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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브데트 씨와 아들들 1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95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12년 9월
평점 :
터키인으로는 최초로 노벨 문학상( 2006년)을 수상한 오르한 파묵! 그의 첫 소설이라는 『제브데트 씨와 아들들』1권을 읽었습니다. 민음사에서 오르한 파묵의 하버드대 강연록인 『소설과 소설가』와 이 책이 거의 동시에 출간되었는데, 어떤 책을 먼저 읽을까 생각하다가 아무래도 첫 작품을 알아야 그의 작품세계에 좀 더 쉽게 접근할 듯 하여 이 책을 손에 잡았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파묵 작품의 특성인 탄탄하고 긴 호흡의 문학성이 그대로 드러나는 책이군요. 이렇게 적고 보니 긴 호흡의 의미를 풀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파묵의 책 속에선 시간이 아주 천천히, 서서히 흐르지요. 다르게 표현하면 지루하고 재미없다고도 할 수 있겠는데, 사실은 이것이 바로 파묵 소설의 묘미가 아닐까 합니다. 느리디 느린 진중함으로 인간의 정체성을 담담하게 통찰해 나가는데 이게 묘하게 독자를 흔들어 놓습니다. 일종의 내러티브 형식(narrative style)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꼭 뭔가 터질 듯 터질 듯 하면서도 끝까지 절제하는 치밀함에 허탈해 하는 독자가 있기도 하고 동화되는 독자도 있는 거지요.
출판사에서는 이 작품을 두고 "파묵 문학 세계의 시발점을 알려 주는 신호탄 같은 작품"이라고 하는군요. 틀린 말은 아닙니다. 사실 이 이후의 작품인 <고요한 집>이나 <하얀 성>, <새로운 인생>, <순수 박물관>에서도 같은 얼개로 짜나간다는 느낌입니다. '젊은 날의 열정과 갈등'이 전반에 깔리면 '새로운 인생'과 '현실의 장벽'이 화자의 심연에 파문을 일으키고, 곧 이어 <연민과 관조>로 자신을 들여다보게 하지요. 그러고 보면 파묵의 초기작품에는 할아버지, 아들, 손자로 이어지는 3대의 가족연대기를 통해 시대 정서의 변화를 보여 줄려는 경향이 있었군요. 이 책 보다 먼저 우리에게 소개된 <고요한 집>도 이런 구조였지요. 소설가들이 처음엔 자신의 경험을 모티브로 삼아 글을 쓰는 경향이 있다는데, 파묵도 자신의 집안 이야기를 차용하여 터키의 전통적 가족환경과 고뇌하는 젊음, 그리고 새로운 인생을 찾아가는 플롯을 보여주는군요. 어쨌든 <고요한 집>과 같은 선상에 있는 작품이라 생각했는데, 책 뒤표지를 보니 "나의 모든 소설은 이전에 발표한 소설 속에서 태어난다. 『제브데트 씨와 아들들』에 나오는 젊은이들에게서 『고요한 집』이 탄생했고, 『고요한 집』에 나오는 파룩에게서 『하얀 성』이 나왔다."고 소개하고 있네요. 그러고 보면 제가 잘못 판단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소설은 1부 프롤로그 - 2부 - 3부 에필로그로 비교적 간단한 구성이며, 각각 30여 년의 격차를 두고 풀어나갑니다. 1권에서는 자수성가한 상인 제브데트 씨가 결혼하기까지의 일상(1부 프롤로그)과, 그의 두 아들(오스만, 레피크)과 아들의 친구들, 특히 둘째아들 레피크 친구들인 외메르와 무히틴의 이상과 방황을 그리고 있지요(2부 총 62장 중 31장). 현대판 파티흐(Fatih 터키어로 정복자) 정도는 되어야한다는 야망을 가진 외메르, 아버지의 사업을 형과 함께 이어받지만 자신의 삶에 대해 방황하고 변화를 모색하는 레피크, 좋은 시인이 되려고 노력하지만 의지와 강단이 약한 무히틴이라는 큰 캐릭터가 중심주제가 되고, 그 주변에 여러 군상들이 별개의 내러티브인 듯 하면서도 어우러져 큰 강물처럼 시간이 흐르는군요.
1900년대 초반과 1930대 중반의 터키(오스만 튀르크)가 시대 배경인데, 이때가 사실 터키의 격변기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미리 터키의 역사를 한번 알아보는 것도 좋을 꺼라 생각해 봅니다. 현재의 터키는 한때 서아시아 전체를 평정한 오스만 튀르크제국의 후손이며 이슬람권국가의 종주국이었지요. 자부심이 대단한 나라입니다. 하지만 점점 쇠약해져 1차 세계대전(1910) 때 독일과 손을 잡았다가 결국 1922년 오스만 왕조는 혁명으로 물러나고 터키공화국이 생겨나게 되지요. 소설은 바로 이런 혼란기를 관통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젊은이들은 삶의 방향에 대해 고민할 수밖에 없겠지요. 소설의 아주 좋은 무대가 되는 셈이지요. (기본적 내용은 출판사의 리뷰에 워낙 잘 요약되어 있으므로 그걸 참고하시면 될 겁니다.)
푸아트 씨는 양 손을 눈 옆으로 가져가 눈가리개처럼 만들었다.
"자네 형제는 이 사이로 보이는 것 말고 다른 건 못 보고 있어. 인생이 이런 건가? 인생이 뭔가? 살아가고 지켜보고 그렇게 보내는 것……. 인생은 형형색색이야! 그래, 자네 생각에는 뭔가?" (76쪽)
인간에게는 두 개의 삶과 두 개의 영혼이 있어야 해. 하나의 삶으로는 사업을 하고, 다른 삶으로는 즐겨야 해! 이 둘을 섞지 않고 살아야 해! 이 둘은 서로를 서로 도와줘야 하고, 서로 걸림돌이 돼서는 안돼. 그래, 그래야만 해! 내 인생도 이렇게 돼야 해! 나는 살아 갈거야! (151쪽)
아직 읽지 않은 2권의 목차를 보니 2부의 나머지 부분과 절반과 1970년대의 손자 이야기가 전개될 모양입니다. 소설이란 게 삶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 줌으로써 경험해 보지 못한 세계를 알 수 있게 해 준다지요. "인생이 뭐냐고? 정말 쓸데없는 질문이야!"는 제브데트 씨와, "난 평범한 삶을 원하지 않아!"라며 방황하는 그의 아들 레피크. 이들의 사고(思考)와 도덕적 가치관은 우리네 세대의 갈등과 그렇게 다른 모습이 아니군요. 성장이라는 것이 "부모로부터 벗어나는 과정"이라고 했나요. 미래에 대한 불안과 갈등을 거쳐 온 기성세대에겐 아련함 같은 걸 주고, 청년들에게는 자신의 삶을 유추할 수 있는 책이라 여겨집니다. 이제 2권을 읽어야 하는데, 일단 한 템포 쉬렵니다. 연속적으로 읽기엔 음미하면서 읽어야 할 긴 호흡의 소설이구, 그렇게 긴장감이 도는 책이 아니라서 생각 좀 하고나서 2권을 잡으렵니다.
레피크는 눈에 빛이 익숙해지도록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거기에, 모든 것을 감싸는 깨끗하고 넓고 반짝이는 하늘, 푸르고 잠잠하고 깊은 하늘이 있었다. '난 어쩌면 저것 때문에 여기 왔는지도 몰라. 산산이 부서져서 내 머릿속에 흐트러져 있는 뭔가를 저 빛, 저 하늘이 합치시켜줘서 내가 편안하고 평온하게 느끼는 것 같아. 평온함!' (459쪽)
…… 중략……
"이 빛, 이 움직임! 그런데 나는 뭘 하고 있지?"
레피크는 중얼거렸다. 그의 의식은 강건했고, 모든게 제자리를 찾아 평온했다. 하지만 깊은 곳에서, 더 깊은 곳에서 뭔가 꿈틀거렸고, 여기서 벗어나려면 다른 것, 어쩌면 절대 찾을 수 없는 어떤 것이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다.(46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