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자들 -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작가의 열두 빛깔 소설들
엘리자베스 길버트 지음, 박연진 옮김 / 솟을북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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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자들

 

 

 

 

 

이 소설의 제목은 왜 '순례자' 일까? 하는 궁금증을 이 책을 읽는 내내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나는 그렇다. 소설에는 기, 승, 전, 결이 확실한 것을 원하고, 이야기의 전개는 좀 빠른 것이 좋다. 내가 처음 일본 소설을 접했을 때 도저히 좋아할 수 없었던 이유도 바로 숨 막히도록 느린 전개와 장황하리만큼 긴 심리묘사 때문이었으니까.

 

 

 

이 소설의 첫 장을 펼치면서도 그런 느낌이 들었다. 어떤 특별한 주제나 사건이 없이, 있는 그대로의 일상을 묘사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저 정말로 '있는 그대로의 일상' 이었다. 내가 아침에 출근해 고양이들 똥을 치우고, 청소기를 돌리고, 노트북을 켜고, 메일을 확인하고, 카페에 들어가 새로운 책이 뭐 올라왔나 확인하고, 페이스북을 보고, 틈틈이 웹툰을 보고, 잠깐 졸고, 뭘 먹을까 고민하는 그 하루의 일과를 그대로 그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처음에 나는 지루했다. 그러나 다소 충격적인 것은 그 지루한 일상, 그 지루한 대화 속에도 주인공들은 자신들만의 비밀을 하나씩 갖고 있다. 1편 순례자들의 주인공은 폭력적인 자신의 아버지를 우연히 죽이고 도망치는 여정에 있는 것이고, 남자는 그녀와 함께 말을 타고 도망가자고 한다. 이런 이야기는 내게 익숙한 소설의 기법을 빌자면, 이런 지루한 일상속의 대화 속에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조금 더 긴박하고, 조금 더 자극적이며, 조금은 더 충격적인 것이라야 했다.

 

 

 

제대로 이해를 못한 '엘크의 말' 편과 한심한 형제들을 떠나 길을 떠나는 '동쪽으로 가는 앨리스' 편에 이어 소설은 잔잔한 사랑이야기들이 펼쳐진다. 뭔가 평범한 일상 속에 그들만의 열정과 강렬한 색채를 숨기고 있는 듯이.

 

 

 

'새 사격' 속의 남자와 친구의 아들의 관계는 어떨까? 아마도 친구는 나쁜 일을 당한 게 틀림없다. 그는 친구의 아들을 데리고 친구와 함께 하던 비둘기 사격을 억지로 하러 간다. 아이에게 잔인한 일을 시키는 남자는 아마도 과거에 그 친구의 아내와 삼각관계에 있었지 않았던가 하는 뉘앙스를 풍긴다.

 

 

 

'톨 폭스' 편에서는 더 아리송하다. 남편과 불화를 겪고 있는 여자는 작은 술집을 하고 있는데 맞은편에 남편의 가게가 있다. 어느 날 남편의 가게가 문을 닫고 스트립걸이 춤을 추는 바가 생긴다. 스트립 걸의 이야기가 잠시 나오다 자신의 가게에서 일하고 있는 조카와 사랑하는 사이라는 비밀이 드러난다. 아니 그 둘은 사랑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아니! 이런 충격적인 스캔들이 이렇게 잔잔해도 되는 거냐고! -

 

 

 

'착륙'에서는 젊은 한 남녀를 만난다. 깍쟁이 여자가 결국 이 수염 까칠한 남자에게 착륙 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잘됐다는 생각이 들면서, 이어 '와서 이 멍청한 녀석들 좀 데려가게' 속의 멍청한 녀석들을 지나, '데니브라운이 몰랐던 많은 것들' 편에서는 다소 엉뚱하고 유머러스한 필체로 데니의 사랑과 우정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의 아버지는 훌륭한 간호사이며, 자신을 제일 많이 괴롭혔던 녀석이 그와 가장 친한 친구가 되며, 그 녀석의 누나와 사랑에 빠지는데 데니는 그 모든 것을 모른다. -이 편이 가장 재미있었다.-

 

 

 

'명성 자자한 자르고 붙여 불붙이기' 담배마술에서 엉뚱하고, 집요하고 우스꽝스러운 아빠를 만나고 끝으로 자신이 일생동안 사귄 남자들을 한꺼번에 다 싣고 가는 환상적인 이야기 '더 없이 참한 아내' 편을 끝으로 나도 드디어 소설 '순례'를 마친다.

 

 

 

읽는 내내 이 소설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까, 왜 이 소설의 제목은 '순례자' 일까 끝없이 나 자신에게 물었다. 그러다 솔직히 어느 순간 이 소설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아마 '톨 폭스' 편에서부터 인 것 같다. 이 글을 쓰는 지금은 이 소설을 읽는 시간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너무나 자극적인 것에 길들여 진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고 '처음에는 지루했지만 그리 나쁘진 않았어'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이 소설들이 풍기는 뉘앙스와도 묘하게 닮았다.

 

 

 

이 소설 제목이 순례자인 이유를 '우리 인생도 삶의 목적이라는 길고 신비로운 무엇인가를 찾아 여행을 떠나는 것' 이라는 그런 심각한 말을 하고 싶진 않다. 그저 우리는 태어나 자신만의 삶을 살아가고, 그 길이 때로는 극적이기도 하지만 늘 펼쳐지는 일상은 비슷할 것이다. 나의 인생이라고 별반 다른 것이 있을까? 때로 내겐 반짝이는 그 어떤 순간도 바라보는 이에겐 따분한 오후의 햇빛 같은 것일 수도 있으니까.

 

 

 

나는 그저 많은 사람들의 일상을 훔쳐보았다. 누군가는 어디엔가 있을 법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썼고 나는 그저 그 이야기의 일부를 아주 '잠깐' 보았을 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이 소설을 떠나 그들의 여정은 계속 될 것 같고, 나도 이 심심한 인생을 계속 살아가겠지. 어느 순간이 반짝였는지 그것은 이 길의 끝에서만 알 수 있을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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