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낚싯대를 메고 산으로 간 거스 오비스턴은 왜?
데이비드 제임스 덩컨 지음, 김선형 옮김 / 윌북 / 2013년 8월
평점 :
절판
낚싯대를 메고 산으로 간 거스 오비스턴은 왜?

어렸을 때 '흐르는 강물처럼' 이란 영화를 본 적이 있다. 거대한 숲으로 둘러싸인 넓은 강에서 긴 낚싯줄을 휘두르며 물고기를 잡던 그 장면은 영화의 내용과는 상관없이 내 뇌리 속에 깊이 박혀있다. 햇빛이 반짝이는 넓은 강, 그 한가운데로 들어간 사람, 그리고 그이가 낚아 올린 커다란 물고기. 그 거대한 자연과 그에 동화된 사람, 그 장면들은 정말 숨 막히도록 아름다웠던 것 같다.
우리 외삼촌은 낚시 광이었는데 한 달에 거의 2주 넘게 집에 들어오지 않는 적도 많았다. 그러나 외삼촌이 하던 낚시와 이 소설에 나오는 낚시는 형태가 많이 다른 것 같다. 외삼촌은 떡밥이나 지렁이를 한 낚싯대에 주렁주렁 달려있는 바늘에 꿰고 한자리에 앉아 여러 개의 낚싯대를 드리웠는데, 이 책에서 묘사된 낚시는 미끼를 쓰지 않고, 직접 만든 플라이라고 하는 깃털이 달린 가짜 미끼를 이용하며, 낚시꾼이 강 중앙으로 걸어 들어가서, 긴 줄을 휘둘러 던져 물고기를 잡는 방법이다. 이러나, 저러나 우리 형제들은 낚시보다 외삼촌이 잡은 물고기로 그 자리에서 바로 끓여주는 매운탕이 더 좋았던 것 같고.
동양에서도, 특히 내가 좋아하는 이외수 작가도, 서양에서도 낚시는 어떤 깨달음의 길로 인도하는 방법인 걸까. 때로는 미끼 없이 줄만 드리우기도 하고, 자신이 던진 미끼를 문 물고기와 어떤 교감까지 하는 것을 보면 낚시는 양식을 얻기 위한 사냥 이상의 그 무엇인가 의식적인 어떤 면이 있는 것 같다는 말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거스도 그런 경험을 한 사람이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큰 어려움 없이 낚시를 시작하고 또 남들은 한번 잡기 어렵다는 큰 물고기들을 쉽게도 잡을뿐더러 리스트를 작성할 정도의 천재이다. 아마도 낚시에 전문가들인 부모님의 영향을 받은 것일 테지만 말이다.
그는 플라이 낚시를 다소 상업적으로 하는 아버지와 떡밥을 써서 낚시를 하는 어머니의 불 장난 같은 사랑으로 태어났다. 이 소설에서 어머니와 아버지는 참으로 괴짜 같은 캐릭터들이다. 낚시의 스타일이 다르듯 삶의 철학도 추구하는 것도 공통점이 없는 사람들이며, 늘 티격태격 싸우고 아웅다웅 살아간다. 그 속에 첫째아이인 거스는 낚시에 천재이지만 우울한 청년으로 자라나고 그 동생 빌 밥은 어떤 신비로운 면을 가진 캐릭터로 그려진다.
거스가 19살 정도 되던 해에 역시 늘 우울하던 그는 가족들이 함께 식사하던 자리에서 그동안 하고 싶었던 막말을 마구 내뱉으며 소리를 치고-이 장면은 정말 시원하면서도 웃겼다- 집을 떠나 삼나무 숲의 통나무집으로 이사를 간다. 그리고 거기서 매일매일 하루 종일 낚시만 하고 산다. 낚싯대를 만들고, 플라이를 만들고 줄을 묶으면서 그의 유일한 친구인 낚싯대 '로드니'와 함께. 그는 고독이 만병통치약이라 믿는다. 자신에게 남은 부모님의 언쟁들, 자신이 낭비한 시간 등을 고쳐줄 것이며 독립하게 되면 자신이 원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고독은 아무것도 보장해 주지 않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하여 그가 주위에 사람들을 찾아 나서고, 이웃이 생기고, 강에서 죽은 사람을 건져내고 그 일련의 행위를 계기로 철학자 타이터스와 그의 개 데카르트와 만나게 되면서 인생의 전환기가 찾아온다. 늘 어둡고, 우울하고 무료하고 늘 중독 적으로 하는 낚시의 의미를 찾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결국 타이터스와 대화하고 그가 주는 많은 책들을 읽으며 천천히 삶의 의미에 접근하게 되는 것이었다.
그 많은 과정들, 낚시를 하는 모습, 그가 만난 사람, 그의 사유의 변화, '영혼' 의 메시지를 들으러 강을 거슬러 올라가서 산 속에서 밤을 지새우는 그 모든 장면들은 아름다운 언어로 표현되어 있으며, 마치 한편의 영화를 보는 듯, 혹은 함께 그 속에 있는 듯 한 느낌이 들만큼 시각, 촉각, 후각, 청각까지 자극하는 문장들로 표현되어 있다.
가장 충격적이며 아름답기까지 한 부분들이 참으로 여러 번 있었는데, 자신의 일을 배우러 온 닉의 손에 패인 이야기를 듣는 장면, 그가 운명의 여인 에디를 만나는 장면, 헤어졌다가 다시 재회하며 둘이 같은 감정을 느꼈음을 교감하는 장면, 에디가 거스와 함께 있다가 잠시 자신의 집에 다니러 간 단 하루 동안 자신의 낚시 바늘을 삼킨 연어와 함께 강을 거슬러 오르며 교감하는 장면이 참으로 인상 깊었다.
그중 눈물을 흘릴 만큼 감동적이면서도 슬펐던 장면은 어머니의 영향으로 알게 된, 인디언 토머스가 낚시하는 장면을 회상하는 부분이었다. "치누크 한 마리를 잡을 때 마다 잡은 물고기를 하늘로 높이 치켜들었다가 놓은 후, 그 앞에 무릎을 꿇고 허리를 굽히곤 하며" 낚시하는 토마스와는 대조적으로, 옆에선 젊은 청년들이 작살로 물고기를 잡으면서 물고기들에게 온갖 욕을 하고 잡지도 않을 거면서 물고기들을 마구 죽이고 상처를 내고 있다. 게다가 그곳은 백인들이 댐을 만들어 회류성 어류들이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정신을 놓은 채로 거친 물살에 대항하며 죽어가고 있는 곳이다.
작가는 이 둘의 장면을 대비시키며 우리 인간들에게 생명과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보여주며 질문을 던진다. 과연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무엇인지. 그리고 거스 또한 자신이 물고기를 잡아 죽이는 그 "낚시" 라는 행위가 과연 어떠한 의미가 있는지 고민하게 된다. 그리고 생명과 자연 그리고 인간의 관계에 대해 깊은 사유를 하게 된다. 그러면서 그는 강과 물고기를 더 깊이 사랑하게 된다.
다시 돌아가 이 소설의 하이라이트는 에디가 자신의 집에 다니러 간 단 하루 동안 거스가 연어와 함께 강을 거슬러 오르는 장면이다. 거스는 어느새 자신의 바늘을 삼킨 연어와 줄을 통해 교감하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연어를 떠나 물, 다른 물고기, 숲에서 나온 동물들과도 인간 대 동물이 아닌 각자의 존재자체로 교감함을 느낀다. 에디와의 사랑, 그리고 깊은 사유, 자연과의 교감이 결국 그를 구원하게 되는 것이다.
그 장면은 이렇게 묘사된다. "낚시 바늘에 꿰인 것처럼 가슴에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졌다...나의 통증은 강해졌다. 나는 기쁨에 미칠 것 같은 기분으로 하얀 길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머리를 비추는 햇빛 같은 손길을 느꼈다. 그 빛이 영역이 아닌 한 존재에서 이어진다는 사실을 그 빛과 낚싯바늘은 그분의 것이며, 사랑만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알게 되었다...나는 울기 시작했다. 태고의 존재가 나를 당기고 있다는 것, 이 가을의 풍경으로부터 영원한 기쁨을 향해 나를 불러내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이 긴 이야기는 해피엔딩으로 "빛의 낚싯줄과 사랑의 손길" 을 얘기하기 위한 600쪽이 넘는 거대한 서사시가 결국 그렇게 아름답고 훈훈하게 막을 내린다.

이 소설속의 주인공은 19살 때 홀로 독립을 하고 고독하게 살아가려 마음을 먹고 20살에 거대한 사랑의 존재를 느끼며, 진정한 짝을 찾고 드디어 격정 같은 청소년기를 지나 진정한 성인이 된다. 낚시를 통한 깨달음, 거대한 자연과 초월의 존재와의 교감, 진정한 사랑을 느끼는 과정은 아주 유쾌하고 유머러스하게 때로는 진지하게 그려진다.
아름다운 풍광, 아름다운 사람들, 극심한 고독과 깊은 철학적 사유를 이 짧은 글에 다 표현할 수는 없다. 우리는 누구나 격심한 방황과 고독, 질풍노도와도 같은 시기를 지나 진정한 성인이 된다. 인디언들이 자기 부족을 떠나 숲으로 들어가 '영혼' 에게 자신의 소명을 듣는 것으로 성인식을 치르듯 우리도 자신들만의 성인식을 치른다. 나 또한 내 인생의 소명을 듣기위해 아주 오랜 시간 나 자신과 싸우고 부모님과 대립하고 나 혼자만의 세계에서 고독한 청소년기를 보냈다.
이 소설은 한 사람의 성장기이기도 하고, 인간과 자연의 대립과 화해의 대 서사시이기도 하며, 영성과 가족애, 종을 넘어선 우정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누가, 어떠한 시각으로 읽는가에 따라 아주 다른 이야기와 교훈,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소설이다. 나는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온 몸에 전율을 느끼기도 하며 이 소설을 읽었다. 책장을 펼치면 눈앞에 거대한 삼나무 숲과 넓은 강이 나타나는 듯 했고 각종 물고기들과 짐승들과 이야기를 하는 듯도 했으며, 인디언의 일원이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아름답고 또 아름다웠다. 참으로 아름답고도 유쾌한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