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나도 어쩔 수가 없었다. 누군가가 시간을 들여 손으로 직접 쓴 편지를 쓰레기통에 던져버린다는 것이 다소 폭력적으로 느껴졌던 것이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들었다. "누가 알겠어, 이것들이 미래에는 누군가에게 대단히 중요한 편지가 될 수도 있잖아?" 나는 역사와 문학을 전공했고, 부고 기사 쓰는 일을 한 사람이었다. 나는 어떤 괴짜들이 차마 버릴 수 없었던 편지와 물건을 들여다보는 데 많은 시간을 소비했다. 이런 편지나 물건이 없다면 역사도 없고 기억도 없다. (p.270)

그는 단순히 책을 정리하며 남은 형기만 세고 있던 것이 아니었다. 그의 우아한 사서의 태도, 제목을 스치는 그의 손길, 부드럽게 먼지를 털고 책을 매만지는 방식, 선반에 책을 꽂는 주의 깊은 세심함, 그의 침묵을 바라보며, 나는 그가 만들어낸 질서에 감탄하고 말았다. 그것은 내가 그려왔던 웅대한 계획이 아니라, 시간이 지나며 세련되어지는 작고 우아한 동작들을 반복하는 데 있었다. (p.4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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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갈 일은 쉽게 가고 어렵게 갈 일은 어렵게 가야 하는데 혹시 늘 그 반대는 아닌지, 그리하여 정말 중요한 결단이 필요한 일에는 대세와 편의를 따르고,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작은 일들에만 과민하게 윤리적인 척을 하는 것은 아닌지. (p.22)

어떻게 보면 인류는 이 괴물 같은 근대를 낳기 위해 그 시기에 이미 인간의 모든 가능성을 다 탕진해 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18, 19세기의 창조적인 인간들에 비교하면 20세기의 인간들은 자신들이 만든 덫에 걸려 온갖 참화에 허덕이다 갔고, 21세기의 인간들은 이제 그 설거지나 하다가 사멸해 갈 운명으로 보인다. (p.60)

이번 영국행에서 내가 가장 금기로 삼기로 한 것이 우울이다. 우울은 늘 자학을 부르고 자학은 마음의 학대에서 몸의 학대로 이어진다. 이렇게 혼자일 때 이 심연의 덫에 걸려 들면 절대 안된다. 매일 쓰는 이 글도 우울을 부르지 않기 위해 매우 조심한다. 우울한 척도 말아야 한다. 그럴 때는 더 불행한 것들, 더 고통스러운 사람들을 생각하면 된다. (...) 그래도 우울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면 잠시 음악을 듣기로 한다. 음악 위에 그 무게를 올려놓고 날려 보내기로 한다. (p.66)

낮도 점점 짧아져 6시면 속절없이 땅거미가 내린다. 나쁘지 않다. 내 공부도 생각도 이렇게 가을처럼, 다가올 겨울처럼 깊이깊이 내려앉으면 좋겠다. (p.108)

하긴 속물과 댄디가 종이 한 장 차이이듯, 댄디와 관조적 래디컬의 차이도 종이 한 장 차이고, 관조적 래디컬과 이른바 실천적 인텔리의 차이도 종이 한 장 차이일 것이다. 실천적 인텔리가 실천의 동력과 방법을 잃으면 관조적 래디컬이 되고, 관조적 래디컬이 래디컬한 관점을 잃으면 속물이 되는 것이다. 그 경계를 넘는 것은 의외로 한 순간이다. / 하지만, 때로는 그 종이 한 장 차이가 생의 방향을 바꾸는 태풍의 경로가 될 수도 있고 영원히 건너지 못하는 심연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산다는 게 알고 보면 그렇게 다 그 종이 한 장 차이의 틈을 넘지 못해 안간힘을 쓰는 것인지도 모르고 어쩌면 거기에 삶 전체가 걸려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그 차이는 생각보다 엄중하다. (p.186)

"아빠, 그 짐 좀 내려 놓으세요. 언젠가 대답이 있을 거예요. 너무 힘들게 살지 마세요. 저 노래처럼 다 잘될 거예요." 운전을 하는 내 눈에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그래 맞다. 네 말이 맞다. 꼭 내가 대답해야 하는 건 아니다. 언젠가는 응답이 있을 거다. 이제 좀 내려놓자. 이 짐을 좀 내려놓자 하며 나는 한줄기 눈물을 다시 흘렸다. (p.210)

또한 모든 지식이 전문화되고 그럼으로써 신비화, 권위화되어서 지식인이 자율성, 독립성을 잃고 결국 시스템이나 당파나 권력과 유기적으로 결합하게 되는 현대의 상황에서 개체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전문직업인이나 전문가적 정체성을 거부하고 아마추어로 남아야 한다. 여기서 아마추어란 미숙한 자라는 뜻이 아니라 "노선과 장벽들을 가로질러 연결시키고, 전문성에 구속되는 것을 거부하고, 전문직업의 제약에도 불구하고 사상과 가치에 관심을 두는 것을 통해 이윤이나 보상에 의해서가 아니라 더 큰 심상으로부터의 사랑가 억누를 수 없는 관심에 의해 움직이려는 욕망에 의해 행동하는" 사람이다. (p.265)

그러나 지식인임을 자처하고 살아가고 있는 지금에도 안락하고 아무 생각 없이 사는 것에 대한 유혹, 아니 그것까지는 아니더라도 문제를 회피하거나 적당히 넘어가고 싶은 유혹, 나의 지식과 인맥 등에 적당히 기대서 명성이나 쌓고 미시권력이나 누리며 살다 가고 싶은 유혹에 늘 시달리면서 산다. 하지만, 그래도 아직껏 내 양심의 지침은 아슬아슬하게 0도 주변에서 흔들리며 내 젊은 날의 열망과 각오가 질펀하게 녹아내리지 않도록 해 주고 있다. 이젠 더 가열차게 채찍질을 하기도 힘들지만 이제 와서 다르게 살기도 힘들다. (p.270)

내가 세상에 기대고 요구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믿음에서 미묘한 기쁨이 생겨난다. 만족감을 느끼는 데는 대단한 게 필요치 않다. 하루 두 끼 잘 먹으면 되고, 담배와 관심 가는 책이 있고, 매일 매일 조금씩 글을 써나가면 나에겐 완벽한 삶이다. (p.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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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뜨내기나 부랑자를 반대하는 법이 있듯이 쓸모없고 뻔뻔스럽게 끄적거려서는 안 된다는 법이 있다면 자기 자신과 백 명쯤 되는 사람들이 왕국에서 쫓겨날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나는 책을 쓰는 저자가 아니다. 내 과제는 내 삶에 형태를 부여하는 것이다. 그것이 나의 유일한 직업이며 유일한 소명이다." (p. 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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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창성`은 지속적으로 자신의 탄생을 새로운, 언제나 새로운, 그 무엇으로 보고자 하는 근대의 병이디. 또한 근대성이란 오직 죽음에게만 말을 건네는, 유행하는 허상이다. (p. 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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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마지막 즈음에서는 화자가 자신의 아내(A…)와 이웃이자 아내의 내연남인 프랑크가 매번 반복해 이야기하는 소설의 줄거리를 이야기한다. 내연의 관계에 있는 그 둘이 항상 소재로 삼는 소설은 실제의 것이 아니라 지어내서 한 이야기였고, 그게 그들만의 놀이였다는 것을 드러내는 장면이다. 화자의 감정과 이성이 완전히 배제된 채 말 그대로˝ 카메라의 눈˝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인상 깊다.

대화의 소재를 제공해 주는 것은 이 소설이다. 복잡한 심리적 갈등을 제외한다면 소설은 아프리카의 식민지 생활에 대한 일상적인 이야기로 돌풍에 대한 묘사, 원주민의 반란, 클럽의 이야기 등등을 담고 있다. A…와 프랑크는 코냑과 탄산수를 섞은 것을 조금씩 마셔가면서 그 소설에 대해 신나게 이야기한다. 안주인은 음료를 세 개의 잔에 따라 나누어 주었다.
책의 주인공은 세관 관리다. 주인공은 관리가 아니라 어느 오래된 상사의 간부 사원이다. 그 회사는 질이 나빠 자칫하면 사기 행각을 벌인다. 그 회사의 사업은 대단히 훌륭하다. 주인공은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성실하지 못한 사람이다. 그는 성실하다. 그는 전임자가 엉망으로 만들어놓은 상황을 다시 회복하려고 노력한다. 전임자는 자동차 사고로 죽었다. 그러나 주인공에게 전임자가 있을 수 없다. 그 회사는 아주 최근에 설립되었기 때문이다. 또 사고가 아니었다. 게다가 문제가 되는 것은 선박(커다란 흰색 선박)이지 자동차가 아니다. (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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