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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아라 노동 - 꼭꼭 숨겨진 나와 당신의 권리
은수미 지음 / 부키 / 2012년 10월
평점 :
절판
날아라 노동
‘노동’, ‘노동자’ 란 말을 들으면 어떤가? 혹시 공장에서 일하는 소위 말하는 ‘공순이’, ‘공돌이’ ‘노가다’ 가 떠오르지 않는가? 아니면 거리를 점거한 붉은 띠를 머리에 두르고 시위하는 사람들, 더 나아가 좌익, 좌빨, 종북, 빨갱이란 말이 떠오르지는 않는지?
그렇다. 나는 그랬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진 나도 노동, 노동자란 말에서 깊이 풍기는 최루탄 냄새를 맡곤 했다. 나는 한번도 나 자신을 ‘노동자’ 라고 생각해 본적이 없고, 내가 하는 일을 ‘노동’ 이라고 생각해 본적도 없다. 노사쟁의, 노사분규, 불법파업 등 부정적인 이미지의 말들과 노동이라는 말을 한 묶음으로 생각했다.
그것은 내가 하는 일은 예술, 즉 고급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고,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을 한다는 거만함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나는 소위 말하는 지방 3류대 일지언정 대졸자여서 고졸, 중졸과는 ‘급’ 이 다르다고 생각한 것도 사실이며, 노동은 ‘학력이 낮은 사람들이 하는 육체적인 일’로만 생각했다는 것을 고백한다.
또한 나는 고백한다. 나는 내가 ‘비정규직’ 이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다. 예술은 원래 가난한 거니까, 뜨고 유명해지면 금방 부자가 되니까, 내가 하는 일은 ‘아주 가끔’ 일이 들어오긴 하지만 시간당 그 대가는 꽤 높은 편이니까. 음악 하는 사람인데, 안정적인 수입이 없는 일이기에 음악 이외의 일을 함으로써 돈을 벌어 생활해야 하는 것도 음악을 하려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더 슬픈 현실은 다른 일을 하지 않고, 자신의 작품활동으로 살아가려고 하는 각 분야 예술가들에게는 ‘게으르다’ 는 딱지를 붙인다는 것이다. 나부터 그렇게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말이다. 그렇게 살길을 마련하고,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이기까지 참으로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저 내가 ‘많은 대중들이 원하는 음악’을 하지 않기 때문에 겪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기엔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것이었다. 거기다 대중들이 나를 원하지 않는 것은 ‘실력이 부족해서가 아닌가’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선입견은 더욱 견디기 힘들었다.
10대 20대의 거의 대부분을 연습실에서 보낸 나 자신에게, 몇 장의 앨범을 발표하고 내 청춘을 바친 음악에, 나를 싼값에 섭외하려는 기획자들에게, 나를 알아주지 않는 이 세상에게 마침내 막연한 분노까지 가지게 된 것은 몇 년간 나를 우울증이라는 고통 속에 나 자신을 던져 넣는 결과를 가져왔다.
다시 노동으로 돌아와 보자. 그럼 왜 나는 ‘노동’ 이라는 말을 이렇게 부정적으로 느끼게 되었을까. 그것은 노동이라는 말의 탄생과 무관하지 않다. 고대부터 노동은 노예의 노동이나 농노의 노동을 의미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노예나 육체 노동을 하는 자가 하는 일은 ‘노동’ 이고, 장인이나 수공업자가 하는 일은 ‘작업’으로 분류되어 있었다 한다. (p88) 우리도 마찬가지 아니었나? 엄격한 신분제 사회에서 노동은 종이나 소작인들의 것이었을 뿐이었으니까 말이다. 또한 노동력을 사고 판다는 것은 그 노동력을 가진 ‘인격’까지 사고 파는 것이었을 테니. 결국 그 먼 옛날의 구분이 아직도 우리의 의식 속에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러면 현대에서 ‘노동’은 어떠한 지위를 가지고 있는가? 노동자의 지위는 법으로 엄격하게 정해져 있다. 그것은 자본주의의 발달과도 무관하지 않다. 노예주나 가부장이 아닌 근대적 사용자가 등장하게 된 것은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노동을 보편적이고 공통적인 노동으로 -즉 옷을 짓든, 차를 만들든- 불리게 되고, 노동이 생산, 이윤, 부의 원천이라는 ‘노동가치론’이 등장하게 되면서 노동은 시민권을 갖게 된 때문이다. 또한 노동자의 노동력과 인격을 구분하게 되고, 자본주의 사회가 되면서 노동자는 소비자로도 재 탄생해야 했기에, 인격과 노동력을 구분하여 보호하여야 했고, 국가적 수준에서 법제도적 정비가 이루어 졌던 것이다. (p93) 또한 시민들의 의식변화는 노동권 확립, 민주주의, 권리 투쟁의 역사를 만들어 왔고, 그렇게 노동은 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 행동권의 노동3권을 갖게 되었다. (p65)
그러면 나는 노동자인가? 이 책에 따르면 ‘임금이나 급료 및 기타 다양한 형태의 소득을 얻는 대가로 일하는 사람은 모두 노동자다(p72) 즉 사용자, 혹은 자본가가 아닌 대부분의 일하는 사람은 모두 노동자다. 예술가도 노동자다. 나는 노동자이며 동시에 소비자이면서, 투자자이며, 여성이며 시민이다. 왜 나는 이 사실을 몰랐을까? 불행히도 우리는 입시위주의 교육 속에 기본적인 노동에 대한 교육을 받지 못하고 있다. 취업을 해서도 마찬가지다. 노동이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 노동과 노동자의 권리를 어떻게 쟁취해 왔는지, 우리의 권리는 무엇인지 아무도 알려주지 않기에, 사용자는 이용하고 노동자는 당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이 노동3권이 잘 지켜지는 사회에 살고 있을까? 불행히도 전혀 아니다. 우리는 현재 대통령까지 나서서 이 권리를 부정하는 나라에 살고 있다. 노동자들이 자신의 권익을 위해 정당한 방식으로 파업을 해도 그들이 통념보다 더 많은 보수를 받는다고 생각하면 다들 욕한다. 그렇게 파업을 결의한 노동자들에게 민간 군사업체 용역들을 동원해 상해를 입혀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 나라에 살고 있는 것이다. 이는 법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법을 집행할 ‘의지’의 문제라고 저자는 말한다.
이는 모두 노동자의 입장이 아닌 ‘사용자’의 입장으로 노동을 대하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기도 하다. 노동부를 고용노동부로 이름을 바꾸고 고용부로 불러달라고 하는 정부부처의 행태만을 봐도 알 수 있다.(p52) 노동과 노동자의 관련된 일은 모두 ‘고용’의 입장으로 판단한다는 것은 참으로 위험하다. 경기가 침체되면 노동자를 고용한 기업에서는 정규직을 마음대로 해고하고 반대로 비정규직을 뽑는데 이도 직접고용이 아닌 용역이나 파견의 형태를 띄고 있을 때, 사용자는 어느새 사라지고, 노동의 안정성은 보장되지 않는 것이다. 책임 소재가 불분명해 지기 때문에 문제가 생겼을 때 노동자가 책임을 호소 할 대상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비정규직과 취업문제는 어떻게 봐야 할까? 기업들과 정부는 젊은 이들에게 눈을 낮추면 할 일이 많다고 하지만 이 또한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이다. 같은 일을 해도 정규직과 비정규직은 보수 차이가 배가 난다면,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보수가 배이상 차이가 난다면 그래도 그들에게 취업을 강요할 수가 있는가? 그나마 그 일밖에 할 수 없어서 선택했다면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이므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수 없는 걸까? 이는 오로지 사용자의 입장에서만 하는 말이 아닌가? 정부가 나서서 비정규직을 양산하고 있는 건 아닌지, 정규직 사원이 많아지면 지출이 늘어나니 경영이 어려워 진다는 말은 우리는 너무나 쉽게 믿고 있는 건 아닌지.
그러면 나는 왜 가난한가? 열심히 일하는데도? 왜 대학을 졸업하면 빚쟁이가 되는가? 누구는 말한다. 열심히 하지 않기 때문에 가난한 것이라고. 그러나 그 말은 사실이 아니다. 저자는 그 문제 원인을 ‘구조’ 와 ‘체제’에서 찾는다. 비정규직이나 저임금 노동자로 취업해도 사회 안전망이 갖추어져 있으면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p192), 보편적 복지를 확대하여 시민이면 시민답게 살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고, 비정규직이든 정규직이든 직접고용이든 간접고용이든 모든 노동자에게 노동3권을 부여하는 법개정이 시급하며, 작은 기업이든 큰 기업이든 동일지역이나 업종에 종사할 경우 하나의 노동조합을 만드는 것도 필요하다고 말한다.(p186)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미처 몰랐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던 많은 것들에 대해 알 수 있었다.물론 이 책은 문제점만 지적하고 끝나지는 않는다. 책의 후반에 이 많은 노동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저자의 해결방안이 제시되어 있다. 노동법 개정 방안, 사회 안정망 확대, 좋은 일자리 확대와 일자리 최소기준 확립, 일자리 차별 철폐와 비정규지 제한등의 제안은 참으로 절실하게 느껴졌다.
이제 나는 더 이상 노동을 터부시 하지 않는다. 아직도 예술분야에 종사하는 노동자로써 내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방법을 찾지 못하겠고, 나의 가난을 타개할 수 있는 방법은 찾지 못했지만, 또한 내 작품활동 외에 다른 일을 해야만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이 현실을 벗어 날 수 있는 방법 또한 찾지 못했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시민의 각성만이 이 현실을 바꿀 수가 있다는 것이다.
노동은 우리의 권리이고 노동은 행복추구권이다. 나는 꿈꾼다. 예술 또한 노동이며, 예술 또한 사회 제반 시스템처럼 사회 구성원들이 누리는 권리이다. 권리를 행사하게 해주는 예술가들도 보편적 복지의 사회 안전 망의 보호를 받게 된다면 그 혜택은 시민들에게 돌아갈 것이며, 시민들은 그로 인해 더 나은 삶을 살 수가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