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 - 개정판
알베르 카뮈 지음, 이정서 옮김 / 새움 / 2014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 책 읽은 후기를 적는데 이렇게 난감하고 불편한 적이 일이 있었던가? 자기 생각대로 소감을 적으면 되지 않냐~고 하겠지만, 이거 조금만 잘못 삐딱하다가는 본의 아니게 어느 일방을 편들게 되는 모양새라 경우에 따라서는 상대편에게 욕 처먹게 생겼으니 무슨 이런 일이 있남!
책 좀 읽는다는 사람치고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 안 읽은 사람 있으려나. 공부 좀 한다는 학생들의 대입 논술공부 필수서적  <이방인>. 그런데 이 <이방인>에 논쟁의 불이 붙었다. 새롭게 번역되었다며 나온 새움출판사판 <이방인>을 놓고 벌이는 독서계 초고수들의 현란하고 박진감 넘치는 공박(攻駁)! 불어 불자도 모르는, 그저 독서가 취미인 비전문가인 나에겐 평소와 같이 마음 내키는 대로 씨불이다간 졸지에 무식한 촌놈, 또는 '악의적으로 여론을 호도하는 기존 <이방인> 수구 세력'이 될 판이니 이게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일이 아니고 뭐람. 에고~ 참 소심하긴... 스스로를 자책하게 된다.  

 

■  가만, 지금까지의 상황을 조금 정리해 보자.
○ 작년 가을쯤인가 새움출판사의 블로그에서 "김화영의 <이방인>은 카뮈의 <이방인>이 아니다."라는 글을 봤을 때, 나는 그냥 순수한 비평가의 글인가 싶었다. 몇몇 기존 번역서의 번역 문제를 꼼꼼하게 짚어나가는 것이 설득력 있어보였고, 당대 최고 불문학 권위자라는 김화영 선생의 번역을 특히 대놓고 까기에 대단한 불문학 전공자가 마음먹고 사람 잡자는구나~ 이렇게 생각했다. 그 땐 이 사람 대단하다~ 기존의 틀을 깨부수는 구나~ 이 정도로 넘어갔다. 내가 불문학에 조예가 깊은 것도 아닌지라 그러려니~ 하는 정도...
○ 그러다가 이정서의 <이방인>이란 새로운 번역본이 출간되었는데, 그 표지의 카피가 "우리가 읽은 <이방인>은 카뮈의 <이방인>이 아니다."였다. 아하~ 그 분이 책을 내었구나~ 하면서도 별 관심을 주지 않았다. 이미 과거에 읽은 <이방인>을 다시 한 번 더 읽을 만큼 시간적으로 여유롭지도 못하고 읽을 책도 많으므로...
○ 정말 이정서의 <이방인>에 관심을 준건 알라딘의 고수 '로쟈'의 글(http://blog.aladin.co.kr/mramor/6966576)을 보면서였다. 로쟈님이 지적한 사이렌 부분에 대해 초기에 이정서님의 글을 읽으면서 내가 생각한 게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겨레에 "우리가 읽은 ‘이방인’은 엉터리가 아니었다."(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632347.html)는 기사를 읽었고, 이어서 알라딘에 올라오는 번역자의 반박 글과 여러 댓글을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이 논쟁에 몰입하게 되었다.
○ 급기야 이정서의 <이방인>을 손에 잡아 읽어보는 바보 같은 일이 내게 일어나고 말았다. 원하지 않았던 일. 그런데 읽으면 습관적으로 몇 자 적어야 하는데, 워낙 뛰어난 사람들이 입을 대는 이 판국에 어설픈 감상을 남긴다는 게 괜히 지레 움츠려들게 만드네. 살짝 자존심 꾸겨지는 일이다. 이럴 땐 구경만 해야 하는 건데...

 

■  일반적인 느낀 소감 몇 가지...
○ 다시 읽은 <이방인>이 어떤 의미로 와 닿았는지를 적어본다는 게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이미 충분히 분석되어져 그런 건 논술 준비용으로나 써먹는 고전이 된 지 오래된 책이니... 감상을 적느니 차라리 까뮈의 에세이 <시지프스의 신화>를 읽어보라는 말로 느낌을 대신하고 싶다. 이 책에 답이 있으므로...
잘 읽힌다. 사실 이정서의 <이방인>이 김화영 선생의 번역본에 비하여 술술 잘 읽히는 건 맞다. 이 부분만 평가한다면 괜찮은 번역서로 인정받을 만하다. 하지만 간과해서는 안되는 게 김화영의 시대적 언어(한문과 예법의 시대)와 이정서의 시대적 언어(한글 세대와 예법이 무너진 시대)가 다르기에 이정서본이 술술 읽히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이것마저 안되어 있다면 그게 정말 이상한 일이지... 내 같은 사람에겐 김화영의 가끔씩 나오는 한자투나 문어체가 전혀 이상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고... 하여간 소설적으로 매끄럽다고 하여 프랑스어도 모르는 내가 번역이 옳니 그르니 하는 논쟁에 발 담굴 처지는 아니구마...
노이즈 마케팅...  논쟁의 하나인 이건 분명해 보인다. 정도를 지나쳤다. 무슨 학문적 웬수를 만나 칼을 빼든 형국이었다고 나는 느꼈다. 특히 특정인을 지칭해 '문학 권력' 등 모든 악역을 떠넘긴 건 알면 알수록 이해가 안 되는 일이고, 공격의 짜임새와 루트를 잘못 잡은 거라 생각한다. 카피만 보면 마케팅을 위해 있을 수 있다고 좋게 넘어갈 수 있지만, 이를 위해 자신이 되려 공격 받기 전까지 끝없이 물고 늘어진 것은 외곬에 빠진 자충수가 아니련지... 아니면 이마저 감안한 정말 치밀한 노이즈 마케팅이든지...
필명! 누구나 쓸 수 있지만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가 잘 안 된다. 아니 어떻게 남의 실명을 언급하여 공격하면서 자신은 필명에 숨을 수 있는가? 특히 실체가 새움출판사 이대식 대표라는 것이 더욱 놀랍다. 번역자의 해명 글을 읽어봤지만 이건 정도(正道)가 아니다.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바른 번역에의 욕심이었다면 있어서는 안 될 일이라고 생각한다. 아주 '꼼수'란 욕 들어도 쌀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소설적 개연성? 번역자가 불어에 능통하지 않다는 반박 글에 나는 놀랐다. 영문판 중역을 바탕으로 했다는 것도 놀랍고... 그러고도 불문 최고학자를 그렇게 공격할 수 있다니... 하긴 불문학 전공 안 해도 불어 잘하는 사람 많다. 그런 건 사실 문제가 안 될 것이다. 번역자도 그 정도는 되니까 그런 거겠지. 그런데 사전적으로 잘 해석하여 소설적 개연성을 높였다하여 자신만 옳고 남은 그러다? 이것이 바로 문제의 씨앗이다. 자만심. 오만... 당대 최고의 고수를 오만한 오역쟁이로 치부해 버리면서 정작 자신의 오만을 간과해 버린 거다. 자신의 번역도 기존 번역의 토대 위에서 자생한 것인데 이를 깡그리 썩은 권력 비슷하게 취급했으니 이 논란이 발생한 것이다. 자업자득이다. 번역 문학에 큰 공을 인정받을 수 있었는데도 지나치게 과함으로써 수세에 몰리게 되어버린 거다.
성공한 마케팅. 이런저런 점을 고려해 보면 출판사의 입장에서 매우 즐거운(?) 성공 마케팅이 아닐까 한다. 최고수 김화영 선생을 물고 늘어짐으로써 논란의 주인공으로 시끄러워질수록 저절로 광고가 될 것이고, 책은 더욱 많이 팔리게 되어있다고 보는 게 맞을 거야, 아마도...  

 

■  번역 논쟁 부분에 대한 단상(斷想) 두어 개
○ sirènes...

그때 밤의 저 끝에서 뱃고동 소리가 크게 울렸다. 그것은 이제 나와는 영원히 관계가 없어진 한 세계로의 출발을 알리고 있었다. 참으로 오래간만에 처음으로 나는 엄마를 생각했다. (김화영 역, 민음사, 135쪽)


그때, 한밤의 경계선에서 사이렌이 울부짖었다. 그 소리는, 이제 영원히 내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세계로의 출발을 알리고 있었다. 아주 오랜만에 다시, 나는 엄마를 생각했다. (이정서 역, 새움, 161쪽)


 사실 두 번역의 의미가 나에겐 다르게 느껴지지 않았다. 이 문장의 핵심은 "나는 엄마를 생각했다"에 있다고 생각했기에 '뭘~ 이런 걸 두고 거품을 무나...' 하는 정도였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소도시는 바다를 끼고 있었다. 자정 무렵 즈음에 들어오는 정기여객선의 뱃고동 소리가 들리는 곳이었고, 자정이면 통금을 알리는 사이렌이 울리는 시대를 살았기에 나에겐 그 의미가 비슷하게 전해졌다. 사람마다의 체험적 환경에 따라 받아들이는 느낌은 가지각색인 것이 소설 아니겠는가. 이정서님의 주장처럼 독자들이 "불과 몇 시간 뒤면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야 할 상황에서 어머니를 떠올릴 수밖에 없는 주인공의 절박한 비애와 처연함에 조금도 공감하지 못하고 연민도 느끼지 못한"게 아니라, 내가 생각하기엔 대부분의 독자가 나름의 인지적 방법으로 그 의미를 알아챘을 듯하다. 이 부분은 단순히 sirènes의 사전적 분석에 의미를 둘 것이 아니라 까뮈가 <이방인>을 저술한 장소적, 태생적 입장에서 접근해야 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생각해 봤다. 알다시피 작품의 무대가 알제리의 바닷가임을 고려할 때 사전적 의미와 관계없이 나는 뱃고동에 한 표를 던진다. 훨씬 처연함이 살아난다. 정말 이건 독자의 몫이다.

 

태양
<이방인>의 하이라이트가 태양이란건 지금까지의 정설이다. 이정서님의 설명 중 가장 강조하는 내용인데도 '어~ 이게 아닌데...' 하는 느낌을 가진 부분이다. 그저 눈 앞의 자구적 해석에 치우쳐 인과관계만 따지는데 이게 오히려 나에겐 어필하지 못한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뫼르소는 강렬한 태양 때문이 아니라 아랍인의 칼날에 비친 햇빛이 위협적이어서 정당방위로 첫 발을 쏜 것"이라는데, 이것이 백번 맞다하더라도 여기서는 '태양'에 함축된 중의(重義)가 핵심이기에 '그게 뭐 중요 해?'란 의문을 가지게 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정서님도 같은 말씀(http://v.daum.net/link/49587410)을 하셨지만, 나에겐 "법정에서 재판장이, ‘왜 그랬냐’고 묻자, 무덤덤하게 '태양 때문에' 그랬다고 대답"한거나 "정신이 없는 상태에서 '자기도 터무니없는 줄 알면서'도 그것은 '태양 때문이었다'고 말한"거나 별로 다르지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전자의 번역에서 독자는 권태와 허무에 빠진 뫼르소의 심리상태를 더 자의적으로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까뮈는 이 소설로 노벨상을 받았는데, 아랍인을 죽인 그 당위성에 의해 노벨상을 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뫼로소란 인물의 존재 의미를 인과관계에 의한 심리 흐름 분석으로 떠 먹여주는 이정서님의 해석보다는, 전자의 해석이 그 행간에 숨은 중의적 의미를 독자 스스로 생각하게 한다는 점에서 보다 더 까뮈의 소설 철학적 역량을 잘 살렸다고 느낀다. 엉뚱하게도 나는 여기서 영화 친구의 마지막 대사를 떠올렸다. "니 와 그랬노?"라는 물음에 "쪽팔리잖아"라고 대답... 나는 이렇게 그냥 '태양' 때문이라고 한 뫼르소의 마음을 영화 친구에서 실마리를 얻고 있다. 해석이 읽는 이의 자유로운 영혼에 의해 각기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는게 문학이지 않겠는가. 그냥 자신의 번역 의도는 이렇다~ 라고 할 부분이었지 다른 선험자의 번역이 틀렸니마니 할 영역이 아닌 것이다. 이정서님이 크게 오버하여 자신만 옳고 다른 번역자는 틀렸다고 할 부분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  정리
이정서님의 번역본은 중고등 학생이 읽어도 술술 읽히는 좋은 번역서라는 평가에 동의한다. 하지만 술술 읽힌다고 하여 좋은 번역서라고 하기는 곤란한 부분이 있다. 문학적으로 이름을 얻는 책들은 독자 스스로 함의(含意)를 찾아내게하여 느낌을 강하게 이끌어내는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번역자가 북치고 장구치고 이렇게 이해해야 옳으니 다른 번역들은 다 엉터리야~ 하는 것은 참 이해하기 어려운 주장이다. 독자들이 초등학생도 아닌데 이정서님의 생각대로 이방인을 이해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는 듯한 행보에는 실소와 반감이 인다. 노이즈 마케팅이란 생각을 아니할 수 없다. 특히 김화영 선생의 번역본은 문맥이 소설적 유연성은 다소 떨어질지라도 이정서 번역본에 비해 더 사유의 여지가 느껴지기에 더욱 그러하다.(참고로, 난 김화영 선생과 일면식도 없다). 한 출판사의 대표이며 아주 똑똑해 보이는 분이 왜 좀 더 유연하게 자신의 의견을 내세우지 못했을까? 무슨 다른 이유가 있는걸까? 지식인 특유의 폐쇄적 아집이라고 하기엔 개방적인 문화인이고, 개방적 문화인이라고 하기엔 자신의 생각을 절대화하는 자기오류(自己誤謬)에 빠져있는 것만 같다. 또 하나의 좋은 <이방인>이 될 수 있었건만 증폭되는 논란으로 아쉬움만 많아져 안타깝다. 결국  남의 눈에 티끌은 보면서 제 눈의 대들보는 보지 못한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한 마디로 과유불급이다.

어쨌거나 비전문가로서 새움본 <이방인>을 관전(?)한 요약 한 줄 평은 내 자신이 이방인 같다는 느낌을 가진 <이방인> 읽기였다는 거다. 그저 다시 한 번 <이방인>을 잡아보았다는데 방점을 찍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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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덧붙임 (4/30 오후)
알라딘에 블로그를 만들고 포스팅한 이후 가장 많은 공감을 받은지라 조금 당혹(?)스럽다. 하루 방문자수도 별로 없는, 말 그대로 별 볼일 없는 블로그인데...
하여튼 읽어보시고 공감 주신 분이 넘 고맙다. (복 받을 거야~ ^^ )

 

사실 이정서님도 할 말이 있을 것이다. 습관처럼 출판사 블로그에 갔더니 자신의 변(辯)이 며칠 전 포스팅에 덧붙여 있더라.
사람마다 가치관이 다 다를 것이므로 자기 신념으로 봐 줄 수도 있는 부분이었다.
읽고 소개해 주는 게 당근 예의(?)라 생각되어 연결해 둔다.(링크 페이퍼 하단의 노란 부분)

 

<뫼르소의 살해 행위는 정말 태양 때문이었나? -카뮈 <이방인> 역자 이정서의 답변>

 http://saeumbook.tistory.com/440

 

앞으로 이방인에 대한 나의 관심을 끊기 위해 마지막으로 몇 마디 정리하고 땡~ 하려한다.

 

이정서님이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그래서 이렇게 번역했다."라고만 주장하고 광고했더라면 모양새가 참 좋았을 거다.
그런데 "내 번역이 옳고 너희들 번역은 다 엉터리 오역이야."라는 방향으로 나아감으로써 문제가 되었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분분한 논란에 번역자는 "아니 틀린 것을 틀렸다는데 뭐 어쩌라고~. 진실을 외면하지 마."하는 느낌이고,
"그 틀렸다는 게 당신만의 착각이야."라는 게 반박 논리의 핵심이다.

 

카뮈가 살아계시면 직접 물어본다지만 가고 없으니...

 

자기주장이 과하면 자기독선이나 자기고집으로 보인다.
자기주장이란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거지 자신의 것이 맞다라고 밀어붙이는 게 아니다.
우리는 이럴 때 보통 뭐라고 조언을 할까? 아마도 '타인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마음'을 가지라고 할 것이다.

다양성을 인정하고 수용할 때 사회는 진보하고 문화는 번성한다고 나는 배웠다.
좀 더 시간이 흐르면 알겠지... 진실불허(眞實不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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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4-04-30 07: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구절절 모두 공감하고 동의하며 아주 잘 읽었습니다, 표맥님. 제가 생각했으되 정리하지 못한것을 표맥님은 아주 잘 하신 것 같습니다.

표맥(漂麥) 2014-04-30 11:45   좋아요 0 | URL
윽! 좋게 봐주시어 고맙습니다. 사실 쭈삣쭈삣~ 이거 괜히 적는거 아닌감~~~ 이런 생각이 절 불편하게 하였거든요. 다락방님의 말씀이 힘이 됩니다. 고맙습니다. 남도의 하늘은 오전내내 찌푸뚱~ 합니다. 좋은 하루되시길...^^

마립간 2014-04-30 08: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처음 댓글을 남깁니다.

저도 논란때문에 새움 출판 책을 구입하게 되었고, 새움 출판 '이방인'에 대한 생각, 대체적인 느낌이 저와 비슷해서 글을 남기고 갑니다. (제가 올리려 했던 글의 상당 부분을 삭제해야겠네요.^^)

표맥(漂麥) 2014-04-30 11:48   좋아요 0 | URL
마립간님의 최근 독서일기를 본 적이 있습니다. 대단한 독서내공을 엿보았지요. 이렇게 방문해 주시고 비슷한 느낌을 공유해 주시어 제 마음이 가벼워집니다. 고맙습니다.^^

oren 2014-04-30 17: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표맥 님께서 올리신 글을 읽으니 정말 공감이 많이 느껴집니다.

이 글 가운데 특히 제가 '아주 쎄게' 공감을 느끼는 부분은 <번역 논쟁 부분에 대한 단상(斷想) 두어 개> 부분이네요. 번역하신 분이나 거기에 반론을 제기하시는 분이나 서로 못 잡아 먹어서 안달이 난 사람들처럼 '자구 하나 하나에 집착하는 모습'도 (저같은 독자들이 보기엔) 좀 웃긴다 싶어요...

가장 격렬하게 논쟁을 벌이는 분들이 가장 쎄게 치고 받고 싸우는 '논쟁'조차도 일반 독자들이 보기엔 그저 '그게 뭐가 그리 중요한가' 싶은 대목도 정말 많더라구요.

이번 논쟁을 보면서 제게 떠올랐던 또다른 책 한 권은 데이비드 베레비가 쓴 『우리와 그들, 무리짓기에 대한 착각』이었습니다. 그 책에 담긴 내용들을 읽어 보면 "그게 우리의 가장 큰 차이로군요" 라면서 서로 잡아먹을 듯이 격렬하게 싸우는 이유가 사실은 '엉뚱한 데' 원인이 있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는 주장이 담겨 있는데, 정말 설득력 넘치는 '흥미로운 책'이랍니다. 언제 기회가 되시면 꼭 한 번 읽어보세요~

제가 그 책을 정말 인상깊게 읽고 나서 저자의 페이스북까지 찾아가 '페친'을 맺었는데, 정작 그 책에 대해 제가 따로 쓴 글은 거의 없네요. 아래 주소로 가시면 '책 내용'을 좀 더 살펴보실 수 있을 듯합니다. http://blog.aladin.co.kr/oren/4308121

oren 2014-04-30 17: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을 둘러싸고 벌어진 이번 오역 논쟁이 '자칫 끼어들기가 겁날 만큼' 무섭게 느껴졌다는 표맥 님의 말씀에도 크게 공감합니다.

[인간은 "말 한마디, 미소, 견해 차이를 비롯해 갖가지 사소한 이유들 때문에" 싸운다는 홉스의 말은 17세기에나 지금에나 사실이다.]라고 지적했던 스티븐 핑커의 책 속 구절도 '오랜만에 다시' 떠올라서 길게 덧붙여 봅니다. ㅎㅎ

* * *

폭력적 본능

홉스는 흔히 자연 상태의 인간은 서로를 증오하고 파괴하는 비합리적 충동에 사로잡힌 존재라고 주장하는 철학자로 해석되고 있다. 그러나 그의 분석은 보다 섬세하고 어쩌면 훨씬 더 비극적일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합리적이고 이기적인 행위자들의 상호 작용으로부터 어떻게 폭력이 발생하는가를 설명했기 때문이다. 홉스의 분석은 진화 생물학, 게임 이론, 사회 심리학 분야에서 재발견되고 있으며, 나 역시 그의 분석을 토대로 해서 폭력의 논리를 논한 다음 인간이 어떻게 폭력적 본능을 중화하기 위해 평화적 본능을 구사하는가의 문제로 넘어가고자 한다.

다음은 그 유명한 "인간의 삶"에 관한 구절 앞에 제시된 분석이다.

인간의 본성에서 우리는 싸움의 세 가지 주된 요인을 발견한다. 첫째는 경쟁이고, 둘째는 자신감 결여이고, 셋째는 영광이다. 첫 번째는 인간이 이익을 위해 서로를 공격하게 만들고, 두 번째는 안전을 위해 서로를 공격하게 만들고, 세 번째는 가령 말 한마디, 미소, 견해 차이를 비롯하여, 본인이 직접 겪는 것이든 혈연, 친구, 국가, 직업, 이름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겪는 것이든 자신을 무시하는 갖가지 사소한 이유들 때문에 서로를 공격하게 만든다.

첫째는 경쟁이다. 자연 선택의 힘은 경쟁에 있는데, 그것은 자연 선택의 산물들-리처드 도킨스의 비유에 따르면 생존 기계들-이 생존과 번식에 도움이 되는 일이면 어떤 것이든 미리 정해진 디폴트 값에 따라 수행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략)

둘째, "불신"의 원래 의미는 자신감 결여(diffidence)이다.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번역한 홉스는 "전쟁이 불가피해진 것은 성장하는 아테네의 힘과 그에 대해 스파르타가 느낀 두려움 때문이었다."라는 설명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만약 이웃이 내가 가진 것을 몹시 탐낸다면 나는 그들의 욕구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된다. 따라서 나는 자신을 방어할 준비를 해야 한다. 방어란 성벽, 마지노선, 대탄도 미사일 등의 첨단 기술을 망라해도 불확실한 방법이고, 그런 것이 없으면 더욱 미심쩍고 불확실하다. 자기 보호를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은 잠재적으로 적대적인 이웃에게 선제 공격을 퍼부어 쓸어 버리는 것일 수 있다. 요기 베라의 충고대로 "최상의 수비는 최상의 공격이고, 또 최상의 공격은 최상의 수비이다."

셋째는 영광인데 보다 정확한 단어는 "명예"일 것이다. 인간은 "말 한마디, 미소, 견해 차이를 비롯해 자신을 무시하는 갖가지 사소한 이유들 때문에" 싸운다는 홉스의 말은 17세기에나 지금에나 사실이다.

- 스티븐 핑커,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中에서

표맥(漂麥) 2014-05-01 00:14   좋아요 0 | URL
제 벗 중 한 분은 읽은 책의 내용을 적시에 품위있게 활용할 줄 아는 여유가 있지요. 책을 읽을 때 제대로 읽었기에 그런 능력을 가진게 아닌가 합니다. oren님의 글에서도 그런 품격을 느낍니다.
스티븐 핑거 교수님은 워낙 유명하시니 조금 압니다만, 데이비드 베레비는 알듯말듯 합니다. <우리와 그들, 무리짓기에 대한 착각>, 제목만으로도 흥미롭군요. 한번 읽어봐야겠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