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저녁 7시에 부산 남천동에 위치한 인디고 지하 소강당에서 나는 고전 인문강의를 들었다. 강의자는 부산대학교 한문학과 정출헌 교수님으로 기존에 나는 국문학 쪽의 교수 강의를 들어본 적은 있으나 한문학에서 들어본 적이 없다. 처음 느낌을 말하자면 국문학과 출신 교수님은(전공이 판소리 무속서가) 다소 고전에 대해 상당히 텍스트적으로 분석한다면 한문학과 교수님은 고전을 분석하기 보다는 이야기의 외적인 가치를 중심으로 전개한 듯 하였다.
왜냐하면 예전에 “고전, 대중문화를 엿보다”라는 서적에서 보인 젊은 국문학과 교수들의 이야기로 통해 어느 정도 한국 고전에 대해 생각을 하고 갔었기 때문이다. 역시 그런 면들이 있는지 한국 고전에서 눈에 띄는 것은 남성중심 즉 유교적인 문화에 대한 내용이다. 한국은 유교도 주자의 성리학이 도입되어 조선 정치사상이 되었는데, 그런 부분이 강의 내용에 포함되어 있던 것으로 보아 한국에서는 유교의 영향이 매우 컸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유교의 핵심을 뭐라 하기는 그러나 적어도 나는 충효(忠孝)가 유교의 근간이 되는 사상이고, 거기에 인의예지(仁義禮智)가 달라붙어 하나의 철학체계를 이루는 것 정도만 안다. 어째든 오늘 강의를 들으면서 머리에서 확실하게 남는 것은 김만중의 구운몽이다. 구운몽은 1명의 남성과 8명의 여인이 서로를 탐하다가 깨달음을 얻고 이상적인 존재로 된다는 이야기인데, 이것이 애니메이션 오타쿠 입장에서 보면 가장 완벽한 미소녀연애 시뮬레이션 게임 내지 애니메이션이란 것이다.
애니메이션은 단순히 생각하기 보다는 인간의 사고나 상상력이 하나의 이미지로 변환되어 형상화된 것이다. 그런 만큼 인간 깊숙이 잠든 내부 잠재의식까지 들어낼 수 있어 인간의 의식구조를 아는데 있어서 애니메이션만큼 좋은 것이 없다. 그런데 흔히 애니메이션을 생각하면 머리 크고, 비인간적인 몸매를 가진 미소녀가 나와 1명의 남자에 다수 붙어 모두 만족하는 이른바 하렘이 보이는 것이 미소녀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이나 애니메이션이다. 물론 그 이름을 줄여 미연시라고 하나, 적어도 미연시라는 개념은 조선시대 사대부에게도 존재했다.
김만중은 완벽한 자신만의 세계에서 하렘국가를 만든 존재인 것이다. 그래서 한국 문학을 남근적인 부분 즉 남성이 사회를 지배하는 문화 이데올로기 면이 매우 강하다. 물론 모두 나쁜 것은 아니나 그것을 역으로 돌아보면 교수님이 말했듯이 불합리한 사회구조를 합리화하기 위한 하나의 장치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그런 부분은 16세기 이후로 점점 두각을 나타내는데, 이른바 열녀(烈女) 만들기라는 교조적인 사회현상은 임진왜란이라는 무능력한 조선정부의 하나의 강압적인 방법이었다. 이것은 마치 마빈 해리스(미국 콜럼비아 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의 “문화의 수수께끼”처럼 유럽의 공포로 몰아넣은 마녀사냥과 비슷한 형태이었다.
유럽의 종교와 정치계가 무능하고 부패하여 국민들이 불만을 제기하자 이른바 마녀사냥으로 자신의 과오를 오히려 국민 스스로 잡아내게 하는 이른바 “한국식 공리주의(일정한 개인을 희생하여 대다수나 단체를 유지하는 방법)”로 공포정치를 발휘한 것이다. 단지 서양은 거짓으로 마녀로 만들었다면 한국은 억지로 열녀를 만든 것이다. 열녀가 되면 그 집안은 열녀문이 세워지고 국가에서 상을 받으니 말이다.
이런 문제가 발생한 것 역시 전쟁이 아닌가 싶다. 전쟁에 많은 남자들이 참가하고 죽자 집에 남은 여자들은 재혼도 불가능하고, 남편의 부재로 경제적으로 궁핍해지니 시집에서 억지로 죽이기 바라는 것이 아닌가? 한국의 대부분 고전이나 문학을 보면 누군가의 희생을 강요하는 형태가 매우 뚜렷하게 보인다. 강의 첫 부분 효심이 지극한 심청이는 아주 훌륭하고 착한 인물이다.
하지만 그녀를 바닷물에 몰아넣게 해버린 시주받은 스님과 뱃사람들은 이른바 소수약자를 희생하여 자기들의 이익인 종교재단의 재산축적, 재앙방지를 위한 희생양을 정당화시킨 것이다. 또한 효녀지은에서는 딸이 늙은 노모를 위해 품삯을 하거나 동냥을 해서 도저히 생계가 이어갈 수 없어 몸을 판다는 이야기로 들은 것 같다. 그런데 몸을 판다는 것으로 어머니와 생계를 유지해도 그 자체가 효로 인정받는 것은 일종의 남성 지배 이데올로기가 있다는 의미도 된다.
물론 희생양은 여성만이 아니다. 주몽신화 이후 유리왕자이야기는 이른바 후레자식이라는 애비 없는 자식의 설움이 당시 우리 사회에 널리 퍼진 사실이다. 아들과 아버지는 가까이 있으면 서로 피곤하나, 멀리 떨어져 있거나 아버지가 없으면 아들은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아버지의 권위는 막대한 것이 분명하다. 유리왕이 등극 후에 아들인 해명태자가 자신의 말을 듣지 않아 아버지 유리왕은 아들에게 자결할 것을 명령한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사과를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명령을 받아 자결을 한다. 한국에서는 문화적으로 남자들이 이른바 허울 좋은 체면 내지 명예에 의해 목숨을 잃는 경우가 있다는 점이다. 예전에 영화관에서 천둥의 신 토르를 봤다. 토르는 북유럽 신화에서 오딘의 아들로 그는 너무 자신의 혈기를 과시하다가 아버지에게 지구로 내침을 당한다. 처음에는 아버지에게 반항하였으나, 결국 그는 아버지의 권위 없이는 자기는 무력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 깨달음과 동시에 그는 아버지로부터 권위를 받는다. 다소 해명태자의 허무한 죽음은 안타깝지만, 적어도 한국에서는 그리스신화 오이디푸스왕 이야기처럼 살부(殺父)의식은 보이지 않는다. 아들이 아버지를 대신하여 희생되는 점이다. 그런 점은 무속신화 중의 하나인 이공본풀이에서 등장한다. 아버지 원강아비는 서천꽃대감을 역임하기 위해 집을 떠나나 자신의 아내인 원강아미와 아들인 할락궁이를 내버려두고 가야 했다.
아버지는 입신양명하여 큰일과 업적을 받아 하고 있었으나 아내는 남의 집 종살이하다가 살해당하고, 아들은 이를 피해 서천으로 도주한다. 물론 아버지의 뒤를 이어 서천꽃대감을 하고 어머니를 구했으나, 이른바 여성인 어머니와 남성인 아들의 희생은 불가결한 요소 중의 하나였다. 한국 고전이나 문학을 보면 바로 그런 가부장적인 제도에서 희생이라는 극적플롯을 필수적으로 지내야 하나의 과업을 이루고 서사로서 결말을 유도할 수 있었다.
그래도 한국 고전과 문학에서 아버지의 그늘이 컸던 모양이다. 형제관계에서 연안 박지원 선생의 시조를 보니 더욱 그런 느낌이 들었다.
우리 형님 얼굴과 수염 누구를 닮았는가.
돌아가신 아버님 생각날 때마다 우리 형님 쳐다봤지.
이제 형님 그리우면 어디에서 보아야 할까.
두건 쓰고 도포 입고 나가 냇물에 비친 나를 보아야겠지
이 시조에서 아들이 아버지 없음에 슬퍼하는 연암의 비극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연암이 아버지 없는 이른바 후레자식에서 아버지를 볼 수 있던 것은 오로지 형님이었다. 그러나 이제 형님도 없으니 그 슬픔을 자신에게서 찾던 것이다. 두건과 도포는 일종의 남자가 집안어른이 되었음을 알리는 하나의 상징이다. 연암이 두건과 도포를 착용하기 전에는 그는 아직 어른이기를 거부했으나, 이 상징적인 의상을 입음으로 어른이 된 것이다.
어째 보면 한국의 남성들이 진정 어른이 되는 순간은 아버지와 혹은 아버지를 닮은 그 누군가에서 벗어날 때 비로소 진정 어른이 되지 않나 싶다. 가부장에서 다음 가부장으로 이동하려면 그 앞의 인물이 소멸할 때 가능하기 때문인 듯하다. 이런 가부장 제도에서 한국 남성들은 체면이나 위엄을 지키기 위해 자기 자신을 희생하였다. 물론 여성 역시 제도권 내에서 약자로 살아갔으나 남성들은 그런 문화적 위치에서 자기를 내보일 수가 없었다.
그런 점에서 부부의 사랑은 조금 마음 깊이 다가온 듯하다. 같이 살아온 남편이 세상을 하직하자 눈물을 자아내게 할 만한 길고 긴 편지와 아내의 죽음으로 자신의 인생을 달관한 한 남자의 이야기는 정말 신기했다. 남은 인생이 30년이나 앞으로 같이 보낼 날이 천백 년이 되지 않겠냐는 말에 불행 속에서 앞으로 같이 할 수 있다는 믿음은 생과 사를 동시에 보는 듯한 느낌이다. 그것은 마치 니체가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모든 것을 극복한 영원회귀하려는 초인의 자세와 같았다.
하지만 모든 부부관계가 좋은 것은 아니었다. 사씨남정기에서는 당시 조선시대의 사대부의 관념을 알 수 있기 좋은 지표였다. 처와 첩이라는 존재로 통해 무능력한 남성과 적자만 낳기 위해 씨받이로 살 수 없었던 여자의 이야기가 나온다. 물론 당시로선 본처가 옳겠지만, 지금의 시대에서 보자면 첩의 입장이 가련하다. 자기가 살기 위해 자기 자식마저 죽일 수밖에 없던 남씨는 악독한 모성애를 보이나, 이것은 개인의 인성이나 성품보다는 사회구조가 만들어낸 일련의 왜곡현상인 것이다.
어째든 최근 한국의 문화콘텐츠의 일환으로 고전이나 문학, 무속서사가 많이 애용된다. 2010년 12월에 발매된 “고스트메신저”이라는 애니메이션은 한국 무속서사에서 나오는 인물들을 인용하여 다시 현대적으로 살려낸 하나의 신화라고 볼 수 있다. 김용석 교수의 서사철학에서 7가지 서사 중에서 제1의 서사는 신화라고 했다. 서사는 즉 문학이고, 문학은 우리에게 하나의 이야기를 제공하여 교육, 오락 등과 같은 역할을 한다. 다시 새롭게 조명되는 한국 고전과 문학, 기존 서구사회 문화에 얽매인 한국사회로서 이런 내용을 접해보는 것은 좋은 기회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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