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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은마 ㅣ 은마 3
안정효 지음 / 나남출판 / 2012년 5월
평점 :
판매중지
은마 (銀馬)
이 책은 '은마는 오지 않는다' 라는 소설의 증보판이다. 여기서 은마( Silver Stallion, 銀馬) 는 고려왕조 시절에 몽골의 야만인들이 쳐들어와서 닥치는 대로 부수고 죽이며 수도 송악을 향해 진군해 내려오자, 북쪽의 오랑캐를 물리치려고 장군봉에서 장수가 하나 태어났는데, 태어날 때부터 아예 다 자란 어른으로 뛰쳐나와 산 골짜기에서 눈부신 갈기를 휘날리며 나타난 은빛 말 한필을 타고 사흘만에 나라를 구했다는 '아기장수' 설화에서 유래한다.
또한 이 설화는 각 지역마다 그 형태를 달리하는데 나라를 구할 아기장수가 태어나자 왕좌를 빼앗길까 두려웠던 왕은 아기장수의 겨드랑이에 난 날개를 잘라버리고 그가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그가 태어난 굴에다 쇳물을 부어 봉인해 버렸다는 것이다. 아마도 이 설화는 나라가환란에 처할 때 마다 자신들을 구해줄 영웅을 기다리던 힘없는 자들의 염원이 아니었을까.
이 소설은 한국전쟁당시 맥아더가 인천상륙작전을 행하던 시점에 강원도의 어느 마을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일을 그리고 있다. 책 서두에서 밝힌 작가 '안정효' 의 말에 따르면 이 소설의 원래 제목은 '밤 나무 집 The Chesynut House' 이었고, 특이하게도 해외 출판을 염두에 둔 영어로 쓰여진 소설이었으며, 뉴욕에서 먼저 출판된 후 독일과 덴마크어로 번역되어 출간, 여러번의 퇴고와 여러사연을 거쳐 다시 우리말로 번연된 후 개정을 통해 '은마' 라는 이름으로 우리와 만나게 되었다.
이 소설은 많은 전쟁영화나 소설들에서 그려지는 것처럼 전쟁의 고통이나 적나라한 고발을 담고있지는 않다. 작가는 소설 '파리대왕' 에서처럼 흔히 순진하다고 생각하는 아이들이 때로는 얼마나 잔인한 짐승으로 돌변하는지를 한국전쟁 당시 부평 양공주에게 못된 짓을 했던 작가의 소년 시절의 경험을 모티프로 '아기장수' 설화와 '맥아더'까지 연결시켜 고발하는 구성을 갖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이어 '전쟁 '이라는 극한 상황 속에서 순진한 어린아이들이 어떻게 잔인하게 변해 가는지, '아기장수' 처럼 자신들을 구하기위해 우리나라에 들어왔다는 '매가도-맥아더' 같은 세계 연합군들이 어떻게 그들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는지 과연 그 것이 그들 탓인지, 미국병사들에게 부지불식 간에 겁탈 당한 '언례'를 감싸주기는 커녕 불결한 사람으로 배척한 마을 주민 그들의 탓인지 소설은 우리에게 묻고 있다.
주인공 만식이이의 엄마 '언례'는 파병 병사들에게 겁탈을 당한 후 마을 사람들에게 배척당하고 한 식구처럼 지냈던 황 노인의 가족들에게 조차 받아들여지지 못하자 먹고살기 위해 결국 양공주의 길을 걷게 된다. 그 후 만식이는 자신의 엄마가 당했던 것처럼, 늘 함께 어울리던 5총사에게도 따돌림을 당하게 된다. 조용하던 마을에 언례와 타지에서 들어온 양공주2명과 미군을 상대하는 가게를 열자, 그 곳을 모래 훔쳐보던 친구를 응징하려다 자신이 만든 총에 손가락이 잘리는 사고를 당하게 되고, 언례 가족은 결국 그 마을을 떠나 피난길에 오르게 된다.
이 소설은 강원도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영어를 우리말로 번역한 특이함 탓인지 강원도의 토속적인 분위기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대사들도 모두 표준어로 처리되어있어 오히려 강원도란 배경의 설정은 강원도를 벗어난, '사람이 사는 곳' 이란 일반성과 상징성을 가지게 된다. 굳이 강원도일 필요는 없는 것이며, 그저 사람들이 교류하며 살아가는 크고 작은 마을 혹은 공간이 되는 것이다.
어린아이들의 순진함은 스스로 가치판단이 힘든 때문으로 잘 못된 방향으로 자리잡은 관심이나 행동은 오히려 더욱 잔인함을 가지게도 되는 듯 하다. 거기에 전쟁이라는 상황적인 특이성 속에 어른들의 통제나 인간적인 가치들의 부재는 그 잔인함을 더욱 증폭시키는 계기가 된다. 그러나 어른 들의 그것은 어떨까. 전쟁이라는 극한 적 상황에서 나타나는 집단 이기심과 같은 인간들의 어두운 본성은 단지 전쟁이라는 극한적인 상황에만 국한 되는 일일까.
총성과 포연이 난무하는 전쟁은 비단 총칼로만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소설에서 보여지는 소년들의 이기심과 잔인함은 지금 현실에서도 버젓이 자행되고 있다. 학교폭력이란 이름으로 집단 괴롭힘과 같은 폭력에 노출된 아이들은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해야할 만큼 큰 고통을 받고 있고, 소설 속 마을 사람들 같은 이기적인 어른들은 아이들을 총칼없는 전쟁터로 내 몰고 아이들을 망가뜨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아이들에게 반짝이는 은색갈기를 휘날리는 백마를 타고 오는 '아기장수'는 과연 오지 않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