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기본적인 물음에서 시작해 보자. 그림이란 뭘까? 그림은 명사이기도 하지만, 그 자체로 동사이기도 한 말이다. 나는 이런 구조의 말들이 좋다. 꿈을 꿈. 삶을 삶. 그림을 그림, 이런 말들에는 결과와 과정을 동등하게 중시하는 뜻이 읽힌다. 이런 의미에서, 그림이라고 하면 대개 종이에 남는 결과물을 먼저 떠올리겠지만 나에게 훨씬 더 중요한 것은 그림을 그리는 행동, 더 자세히 말해 그리는 사람 속에서 일어나는 시간의 변화이다. 자동차로 말하자면 기어 변환을 하듯, 그림을 그리는 동안 사람은 다른 시간 속을 걷게 된다. 이 변화를 경험하는 과정이 종이에 그럴싸한 무엇을 남기는 결과보다 중요하다. 그래서 누군가 ‘그림이 그리고 싶어졌어요.‘라고 말하면 나는 ‘아, 이 사람은 지금 다른 시간을 필요로 하는구나.‘라고 받아들인다. (11) - P11

초라함만이 줄 수 있는 둘도 없는 소중함과 재미는 초라함에 대한 감각이 발달되지 않았을 때만 향유가 가능하다. 초라함에 대한 세상의 통념을 받아들이는 순간 사람은 정말로 초라해진다. (61) - P61

이게 모두 괜한 고민이다. 그냥 멋대로, 그리고 싶은 부분만 그리면 된다. 색깔도 그냥 있는 물감을 쓰면 된다. 건축스케치계의 일인자가 되고 싶은 게 아니라면, 그림이란 그저 대상을 조금 더 깊이 즐기기 위한 수단이니, 비례가 안 맞든, 형태가 엉터리든 그저 손이가는 대로 멋대로 그리면 그뿐이다. (72) - P72

그 사람을 잘 그리기 위해 관찰한다기보다 그 사람을 잘 관찰하기 위해 그림을 그린다. (157) - P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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