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의 그림자 - 2010년 제43회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작 민음 경장편 4
황정은 지음 / 민음사 / 2010년 6월
평점 :
절판


항상 그렇듯이

머리로만 얘기하는게 아니라 직접 행동으로 보여주는 사람들을 보면 나는 부끄럽고 미안해져서 입을 다물게 된다. 어쨌든 여러가지 이유로 나는 직접 거리에 나서지 못하고 그들과 어깨를 겯지 못하고 찬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를 견디지도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당함에 당당히 온몸으로 항의하는 사람들을 보며 나는 한없이 부끄럽고, 그들을 폭력 세력으로 규정하고 테러에 가까운 진압작전을 펼치고도 한마디 사과가 없는 공권력에 치를 떤다.

지난 주말, 파리에서 서울에서 벌어진 끔찍한 테러를 보며 나는 거의 책을 읽을 수가 없었다. 이런 시국에 책을 손에 쥔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되는 것 같았고 책을 펼친다 한들 읽히지가 않았다. 그래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어서 이 책 저 책 뒤적여보다가 이 소설에 정착했다. 작가 황정은은 그만의 시선으로 사회의 약자들을 따뜻하게 보듬어주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신형철 평론가가 말한 대로 이 소설을 몇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다.

도심 한복판에 사십 년 된 전자상가가 있다. 상가가 철거된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그곳을 터전 삼아 살아온 사람들의 삶의 내력이 하나씩 소개된다. 그 와중에 이 소설은 시스템의 비정함과 등장인물들의 선량함을 대조하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과연 살 만한 곳인지를 묻는다.

 

 

사랑스러운 주인공 은교와 무재가 대화를 한다.

 

은교씨는 슬럼이 무슨 뜻인지 아나요?

......가난하다는 뜻인가요?

나는 사전을 찾아봤어요.

뭐라고 되어 있던가요.

도시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구역. 하며 무재 씨가 나를 바라보았다.

이 부근이 슬럼이래요.

누가요?

신문이며, 사람들이.

슬럼?

좀 이상하죠.

이상해요.(112쪽)

 

그들은 자기들이 사는 곳, 자신의 삶이 오롯이 투영되어 추억으로 새겨진 그 공간을 슬럼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무재의 아버지는 가난했지만 그곳에서 장사를 하며 아들이 오면 맛난 순대를 사주기도 했고, 숫기 없는 아버지가 호객행위를 하는 것이 서러운 아들은 아버지를 보며 울기도 하고, 아버지는 이유도 말하지 않고 우는 아들을 혼내고, 아들은 그런 속을 모르고 혼을 내는 아버지가 서러워 또 울던 그런 기억들이 있는 그들만의 특별한 공간.

 

 

 

나는 이 부근을 그런 심정과는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가 없는데 슬럼이라느니, 라는 말을 들으니 뭔가 억울해지는 거예요. 차라리 그냥 가난하다면 모를까. 슬럼이라고 부르는 것이 마땅치 않은 듯해서 생각을 하다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라고 무재씨는 말했다.

언제고 밀어 버려야 할 구역인데, 누군가의 생계나 생활계,라고 말하면 생각할 것이 너무 많아지니까, 슬럼, 이라고 간단하게 정리해 버리는 것이 아닐까.

그런 걸까요.

슬럼, 하고.

슬럼.

슬럼.

슬럼.

이상하죠.

이상하기도 하고.

조금 무섭기도 하고, 라고 말해두고서 한동안 말하지 않았다.(115쪽)

 

 

 

 

 

일반화된 언어의 폭력성, 감정을 배제시키는 단어들에 우리는 얼마나 무감각하게 대응하고 있는지를 작가만의 순수한 말투로 조용히 말한다. 그 조용한 말투가 가슴에 와 닿았을 때는 더 울림이 크다. 나는 시내 어느 곳이 재개발 되어 깨끗한 면모로 다시 태어나면 그 현대적 면모에 감탄할 줄만 알았지 그곳에 있는 아픔을 하나하나 개별적으로 생각해보지 못했다. 그게 얼마나 폭력적인 일이었던가.  아무 생각없이 자행되던 폭력! 그 폭력에 대해 은교와 무재는 큰소리로 비난하지도 않는다. 조금은 무기력하지만 단호하고도 조용하게 또박또박 되새기며 이야기한다. 이게 바로 내가 황정은의 소설, 특히 그 중에도 그만의 독특한 대화체를 사랑하는 이유다.

 

이렇게 대화하는 착한 사람들, 이 순수하고 조용하고 가난하며 배려심 많고 애써 살아가는 사람들이 다치지 않는 세상이면 좋겠다. 그들이 자신의 그림자에게마저 져서 쓰러져버리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다. 그림자에게 딸려가지 않도록 힘들땐 "노래할까요" 라고 말해주면서 서로를 아껴주는 모습을 오래 보고 싶다.

 

파리의 시민들이 예상보다 훨씬 빨리 일상으로 돌아가고 있다고 한다. 테러에 겁을 먹고 허둥지둥하는 모습을 원하는 테러리스트들에게 '너희들의 테러에 우리는 겁먹지 않아. 우리는 여전히 커피를 마실거고, 책을 읽을거고, 일상을 누릴거야! ' 하는 걸 보여주겠다고 한다. 총에 맞서서 꽃이 이기는 걸 보여주겠다고 한다.

나도 보여주고 싶다.

마음에 안드는 것들 다 쓸어버리고 싶은 세력들에게.

우리는 지지 않고 계속 함께 살아갈거라고. 하고 싶은 말을 할거고, 원하는 걸 얻기 위해 싸우기도 할거고, 길을 잃으면 함께 길을 찾고 힘들땐 서로 노래를 불러 줄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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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19 14: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1-19 15: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인디언밥 2015-11-19 16: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로라님 리뷰도 따뜻해요 ^^

살리미 2015-11-19 17:21   좋아요 1 | URL
이 책에 나오는 은교, 무재, 유곤, 여씨 아저씨, 오무사 할아버지.... 모든 인물들이 다 따뜻한 사람들이라서 그런가봐요^^

2015-12-10 21: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2-10 21:30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