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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풍 - 축제의 밤
문홍주 지음 / 선앤문 / 2012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삼풍 축제의 밤
이 책의 책장을 넘기기 전까지 또 까맣게 잊고 있었다. 학창시절 TV속에서 남 일처럼 보았던 무너진 삼풍 백화점. 몇 년 전, 삼풍 백화점이 무너지게 된 이유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보며 한번 상기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을 또 잊어버린 지 몇 년. 세상은 아무일 없다는 듯이 굴러왔고 나의 기억력도 사람들의 그것과 다를 바 없었다.
어쩌면 모르겠다. 나 스스로 감당하기 버거운 일인 것 같으면 의식적으로 마음을 두지 않는 나의버릇인 것일 수도. 그렇게 합리화 하고 픈 마음인 것일 수도. 그 기막힌 일이 내 가족에게, 소중한 사람에게 일어난다면 하는 상상 혹은 감정이입이라도 되는 날엔 난 겁이 나서 이 세상을 살아갈 힘도 잃어버릴 지 모르겠다.
저자 문홍주는 그 아픈 기억을 끄집어 내어 이 소설을 완성하기 까지 얼마나 힘든 시간을 겪어야 했을까. 이 소설 속에서 마치 내 곁에 살아있는 듯한 이웃과, 친구와, 가족들을 만들어 내고 그들의 삶에 옷을 입히면서 얼마나 많은 눈물을 삼켜야 했을까. 그런 엄청난 일을 들추어내고 그 일보다 더 비극이었던 사태수습의 과정을 상기하고, 조사하며 얼마나 높고도 두꺼운 세상의 벽과 마주해야 했을까. 난 그 사실에 마주할 용기 조차 없는데... 그렇다. 용기다 그것은. 저자가 이 세상에 내어놓은 이 어여쁜 소설은 ‘용기’ 다. 세상에 마주할 용기, 불의에 마주할 용기, 죽어간 수많은 사람과 그 엄청난 사실들 앞에 마주설 ‘용기’.
내가 사는 대구에서 지하철 참사가 일어났을 때 안동의 부모님께서 내 핸드폰으로 얼마나 전화를 하셨던지, 난 그것도 모른 체 한 나절이 넘도록 전화를 받지 않았는데 그때 부모님이 느끼셨을 두려움을 난 얼마나 알 수 있을까. 마침내 통화가 되자 영문도 모르는 나에게 냅다 큰 소리부터 질러 대셨던 그 마음을 난 얼마나 알 수 있을까…
이 소설 속에는 각자의 사연을 가진 희생자들과, 그것을 취재했던 기자들, 대책도 없고 안전도 확보되지 않은 곳에 목숨을 내놓고 구조작업을 하셨던 소방공무원, 일이 터지자 도망가기 급급했던 백화점과 건설업체 관계자, 한나절도 안되 대충 준공허가를 해준 공무원들, 뒷돈 받은 관계자들, 일 터지자 다른 부서로 책임 떠넘기기에 분주했던 고위 권력자들, 제대로 된 처벌 대신 덮기에 급급했던 법조계인사들, 그 와중에 생색내기 바쁜 정치인들, 자원봉사자 흉내로 물건 훔치려는 사람들…별별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지옥’ 이었다. 그때 그곳은.
사람보다는 ‘돈’ 이 중한 사람들이 있었고, 그 욕망의 콩고물을 빨아먹으며 기생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알면서 침묵해야 했던, 그러길 강요당했던 사람들도 있었고, 남의 아픔은 먼 산 불구경하듯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 모두가 사람이었고, 그 모두가 욕망이었고, 그 모두가 한바탕 꿈이었다.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죽음의 축제.
살아남은 사람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나는 안다. 그저 세월은 흐르고 또 다른 일로 지워지고, 아픔과 절규는 사라져 버리고, 함께 죽지 못한 사람들은 그저 숨을 쉬고 있을 뿐임을…
비 상식적이고 돌이킬 수 없는 수순을 상식적으로 밟아가는 것을 가리켜 사람들은 ‘비극’ 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비극이란 건 그것을 해결하는 과정 자체가 더 비극이기 마련이었다. P115
추모비 건립은 권장사항이지 의무사항은 아닙니다. P351
올라와서 절차 밟아가지고 하세요. P353
그와 함께 야심 차게 준비했던 삼풍 관련 기사들도 날아가 버렸다. 날아간 그 빈자리를 IMF가 메꿨다. 그 다음은 먹고 사는 문제로 그리고는… 서서히 잊혀져 갔다. P354
한 번 손에 들고 거의 한숨에 읽어버릴 정도로 소설은 흡입력이 대단했다. 저자의 문장력은 너무나 뛰어났고, 등장인물들은 모두가 다 살아있는 듯 했으며, 글의 구조 또한 훌륭했다.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감정선, 치밀하지만 지겹지 않은 묘사, 한 순간도 긴장을 놓치지 않는 집중력. 무엇 하나 흠 잡을 데 없는 아주 훌륭한 소설이었다.
눈물이 쏙 빠질 신파도 아니었고, 이 사회를 원망하고 책망하는 저주 어린 글도 아니었으며, 각자의 사람들의 입장을 이해해야 한다는 설득의 글도 아니었다. 그저 많은 사람들이 등장했고, 그들 모두 사연이 있는 사람들이었고, 그 때도 지금도 달라질 것 없는 사람들이었고,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없는 대한민국일 뿐.
우리는 알고 싶어하지도, 애써 관심 두지도 않은 채 그저 나만 아니면 된다는 마음으로 살아간다. 그러나 꼭 나의 일로 닥치면 그땐 누가 나를 위해 눈물을 흘려줄 것인가. 누가 나를 위해 손을 잡아줄 것인가.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너무도 쉽게 잊으며 살아간다. 저자는 그런 나에게 경종을 울려주었다.
삼풍 이후 17년… 그 후 무엇이 달라졌는가. 아니, 나는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가… 나는 내가 살아가는 이 자리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