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는 뺄셈만 배워요. 뺄셈은 아주 가볍죠.
고통을 빼고 두려움을 빼고 안타까움을 빼면
내게는 추억들만 남아요.
나는 매일매일
마술사처럼 `짠` 하고 추억을 꺼내 보여요.
그럴때마다 저 지상에선 비가 내려요.
내가 누렸던 기쁨만큼 빗방울이 떨어지면
내가 사랑했던 사람만큼 우산이 펼쳐져요.
(......)
태어날 때 갖고 태어난 내 모든 행운들을
집안 곳곳에 숨겨놓고 돌아오곤 한답니다.
이곳은 행운이 필요없는 곳이라서요.
내 몫의 행운들을 우리집에 두고 오면
잘 빼고 잘 챙겨둔 추억들이 곱셈을 한 듯 많아져요.
(......)
마음이 너무 많아서
천천히 오래오래 곁으로 보낼게요.
비가 오면 손을 뻗고요, 눈이 오면 혀를 내밀어주세요.
별이며 달이며, 자세히 보면 새로운 모양일 거예요.
제가 제 맘대로 디자인한 거예요.
좋다, 하고 말해주세요.
— 그리운 목소리로 혜선이가 말하고, 시인 김소연이 받아 적다. (김혜선. 2학년 9반. 11월 21일에 태어났다.)
오늘 혜선이네 반에서는 아주 긴 겨울방학식이 있었다.
사고후 세월호 분향소에 처음 갔을때 안산은 시민들의 행렬로 북적거렸었는데 오늘 다시 간 안산은 정적 그 자체였다. 차분히 옛날을 추억하기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분위기였지만 어쩐지 쓸쓸한 마음 들었다.
게다가 교실에 시민들이 가득 들어찰 줄 알았는데 뒷반엔 빈자리가 많다고 해서 2학년 9반 교실에 들어갔더니 방학식 시작될 때 쯤해서야 빈자리가 겨우 찼다.
내가 앉은 자리는 수의사가 꿈이었다는 편다인 학생의 자리.
나는 오늘 편다인이다.
책상 위 노트를 펼쳐보았는데 다른 아이들보다 메모도 없고 편지가 없어서 글을 쓴다는 선생님의 편지도 보였다. 금요일엔 돌아오렴에도, 엄마 나야 시집에도 다인이의 흔적은 없었다. 다인이가 어떤 아이인지 더 많이 알고싶은데...
수학여행에서 돌아오지 못한 최혜정 담임선생님을 대신하여 당시 단원고 교사였던 분이 임시 담임선생님으로 오셨다. 이름표를 나눠주고, 출석을 하나 하나 부르고, 선생님이 호명하는 학생은 나가서 소감을 발표하였다. 반장이던 소영이가 나가서 (오늘은 중년의 아저씨였다) 방학 소감을 얘기하고나자 선생님께서 `반에서 서기를 맡아 교무실에 제일 많이 들락거리고 제일 부지런했던` 다인이 나와서 소감을 말해보라 하셨다. 애초 뒤에 서서 구경이나 할 생각이던 내게는 너무 갑작스런 일이었는데, 이미 감정이 북받칠대로 북받쳐 있을때라 다인이가 되어서 말을 하는 순간 바보같이 말도 잘 못하고 울기만 하다 들어왔다.
처음엔 어색했지만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정말 학생들이 되어서 방학을 하는 기분이 되었다. 친구들의 농담에 까르르 웃기도하고 친구가 울면 같이 울고... 세월호 합동분향소로 분향하러 가기 위해 교실을 나서는 순간 정말 방학을 해서 친구들과 헤어지는 기분이 되었다. 선생님께서도 우리들의 등을 토닥토닥 해주셨다 ㅠㅠ
# 다인아! 이 아줌마가 너 대신 방학식 하고 왔어. 분향소에 갔더니 다인이 영정앞에 아무 편지도, 선물도 없어서 빈손으로 간 걸 너무너무 후회했단다. 다음에 갈땐 꼭 정성껏 쓴 편지와 선물 준비할게. 아무 걱정없는 그곳에서 편안하게 지내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