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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 스완네 집 쪽으로 1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희영 옮김 / 민음사 / 2012년 9월
평점 :
읽을수록 대단한 책이다. 어쩌면 이렇게 글을 섬세하게 풀어낼 수 있는 걸까? 감탄하고 또 감탄한다. 학부 때 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_ 스완네 집 쪽으로>를 읽으려고 한 적이 있었다. 그 때는 그냥 어렵고 재미없고 지루하기만 했는데 이제는 조금 이 책이 보인다. 지금도 읽다가 흐름을 놓쳐 몇 번이나 앞으로 되돌아와서 다시 읽을 수밖에 없지만, 적어도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의 이 작품을 두고 왜 그렇게 찬사를 보내는지 정도는 알겠다. 기억 속에 남아있는 추억의 편린들을 매개로 하여 인간의 행동 하나하나에서 물결처럼 일어나는 내면의 흐름을 놓치지 않고 잡아챈 후, 해체의 미학을 한껏 보여준 뒤 다시 긴 호흡의 글로 조합해 내는 작가의 필력! 어떤 강렬한 인상을 객관적 요소로 환원하거나, 관찰력을 극대화하여 보이는 것에 대한 개념을 추출해 내는 능력!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는 인식들이 어떻게 의식화 되어 가는지, 그 순간순간의 과정이 그대로 유려하고 경건한 문장으로 정제되어 나타날 때, 이런 걸 '소설이 도달할 수 있는 극한'이라고 하는가 보다. T.S. 엘리엇이 이 작품과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를 읽지 않고는 문학을 논할 수 없다고 한 이면엔, 인간의 의식이란 것이 단편화되거나 스토리화 된 획일성으로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 흐름 그 자체에 동승하여 의식의 그 무한한 영역을 장대하게 작품에 담았기 때문이리라. 이런 걸 '의식의 흐름(Stream of consciousness)'기법이라고 했던가.
이 책은 화자인 '나(이름도 나이도 밝히지 않고 있으나 마르셀 자신으로 파악된다)'가 잠에서 깨어나는 시점의, 허구와 실재가 혼재되는 무의식의 상념으로 시작된다. 우리도 많이 경험하는, 한 밤 중 깨었다가 다시 잠이 드는, 비몽사몽의 어렴풋한 생각들처럼, 현재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라 있었던 과거의 삶을 회상하는 방식으로 글을 풀어 나간다. 우리가 몸을 뒤척일 때 마다 생각이 바뀌는 것처럼 화자도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런저런 생각들을 그대로 흐르게 하면서 시공간을 뛰어넘는다. 그럼으로써 "오랜 시간 불면에 시달리며 잃어버렸던 시간을 풍요롭고 창조적인 시간으로 바꾸어"내고 있다. 하지만 유심히 들여다보면 이 책은 뚜렷하게 이것이 줄거리라고 할 만한 상황이 없다. 그냥 생각의 흐름일 뿐이다. 바로 이 점에서 이 책의 한 부분이 매우 유명하다. 어느 겨울 날, 추워하는 걸 본 화자의 어머니는 홍차와 '프티트 마들렌'이라는 과자를 권하는데, 마들렌 조각이 녹아든 홍차 한 모금이 입천장에 닿는 순간 어떤 감미로운 기쁨이 화자를 사로잡으며 잊고 있었던 추억의 장소들이 떠오른다. "우리 집 정원의 모든 꽃들과 스완 씨 정원의 꽃들이, 비본 냇가의 수련과 선량한 사람들이, 그들의 작은 집들과 성당이, 온 콩브레와 근방이, 마을과 정원이, 이 모든 것이 형태와 견고함을 갖추며 내 찻잔에서 솟아 나왔다(91쪽)." 이렇게 화자는, 이제는 희미해져 바래져버린 자신의 과거를 찾아 시간을 거슬러 오르는 긴 여행을 떠나게 된다.
내 방은 거의 닫혀 있는 덧문 너머로 스며드는 오후 햇살에 맞서 투명하고도 부서지기 쉬운 서늘함을 파르르 떨며 지켜주고 있었다. 대낮의 반사광이 그 노란 날개를 스며들게 할 방법을 찾다가, 나비가 꽃 위에 앉듯 덧문 문살과 유리창 사이 구석진 곳에서 꼼짝하지 않았다.(151쪽)
뭔가 유리창에 부딪치는 것 같은 작은 소리가 나더니, 다음에는 위쪽 창문에서 모래 알갱이를 뿌리듯 가볍고 넓게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고, 이어 그 소리가 퍼지고 고르게 되고 리듬을 타고 액체가 되고 울리고 수를 셀 수 없는 보편적인 음악이 되었다. 비였다(182쪽).
화자가 어린 시절을 보낸 콩브레 주변에는 산책을 하려면 '길'이 두 개 있었는데, 하나는 스완 씨네 소유지를 지나가야 했기 때문에 스완네 집 쪽이라 불리기도 하였고, 다른 길은 귀족 게르망트 가의 별장으로 통했기에 게르망트 쪽이라고 하였다. 화자의 아버지 표현을 빌리면 스완네 쪽 길은 자신이 보아 온 것 중 가장 아름다운 평원의 풍경이며, 게르망트 쪽은 전형적인 냇가 풍경이라고 말했다. 이 두 길을 서로 다른 두 실체로 간주하며 오로지 정신적인 창조물에만 속하는 일관성과 통일성을 부여한다(238쪽). 이렇게 이 두 길은 이 책을 구성하는 커다란 두 기둥이 되어 1권의 후반부 시공간을 긴 호흡으로 메우고 있다.(어린 화자는 이 두 산책로가 분리되었다고 믿었으나, 실은 서로 통해 있었다는 것이 나중에 밝혀진다).
아 참, 이즈음에서 화자는 그의 첫 사랑 소녀, 붉은 빛 도는 금발머리 질베르트를 만나는 순간을 풀어내고 있다. 오랫동안 그녀를 생각할 때면 그녀의 새까만 눈동자에 대한 추억은, 선명한 하늘빛 광채로 떠올랐다고 한다. 화자가 그녀를 처음 만나던 그 순간의 시선을 따라가 보자. 첫 번째 시선은 '단순한 눈의 대변자가 아닌, 모든 불안하고도 넋 나간 감각들이 내미는 창문을 통해 자기가 바라보는 육체와, 그 육체와 더불어 영혼을 만지거나 사로잡아 함께 데려가려는 시선이었다. 두 번째 시선은 '할아버지와 아버지께서 곧 소녀를 목격하고는 그녀와 멀리 떼어 놓으려고 나보고 앞장서서 달려가라고 할까 봐 두려운 나머지, 그녀로 하여금 강제로 내개 주의를 기울이고 나를 알아보도록 하려는 무의식적으로 애원하는' 시선이었다(249쪽). 대단하다. 이런 시절! 어떤 모습이 단지 우리 시선에만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깊은 지각을 요하면서 우리 존재 전부를 사로잡아버린 만남이 한번 쯤 있으리라. 그래서 화자는 이런 마음을 어떻게 표현하고 싶었을까? 그는 오던 길을 되돌아가 어깨를 으쓱하며 "넌 정말 추하고 이상하게 생겼구나. 역겨워."라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단다. 어린 화자의 반어적 마음표현이 그저 풋풋하기만 하다.^^
프루스트가 의도했던 의식의 흐름, 즉 연상 작용으로 풀어내는 문장의 아름다움과 문맥의 섬세함은 원서를 읽어야만 제격이겠지만, 번역된 이 책의 내용만으로도 충분히 놀랍고도 힘들게(?) 그 느낌을 공유할 수 있다. 특히 이 민음사 판에는 다른 번역서와 다른 특징이 있는데, 번역자 김희영 교수의 각주가 그것이다. 보통 이런 주석은 불필요 하거나 일반적 사전 수준에서 그치나, 이 주석은 난해한 프루스트를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이끌고 있다. 번역자가 이 분야의 단순한 전공자가 아니라 “마르셀 프루스트 전공”으로 불문학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은 프로페셔널이라는 게 절로 느껴질 만큼 잘된 주석이다. 몇 번씩 앞뒤로 왔다 갔다 하면서 이 책을 읽어 내리고 이해하는데 참 많이 도움이 되었다. 그렇다고 이 책을 앞으로 내세우고자 앞 서 출간된 여타 번역서를 뒤로 밀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내가 뭐 이 출판사 홍보맨도 아니고…. 다만 이 책은 이 책 나름대로의 장점을 분명히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알겠다. 번역이나 편집이나 공을 많이 들인 책임은 확실해 보인다.
프루스트를 읽지 않고 소설을 읽었다 말할 수 없다는데, 이번에 제대로 프루스트를 알게 되는 듯하다. 프랑스의 소설가이면서 평론가인 앙드레 모루아는 이런 광오한 말을 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 프루스트를 읽은 사람과 읽지 않은 사람만이 있다”고. 많이 심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인정할 만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어쨌거나 나는 읽은 사람 축에 속할 것이므로. 2권을 언제 읽으려나…. 10월은 너무나 바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