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암향 세트 - 전2권 ㅣ 암향
비연 지음 / 파란(파란미디어) / 2012년 7월
평점 :
품절
나는 매화를 정말 좋아한다. 시골집 작은 창을 열면 눈앞에 펼쳐지는 하얀 매화. 이제 그 집은 추억의 시간 속에 존재하지만 은은한 달빛 품은 매화의 그윽함은 언제나 마음속에 있다. <암향 暗香>! 이 제목을 보는 순간 매화와 관련된 소설임을 바로 알아챈다. 매화의 향기를 수식하는 말 가운데 가장 많이 사용하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매화는 밤을 좋아한다. 암향부동(暗香浮動)이라. 어두운 밤, 하얀 매화의 담백한 아름다움에 더한 향기가 바람에 실려 오면 마음은 맑아지고 가벼워진다. 사실 매화의 향기는 그렇게 강한 편이 아니다. 주위가 조용해지고 마음이 가라앉는 밤이라야 그 은은함이 특별한 운치로 가슴에 들어온다. 그래서 매향은 으스름한 달빛과 잘 어울리고 이를 암향이라 한다.
책을 펼치니 바로 마음이 끌려들어가고, 유려하고 섬세한 필력이라는 느낌이 먼저 자리 잡는다. 시대적 배경은 마치 여진족에게 쫓겨 남쪽으로 내려간 송나라(남송)의 역사를 들여다보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백 년간 전쟁 중인 두 나라, 순(順)과 조(趙). 망해가는 순나라는 대대로 충성을 보이며 북쪽의 야만족 조나라 침공을 막아내던 대장군을 역모로 몰아 죽이고, 황녀 하문예아를 야차 같은 살인귀로 알려진 조나라의 예친왕 아수청라사륜에게 정략적으로 시집보내게 된다. 천한 오랑캐라 무시하는 조나라로 간 황녀의 앞날은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마치 무협만화를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대장군은 죽기 직전 황녀에게 안배가 있음을 알리면서 때가 올 때까지 살아남는 일에만 몰두하라고 당부하는데…….
숲.
흐린 하늘 아래 검은 숲이 보였다. 검다. 온통 검다. 대청도 검고 복도도 검고 나무도 검다. 뒤틀리고 꿈틀거리는 거친 나무줄기로 이뤄진 검은 숲. 어디를 둘러봐도 초록 잎사귀 하나 없는 검은 나무들이 뒤엉켜 있는 검은 숲만 보였다.
아니다. 숲이 아니라 흑해다. 검고 검은 흑해. 이리저리 얽혀있는 검은 나뭇가지가 흑해의 파도가 되어서 밀려왔다. 쏴아아 밀려오는 검은 파도 위로 새하얀 함박눈이 쏟아져 내렸다. 세상을 온통 뒤덮을 기세로 내리는 하얀 눈 사이로 검은 나무줄기만이 선명하게 도드라졌다.
공 空이다.
점차 세상이 희미해져 갔다. 검은 파도 위를 스치는 바람 소리만 들렸다. 흑백으로 이뤄진 세상은 너무나도 고요해서 눈 내리는 소리마저 들리는 것 같았다. 바람이 불 때마다 세상이 투명하게 비워졌다.
… 중략 …
홀린 듯 숲을 바라보는 예아의 귀에 딸깍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바람인가 싶어서 되돌아본 시선의 끝자락에는 한 남자가 서 있었다. (1권 89~90쪽)
아~ 참 마음에 드는 문장이다. 겨울산행을 하면서 느낀 그 감정이 살아 오른다. 황녀 예문은 그렇게 예친왕 사륜을 만난다. 물론 숲은 매화 숲이다. 수묵화를 떠올릴 정도의 검은 매화가 제목으로 나설 정도면 심상치 않은 무언가를 내포하고 있다는 뜻이다. 차가운 추위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피어오르는 생명력, 혹독한 환경에도 꺾이지 않는 고귀한 성품이 그윽한 매화의 향기가 되어 은은하게 글 속에서 떠오른다. 출생의 비밀을 안고 있는 사륜, 암향부동이다…. 이후로는 조나라 황실의 왕통승계를 노리는 두 왕비(현비, 조비)와의 궁중암투에 고전하는 과정이 그려진다. 현비가 초원의 싱그러움과 함께 거친 폭력성을 지니고 있다면, 수비는 알록달록한 색으로 채색된 독버섯 같은 여인이다. 이들은 사륜의 힘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고자 하면서도 끊임없이 예아를 무너트리려 한다. 그런데 자신을 해칠 것만 같은 사륜이 의외로 강인하면서도 따스한 남편이네. 어떤 연유가 있었던 것일까? (이건 독자의 몫으로 남겨둬야겠다)
비연(飛蓮)! 전작 <기란>이 10만 부 이상 팔린 스테디셀러(steady seller : 오랜 기간에 걸쳐 꾸준히 많이 팔리는 책)이라는데 솔직히 처음 듣는 작가다. 아마도 이쪽 갈래에서는 상당히 유명하신 분인가 보다. 책의 소개를 보니 <기란>이나 <암향>이나 동양판타지로맨스소설이라 자리매김하고 있는데, 판타지의 개념이 어떠한지 모르겠지만 이것이 이 소설의 장점이자 단점이라고 하겠다. 마치 먹의 농담과 여백을 잘 살린 수묵화를 보는 듯한 사륜과 예하의 만남과 사랑이 가슴을 사로잡지만, 기대했던 큰 전투와 지략 싸움 같은 긴장감(클라이맥스)이 없이 그저 달달하고 무난한 전개가 불만스럽다. <암향>의 특성을 단적으로 설명한다면 이 책의 출판사 '파란미디어'가 출간하여 드라마화 하였거나 만들고 있는 <해를 품은 달>,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 <비차> 등과 유사한 러브스토리라고 보면 얼추 비슷하지 않을까. 과거에 여중고생에게 인기 높았던 하이틴 로맨스나 할리퀸 문고, 순정만화를 성인용으로 업그레이드한 소설이라고 보면 되겠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