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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용화
허수정 지음 / 고즈넉 / 2012년 11월
평점 :
부용화
이 책의 소개 글 대로 막연히 ‘사랑’을 떠올린다면 분명 남녀간의 사랑 그 하나가 떠오를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을 다 읽은 후 다시 사랑을 생각한다면 그저 사랑, 사랑이라는 순수한 의미의 사랑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부모자식, 그 옛날 주인과 아랫사람, 부처와 중생, 나라와 백성 그 모든 것을 포함한 사랑 말이다.
이 소설은 ‘대장경의 마구리 글자, 즉 대장경 끄트머리에 적힌 글자들이 무엇인지 여전히 밝혀지지 않은 채 역사학자들이 풀어야 할 숙제’ 라는 것을 소재로, 문제의 글자들을 이름으로 본 작가가 상상력으로 만들어낸 서사, 역사 팩션이다. 예전 ‘대장경’ 이라는 소설을 읽은 적이 있는데, 왜 팔만 대장경이 만들어 지게 되었는지, 그 대장경의 대 역사를 만들어간 민초들의 대장정에 대한 이야기를 읽고 한동안 가슴이 벅차 올랐던 기억이 겹친다.
대장경 판은 그냥 나무를 깎아서 만드는 간단한 작업이 아니었다. 전국의 목수, 서예가, 불교인들이 모여 일으킨 대 역사였다. 일단 목수들이 지리산에서 적당한 나무를 베고, 바닷길로 띄워 운반, 바닷물에 담그기만 3년, 자르고 찌고, 다시 말리고, 대패질을 하고, 옻칠을 하고 뒤틀림을 막기 위해 각목을 대고 구리로 네 모서리를 감싸면 겨우 판이 완성이 된다.
거기에 전국에서 모인 서예가들은 각기 다른 글자체를 똑같이 맞추기 위해 몇 년을 글자체 쓰는 연습을 한다. 그리고 그들이 마치 기계로 찍어낸 듯 아름답고도 똑 같은 글자체로 경구들을 적어주면, 조각가들은 그 종이를 판에 대고 글씨를 새기게 되는데, 그 조각 기술 또한 몇 년씩 연습을 한다. 그리고 경판에 글자 조각이 끝나면 거기에 먹물을 묻혀 종이에 찍어내고, 그 종이들을 엮어 책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 끝이 아니다. 거기에 그 사람들을 뒷바라지 하는 사람들이 또 있다. 밥과 빨래를 해주고 오로지 그 일에만 매달릴 수 있게 모든 과정을 돕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어렵게 만든 그 대장경 판에 이름 모를 글자들이 새겨져 있는 것이다. 그 글자들은 이름일까, 조각을 한 사람의 이름인지, 그 이가 사모한 사람의 이름인지, 이름이 아이라면 그 무엇인지. 작가는 이런 이야기들을 알았기에 그 미스터리에 서사를 입힐 생각을 했던 것이리라. 그 경판, 대장경이 탄생하게 된 사랑의 위대한 이름을.
만약 지금도 케이블에 재방송 되고 있는 ‘무신’ 이라는 드라마를 보았다면, 혹은 나처럼 대장경에 관련된 소설이나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이 소설을 읽었다면 더 재미있으리라 생각한다. 고려는 정치적으로는 유교를 택했지만 철저하게 불교의 나라였다.
이 소설에서 초조대장경은 우리가 아는 팔만대장경이 아니다. 고려 시대 거란족의 침입으로 전남 나주까지 피난 갔던 현종은 신하들과 함께 ‘초조대장경’을 만들었는데 이 때문인지 거란은 화친을 하고 물러나게 된다. 이 후 이 대장경은 부처가 고려를 지켜준다는 ‘증표’ 가 된 것이다. 그런데 그 후 몽골의 침입으로 대구 부인사에 보관하고 있던 초조대장경이 불 타버리는 것이다. 백성들의 마음이 어떠했겠는가. 이때 최우가 다스리는 무신들의 나라가 된 고려에서 황제는 백성들의 민심을 얻고, 땅에 떨어진 황제의 권위를 찾기 위해 전소해 버린 초조대장경을 육로로 운송하는 프로젝트를 만드는 것이다.
이 프로젝트에 왕의 법사인 우송이 총 책임을 맡고, 대장경이 불탈 때 목숨을 걸고 일부나마 빼낸 감무의 여식 부용과 학승 진오가 동참한다. 그리고 뒤늦게 출현한 왕의 그림자무사 양무가 호위를 맡으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미 불타 없어진 초조대장경을 육로로 운반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아름다운 부용은 관세음 보살의 현신인양 여겨지고 백성들은 이 운반 행렬을 마치 부처의 행렬인양 기꺼이 반긴다. 황제의 의도가 먹히는 것일까?
그러나 경주 황룡사에서 출발한 이십여 명의 운반대는 금산에 이르러 몽골군의 침략이 다시 시작되었다는 첩보에 따라 가까운 성으로 피신하게 되는데, 다음날 수만 명의 몽골군이 성을 에워싸고 대장경 반환을 종용하는 어이없는 현실 앞에 서게 된다. 그리고 서서히 밝혀지는 네 사람의 정체. 거대한 음모 속에 아무도 믿을 수 없고, 누구도 성을 벗어날 수 없는 가운데, 주인공들은 자기만의 비밀들로 서로 부딪치게 되는 것이다. 몽골군의 대공세가 임박하자 성의 민심은 점점 광기에 사로잡힌다. 이제 기적만이 그들을 구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후에 만들어 진 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팔만대장경’이다. 그들의 사랑의 기적이 바로 먼 훗날 팔만대장경이 되었고, 그 이름이 경판 한쪽에 비밀스럽게 적혀 있는 것이다. 이 소설은 불교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부처의 말씀과 깨달음의 말씀, 그것을 해석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이고, 그 어려운 경전은 몰라도 오로지 살아내고 사랑할 줄만 알았던 가여운 민초들의 이야기다. 그 대장경을 만든 건 정치꾼도, 높고 높은 황제도, 그 잘난 사람들도 아니었다. 오로지 이 땅을 사랑하고 내 사람들을 아끼고, 내 나라 산천을 아끼는 우리 불쌍한 민초들이었던 것이다.
그 위대한 사랑의 주인공들이 바로 초조대장경, 팔만대장경을 만든 사람들이며 그 사람들의 비밀스러운 이야기가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채 경전 속에 조용히 잠들어 있는 것이다. 불교적인, 종교적으로만 이 소설을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 이야기는 부처님이 이 세상의 전부였던 시대 사람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 위대한 나라를 지키고, 이 유구한 역사를 이끌어 온 것이 바로 자기자신들인지도 모른 채 오로지 부처님의 힘인 줄 로만 알았던 우리 어여쁜 민초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