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의 중요성을 깨달은 달팽이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엄지영 옮김 / 열린책들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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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담장으로 둘러싸인 마당에 맛있는 옥수수가 자란다. 그 마당을 세상의 전부로 알고 사는 거위들에게 어느 날 철학자 거위가 나타나, 더는 마당에 갇혀 있지 말고, 하늘을 나는 거위 본연의 모습을 되찾으라 말한다. 거위들은 몇 달간 철학자 거위의 말을 분석하고 비평하지만 끝내 아무도 날지 않는다. 왜? 옥수수는 너무 맛있고, 앞마당은 안전하니까. 키에르케고르의 우화에 나오는 이 거위들은 미나리 마을의 달팽이들과 닮았다. 




주인공 달팽이는 자신은 왜 이름이 없는지, 왜 다른 동물보다 느린지 알고 싶다. 그러나 그런 말을 꺼내면, 다른 달팽이들로부터 비웃음만 살 뿐이다. 달팽이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마을을 떠나 수리부엉이와 거북이 등 다른 동물들에게 지혜와 조언을 구한다. 그 과정에서 '반항아'라는 이름을 얻고, 다른 동물들과 달리 왜 자신이 유독 느린지 그 이유를 알게 된다.



달팽이에게 '반항아'라고 이름을 지어준 건 유독 말이 느리던 거북이다. 거북이는 반항아라는 이름은 두려움이 없는 자가 아니라 두려움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에게 붙이는 이름이라고 했다. 모두가 서두르며 더 많은 것을 갖기 위해 애를 쓸 때도 '그렇게 빨리하려고 서두를 필요가 있을까?, 꼭 많은 것을 가져야 행복해지는 걸까?'라며 듣기 거북한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 반항아라는 거북이의 말에 달팽이는 용기를 얻는다.  



프랑스 고등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치는 크리스토프 라무르 (Christophe Lamoure)는 자신의 철학 에세이 『걷기의 철학』에서 '우리가 눈여겨보지 않던 사물의 시시콜콜하고 섬세한 부분이 느린 움직임ㅡ느림은 움직임을 함축하므로ㅡ을 통해 드러난다.'고 했다. 달팽이가 느린 이유도 마찬가지다. 달팽이가 남들이 눈여겨보지 않는 시시콜콜하고 섬세한 부분까지도 놓치지 않는 건 그가 다른 동물보다 느리기 때문이다. '느림'은 약점이 아니라 강점이 되기도 하고, 악덕이 아니라 미덕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달팽이는 거북이 머리 뒤에 자리를 잡자마자 어디로 가는 건지 물었어. 그랬더니 거북이는 대뜸 질문이 잘못됐다고 하면서, 그 대신 <어디서 오는 길인지> 물어야 한다는 거야.


동화책은 대체로 두세 번 읽는다. 다시 읽을 때 처음에 미처 발견하지 못한 부분이 보여서다. 초반에 수리부엉이를 만나러 너도밤나무를 오르던 달팽이의 힘겨운 움직임도 두 번째 읽을 때 보였다. 다람쥐와 거미줄을 피해 가까스로 나무 꼭대기에 도착하니 별빛 가득하던 밤하늘은 온데간데없고 동이 텄다. 달팽이는 나무를 오르기 위해 밤을 꼬박 새우다시피 했다. 심지어 그때는 길고 긴 여정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도 전이었다. 기존의 체제나 관습에 의문을 제기한다는 건 도처에서 목숨을 위협해오는 다람쥐와 거미줄을 피해 밤을 꼬박 새우고 나무 꼭대기를 오르는 달팽이의 처지와 같지 않을까. 




루이스 세풀베다의 <느림의 중요성을 깨달은 달팽이>를 읽고 든 몇 가지 생각


"원래 그래"라는 말에 담긴 무관심 

자신에 대해 궁금한 게 많은 달팽이를 다른 달팽이들은 시종일관 무시하고, 윽박지르고, "원래 그래"라는 말로 질문을 원천봉쇄한다. 나에게 '가장 듣기 싫은 말 10가지'를 고르라고 하면, 단연 상위에 올릴 만큼 나는 "원래 그래"라는 말을 참 싫어한다. 듣기도 싫고, 잘 쓰지도 않는다. 그런데 이 말만큼 자주 들리는 말도 없다. 특히 화자와 청자의 권력이 같지 않을 때 이 말은 치명적이다. 


  

내가 받은 도움을 다른 이에게 돌려주며 함께 살기

<민들레 나라>를 떠난 달팽이는 부엉이와 거북이에게 도움을 받고, 개미와 딱정벌레, 두더지에게 도움을 준다. 달팽이의 선행은 자신이 누군가에게 받은 도움을 또 다른 이에게 돌려주는 'Pay Forward' 방식이다. 자신이 속한 조직이나 단체에서 소외당하던 달팽이가 다른 집단과 건설적이고 생산적인 관계를 맺고, 긍정적 가치를 실현하는 모습은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한다. 달팽이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건, 어쨌든 달팽이와 똑같이 생긴 '(민들레 나라의) 다른 달팽이'들일 텐데, 왜 그들은 그토록 못마땅해하기만 하고, 밀어내려고만 했을까. 



나이 많은 달팽이들은 왜 안 보일까?

루이스 세풀베다는 '나이 많은 달팽이들'을 못마땅하게 묘사한다. 그들은 문제를 제기하는 젊은 달팽이의 의견을 제대로 듣지도 않고 무조건 거부한다. 그들은 '이제껏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에 거부감이 크고, 현 체제를 유지하고자 하는 욕구가 크다. 기존의 <민들레 나라>를 떠나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으러 떠난 달팽이와 무리가 결국 최종 목적지에 도달했을 때, 나이 든 달팽이가 단 한 마리도 없었던 사실은 충격적이기도 하고 비통하다. 



고통은 희망의 자취일까?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는 과정은 고되다. 몸도 힘들지만, 매 순간 포기하고 싶을 만큼 정신적으로도 힘이 많이 든다. 달팽이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그들 몸에서 흘러나온 끈적끈적한 흰 액체가 남았다. 그리고 그 흰 자국 위로 민들레 이파리가 새로 돋아났다. 고통은 분명 아프다. 고통이라는 게 대체 단발성이 아닌 데다 더러는 연달아 찾아와 영 맥을 못 추게 한다. 그런데도 일부에서 끊임없이 고통이 아름답다거나 되려 기회가 된다고 말하는 건, 그 허옇고 끈적끈적한 액체가 묻은 자리에서 민들레 이파리가 자라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힘이 든 달팽이들이 그 길 위에 허연 액체를 남기지 않았더라면, 민들레 이파리는 그곳에 자라지 않았을 것이다. 고통을 아름답다고 해야 할지 추하다고 해야 할지 나는 아직 모른다. 그러나 어떻게든 견뎌내기만 하면 훗날 '역시 그때 견디길 잘 했어'라고 생각할 때가 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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