할을 해야 하는 이는 의사인 지몬이겠지만 이때의 의사는 이발사가 하는 역할로, 기껏해야 상처에 끓는 기름을 붓거나 지혈하는 정도일 뿐으로 존경을 받지도 못할뿐더러, 안정적인 직업도 아니었다. 그리하여 지몬은 야콥의 해박한 지식과 그가 가진 책과 자료들을 보기위해 늘 그의 집을 들락거린다.
이 소설의 시대적 배경은 중세 독일이다. 종교전쟁이 막 끝난 시점이며 마녀사냥의 끔찍한 악몽이 살아있는 어두운 시기다. 이 시대의 시민권은 '성인 남성'만이 가질 수 있었으며 이마져도 이미 권리를 가지고 있는 위원회의 허가가 필요했다. 법이 있었지만 그 법은 모든 이들에게 공평하게 해당되는 것이 아니었고, 위원회의 자의적 결정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었다.
이 시대 여성들은 알아서도 보아서도 안 되었고 어떤 권리도 가질 수 없었으며 남성의 소유물이어야 했다. 그 시대 마녀로 몰린 여자들은 대부분 '지식'을 가진 여자들이었는데, 대부분이 산파였다. 그녀들은 물과 약초, 사람의 신체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하나님이 선물하신 자궁의 혹을 없애는 방법도 알고 있었으며, 여성 특유의 지혜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 권력을 가진 '남성'들에게는 늘 눈엣가시였을 것이고 늘 경계의 대상이었다. 중세의 마녀사냥은 그녀들이 마녀였기 때문이 아니라, 남성의 권력, 남성의 세계를 뒤 흔들 힘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지혜와 지식' 은 오로지 일부의 선택받은 남성들만이 누리야 하는 것이었기에 그녀들이 가진 '지식'은 그 무엇보다도 위험한 것이었다. 그런 이유로 많은 여인들은 불에 타 죽었고, 서로가 서로를 고발하는 가운데 그들이 보기에 마녀로 몰리지 않아야 할 여자들도 그 광기의 불에 휩쓸려 타 죽었다.

이 소설의 지역적 배경이 되는 곳은 '숀가우'로 앞서 말한 종교전쟁과 마녀사냥의 끔찍한 기억이 지워지지 않는 곳이다. 오랜 전쟁 탓에 고아가 많고, 아우크스 부르크와 운송이권 때문에 마찰이 끊이지 않는 곳이었다. 이런 곳에 한 고아의 시체가 발견된다. 가슴에 많은 칼자국이 나있고 등에 ♀ 표시가 새겨진 체로. 사람들은 마녀가 한 짓이라며 산파인 '마르타 슈테흘린'을 마녀로 지목하며 불태워 죽여야 한다며 그녀를 잡으러 간다. 일순간에 도시는 또다시 마녀사냥의 광기로 뒤 덥힐 기세다. ♀ 기호는 비너스를 뜻하는 기호로써 사랑과 봄, 성장을 뜻하며 전쟁의 신 마르스의 것과 상응하는 상징으로 그 시대엔 마녀를 뜻하는 것이었다. 위기의 상황에서 야콥은 슈테흘린을 구해 감옥에 잡아두었지만, 그 도시를 실질적으로 통치하고 있는 법원 서기 '요한 레흐너'는 야콥으로 하여금 그녀의 자백을 받아내도록 지시한다. 그와 시의회는 진짜 범인을 밝히고 잡는 것이 아니라 사건을 무마하는 것이 중요했던 것이다.
그 시대의 법은 자백을 하지 않으면 사형집행을 할 수 없으므로 고문을 통해 자백을 받아내야만 했다. 퀴슬은 슈테흘린이 범인이 아니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결백을 증명하고, 진범을 잡아야 했다. 지몬 또한 여러 의혹과 증거들을 통해 그녀가 범인이 아님을 알았기에 그녀의 사형집행을 미루고 진범을 잡기위해 야콥과 함께 노력한다.
그러나 슈테흘린이 감옥에 잡혀있는 도중에도 등에 ♀ 표시가 새겨진 아이의 시체가 발견되고 공사 중이던 나병환자 보호시설과 운송할 물건을 보관하던 창고에 불이 나고, 다른 고아가 납치되는 등 의문의 사건은 계속해서 일어난다. 레흐너와 시의원들은 도시에 광기가 퍼지기 전에 빨리 슈테흘린을 처형하라는 압력을 가한다. 이제 남은 기한은 얼마 없다. 주인공인 야콥, 막달레나, 지몬은 범인이 남긴 증거들을 따라 점점 진실에 다가가지만 이를 저지하려는 범인들의 교묘한 술수도 계속된다.
거의 600쪽에 가까운 분량이지만 소설은 정말 술술 읽힌다. 사형집행인, 마녀사냥, 연쇄 살인, 어두운 시대적 배경과 위정자들의 더러운 모습은 자연스럽게 현실의 모습과 이어지며 주제의식을 보여주고, 이에 대비되는 주인공들의 정의로운 모습은 소설에 생기를 불어넣고 독자의 감정이입을 강렬하게 이끈다. 사건 해결 중 그들이 보이는 엉뚱한 모습과 지몬과 막달레나의 달달한 사랑이야기는 자칫 무겁고 우울하게만 흘러갈 수 있는 소설의 분위기를 조금은 편하게 만들어 준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은 가히 클라이맥스이다. 범인과 주인공들의 지하 터널의 대치부분은 마치 스케일 큰 영화를 보는 듯 생생하고, 긴장감 있고 긴박한 상황의 묘사는 정말 이 소설의 백미이다. 범인에게 잡혀간 막달레나의 탈출 부분도 정말이지 손에 땀을 쥐게 하였다. 흥미 있는 소재, 매력적인 주인공, 선과 악의 대결, 대중의 무지와 광기, 코믹적인 요소 어느 것 하나 버릴 것 없는 대단한 소설이다. 정말 진부한 표현이지만 '한번 손에 들면 절대 놓을 수 없는' 소설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