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나무가 사라진 후에야 - 북미 최후의 인디언이 천 년을 넘어 전한 마지막 지혜
위베르 망시옹.스테파니 벨랑제 지음, 권지현 옮김 / 흐름출판 / 2012년 7월
평점 :
절판


마지막 나무가 사라진 후에야-인디언 '크리족' 이 주는 교훈 [윤성]

 

 

 

 

 

 

 

우리는 왜 죽을 때까지 일 해야 하는 걸까? 이 지구라는 땅에 언제부터 주인이 생기기 시작했을까? 그 주인이란 사람들은 거기에다 값을 매기고 누구는 사고 파는 것을 반복해 돈을 벌고 누구는 한 몸 뉘일 땅이 없이 가난을 벗어 날수 없는 것일까? 왜 우리는 도시에 번식하는 고양이들이 그저 시끄럽고 기분 나쁘단 이유 하나만으로 죽이지 못해 안달인 걸까?

 


아마 이 책 속에 나오는 인디언 크리족이 본다면 그런 우리를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이라고 할 것이다. 이 책 속에서 나오는 크리족의 삶을 들여다 보며 '내가 살아가는 세계에 대해서 돌아볼 수 있었다' 고 한다면 참으로 뻔한 말이 아닐까 한다. 이 책을 보며 느낀 것은 그런 뻔한 표현으로는 다 담아 낼수 없을 만큼의 신비로운 경험이었다.

 


예전에 '인디언의 복음' 이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그 책을 읽으며 그들이 가진 인생관, 철학, 생명을 대하는 태도, 시간의 개념, 소유, 가족의 개념등에 대해 접할 수 있는 경험을 한 적이 있다. 그 책을 읽은 후 내 삶이 조금은 변했다. 나와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의 개념을 새로이 정립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니 다른 시각으로도 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른 후 그런 신비로운 경험은 잊혀지고 나는 또 다시 예전의 나로 돌아갔다는 것을 이 책 '마지막 나무가 사라진 후에야' 을 읽으며 상기할 수 있었다.

 

 

 

 

 

이 책은 북미 최후의 인디언 '크리족'의 삶과 죽음을 대하는 태도, 인생관, 시간관념, 가족, 사냥, 사물과 생명을 대하는 태도, 종교 등에 대해 말하는 책이다. 그들의 삶을 보며 우리가 잃어버린 진정한 가르침을 일깨워 주는 책이다.

 

 


놀랍게도 우리의 상고사를 공부하다 보면 우리 한민족과 인디언들이 한 가족 일지도 모른다는 추측이 가능한 그런 주장들을 만날 수 있다. 그들이 가진 금기와, 종교, 생활 습관이나 생명을 대하는 태도, 가치관등이 지금은 잊혀지고  우리의 정신세계와 아주 많이 닮아 있으며, 그들의 주름진 얼굴이나 인상, 절구, 북이나 소고, 우리의 무당과 비슷한 미타요(샤먼)의 역할 등을 보면 때론 소름끼치도록 비슷하단 것을 알게 된다. 또한 그들의 시간개념과 삶과 죽음에 대한 생각들은 우리의 불교, 즉 동양 사상과도 많이 닿아 있다. 그것은 서양의 기독교적인 정서나 가치관과는 참으로 다른 것이다.

 


이 책에서 느꼈던 그들의 삶과 우리의 잊혀진 유산들을 매치 시키며 참으로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아득한 옛날 우리의 선조들과 그들은 한 가족이었을지도 모른다. 계절에 따라 함께 이동하며 함께 사냥하고 사랑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상상을 하며 한 장, 한 장 책장을 넘기니 이 책은 더 진한 느낌으로 다가온 것 같다.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 이 책의 끝장을 넘기고 있었으니까.

 


가장 크게 와 닿았던 것은 그들의 '시간의 개념' 이었다. 현대인이 느끼는 시간의 개념은 일직선 (단선적) 이다. 시작과 끝이 있고, 전과 후가 있으며, 진보의 개념을 포함한다. 그것은 물질적인 개념에서 현재는 늘 미래보다 부족하단 것을 말한다. 우리는 언제나 현재를 살 수밖에 없지만, 늘 미래를 꿈꾼다. 일직선인 시간 속에서 오늘보다 더 나은 미래가 확실한데 규정할 수 없는 현재는 늘 불만 투성이 일수밖에 없는 것이다. 일직선의 세계, 미지의 세계, 즉 불안을 향해 끊임없이 달려가는 것이다. 그러나 크리족의 시간은 '주기적'이다. 그들은 시간을 돌고도는 원으로 인식한다. 의식(儀式)은 절기에 따라 반복되며, 삶 자체가 스스로 순환하며 돌고 돈다. 동물의 이동 또한 생식과 마찬가지고 주기적이며, 늘 제자리로 돌아가는 부동의 개념을 갖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 자연의 싸이클에 완벽하게 일치되는 삶을 살았던 우리의 선조들을 떠올렸다. 계절이 반복되듯 삶의 모습도 반복이 되고 죽음 조차도 삶의 일부로 받아들였던 그들의 무심한 삶에 그런 엄청한 의미가 담겨 있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또한 불가의 가르침 또한 다르지 않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또한 현대인은 어떤 일이 반드시 다른 무언가를 초래한다고 보는 '인과적 사고'를 하고 있으나, 크리족은 '공시(共示)적 사고를 한다고 한다. 공시적 사고는 함께 일어나는 일들을 전체적으로 조망하는 사고 방식이다. 행동 하나하나가 전체 환경에 즉각적인 영향을 주고, 세상 만물이 서로 연결되어 있으니 나 역시 연결되어 있다. 그것은 생물에 국한 되지 않는 사고 방식이다. 죽었든 살았든 존중하여야 하며 모든것을 균형, 관계, 조화의 시각으로 보는 것이다. 이 또한 불가의 인연의 개념과 다르지 않고, 중국 고대 철학과도 연관이 되어있다. 우리는 자연의 일부이지, 자연을 지배하는 존재가 아닌 것이다.

 


이런 사고 방식에서 그들의 모든 삶이 이루어 진다. 부모는 아이들을 낳고 자연속에서 키우고, 그 부모는 늙어 자연으로 다시 돌아가도 그의 자녀들이 삶을 이어가며, 그 부모가 죽은 곳에서 다시 새 생명이 태어나는 것이다. 그들의 사냥은 동물을 죽이는 것이 아니다. 현대인들은 육체적 행위로, 즐거움을 위해 사냥을 하지만, 그들은 살기위해 사냥을 하고 동물들은 그들을 경외하는 인간들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생명을 내어준다.

 


그들의 종교는 어떠한가? 그들에겐 일정한 양식의 '종교' 는 없을 지라도 이 세상을 움직이는 존재 있다고 믿고 순수하게 그 믿음을 지킨다. 그러기에 그들은 미래를 두려워 하지 않는다. 미래를 위해 지금 소유를 바라지 않고, 미래를 위해 지금 비축을 하지 않는다. 그들을 철저히 현재를 살고 자신을 보살펴 주는 존재를 믿는다. '선교사' 들이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보며 흥청망청 산다고 비난하며, 미래를 위해 아끼고 비축하라는 가르침을 먼저 주었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인디언들의 삶은 우리에게 던져준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현대의 삶을 모두 버리고 원시의 세계로 돌아가라는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든 이렇게 살아왔고 문명을 이루었다.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무로 돌릴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만물의 영장이며, 이 지구의 주인 이라는 생각만은 버려야만 하는 석이다. 우리는 이 세상을 함께 구성하는 존재이며, 다른 존재들과 함께 공생하여야 하는 존재 일 것이다. 지구 한쪽에선 모든 것이 남아 돌아 문제 이지만 그 반대편에서는 너무나 부족해서 굶어 죽는 사람들이 넘쳐난다. '좀더 쉽게, 좀더 많이, 오직 나만이' 이런 탐욕의 시각을 버리지 않는 이상 우리는 진정한 행복을 느낄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왜 태어났고,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지 조차 모르게 살다가 죽을 땐 어김없이 한줌의 재로 돌아가야 할 테니까 말이다.  

 


우울이 유행처럼 번진다. 우리는 가진것은 많을 지라도 진정한 행복을 가지지는 못한 것 같다. 매일 매일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이 늘고, 이혼률이 늘고, 아무리 경제가 발전해도 노숙자는 늘어만 간다. 좀 더 뺏고, 좀더 가지고, 남들보다 좀더 높은 곳에 가기 위해 아등바등 애쓰는 삶은 진정한 행복으로 나를 이끌어 주지 못한 다는 것을 우린 이미 알고 있다. 인디언의 삶을 파괴한 것은 우리가 가진 마지막 아름다움과 '인간적' 임을 스스로 포기한 것이 아닐런지. 그들의 교훈이라도 남아 우리를 이렇게 밝혀주니 정말로 다행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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