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mannerist > 20050910_백건우 베토벤 소나타 공연후기
아마 올 하반기 서양고전음악 좋아하는 사람들의 최대 화제 중 하나는 백건우 선생님이 DECCA레이블에서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곡 프로젝트를 시작했는 걸거다. 한 작곡가에 깊이 몰두하는 백건우 선생님은 라벨의 피아노곡 전곡,, 프로코피에프,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전곡 녹음을 하면서 그때마다 좋은 평 - 이 말로 백건우 선생님의 행적을 수식하는 건 사실 실례다 - 을 받아왔기에 그만큼 기대도 되고. 모든 피아니스트들의 꿈 중 하나 아닐까.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곡을, 그것도 메이져 음반사에서 낸다는 건.
여튼간에. 그 프로젝트의 첫빠따로 나온 이 음반, 백건우 선생님의 베토벤 중기 피아노 소나타 음반에 대해 들려오는 평이 하나같인 찬사 일색이다. 특히나, 매너가 좋아하는 23번은 리히테르의 그림자가 겹쳐보인다는 말에는 귀 쫑긋해질수밖에 없었으니. 작년 모처에서 '열정' 을 기가 막히게 두들겨대셨다는 말에 반신반의하기도 했지만 그건 핏줄 비슷한 사람끼리 해주는 덕담에 가깝겠지 어림짐작했었다. 그래도 궁금한 건 궁금한거라. 마침 부산에서 백건우 선생님의 연주 스케줄이 잡혀있기에 별 망설임 없이 예매. 3만원짜리 A석은 다 동나고 5만원짜리 S석이 있다. "음악을 듣는데 있어 눈은 방해가 될 뿐이다"라는 리히테르의 말이 기억나 역부러 피아니스트의 손모양새가 잘 보이지 않는, 그러나 소리는 명확히 퍼져나올 왼쪽 앞자리.
여튼간에 자리잡고 두근두근. 공연시간을 기다린다. 개 우라질리스틱 코리안 타임은 여지없이 적용되고. 다섯시 다 되었는데도 1/3이 비어있다. 매너가 예매했을때 90%정도가 매진이였는데. 종 치고도 느릿느릿 꾸역꾸역 밀려드는 포유류들은 대체 뭐냐고.
좌우간 드디어 시작. 무대 저편에서 백건우 선생님 걸어나오시자 밀려드는 박수소리. 응? 근데 걸어나오시다 만다. 무대 조명이 너무 밖아서인지 천정을 가리키고 뭐라뭐라 말씀하시는 백건우 선생님. 잠시 후, 거의 피아노 건반이 보일락말락한만큼 어둑어둑하게 조명을 줄이고 나서야 다시 걸어나오신다. 그 헤프닝에 잠시 웃음.
그때 매너 머리를 스치는 리히테르의 말. "음악을 듣는데 있어 눈은 방해가 될 뿐이다"
역시나. 그렇다는데. 그럼 거기에 응해주는게 음악 듣는 이의 자세겠지. 빙긋 웃으며 매너는 안경을 벗어버리고 눈 감아버린다. 피아노 치는 대가의 모습을 눈에 못 담는 게 아쉽기도 하지만 쓸떼없는 감각 끊어버리는 게 음악에 집중하긴 더 좋겠지. 하는 순간. "비창"의 첫 화음이 울린다.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8번, "비창"
첫 화음을 어떻게 짚는지 들으면 대강 분위기 파악이 되는 곡이다. 쿵- 이 아니라 궁- 이다. 기대했던 것 만큼 육중하게 짚지 않는다. 비통한 느낌을 과장하지 않고 덤덤하게 하나하나 소화하는 느낌. 좋게 말하면 이렇게 나쁘게 말하면 조금 밋밋했던듯. 손에 힘을 빼고 사뿐사뿐 건반을 짚어나가는 느낌이었다. 소리없이 숨죽여 슬픔을 삼키는 모습을 묘사해내고 싶으셨던걸까. 좀 힘있게 몰아쳐야 할 부분에서 끝까지 밀지 않고 그 앞에서 한 발자욱 물러서는 느낌 때문에 뭔가 부족한 느낌이 들더라. 아니면, 매너가 너무 러시안 피아니스트들의 '비창'에 익숙한 탓인가? 근데 "비창"이란 제목 자체가 그렇듯이 - 더구나나 베토벤이 직접 인 제목 아닌가 - 밀 때 확실히 미는 게 정답. 이라고, 에밀 길렐스의 스튜디오 녹음이 '정답'이라고 생각한다. 여튼간 조금 아쉬운 연주. 실연에서만 들을 수 있는, '비창' 멜로디, 그 극적 대조를 누린 게 어디냐 싶긴 하지만.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3번.
멜로디가 상쾌한 느낌이 들어 8번과 함께 초기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중 매너가 좋아하는 곡. 여기서부터 백건우 선생님의 진면목이 드러난다. 확실한 극적 대비와 '이때다'싶을 때 끝까지 밀어내는 느낌이 정확히 들기 시작했다. 피아니시모와 포르티시모 사이의 무한하다싶은 대비와 간격에 넋을 잃으면서도, 무겁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더라. 상쾌하고 화려한 느낌의 주 선율을 잘 살렸던게 기억에 남는다. 듣는 내내 입가에서 웃음이 떠나지 않았던 연주. 드디어 웃으며 박수를 치는 매너.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6번.
매너도 잘 안 들어본 곡이라... 그냥 눈 감고 듣다가 잠시 졸아버리다. -_-;;;;;;;;;;;
그래도 그 기분좋고 행복한 느낌이란... =)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23번 "열정"
드. 디. 어. "열정"이다. 가슴 두근두근. 드디어 도입부. 따~ 라라~ 헉- 했다. 건반을 아주 여리게 짚어나가신다. 어느 정도의 드라마를 만들어 내시려고 하시나... 하는데. 순간 귀를 의심했다. 격렬한 화음을 왼손 오른손 할 것 없이, 묵직하게 그것도 거의 믿을 수 없는 속도로 쌓아간다. 템포나 분위기는 제르킨에 가까운데 묵직하게 건반 짚어나가는 느낌은 정말 리히테르나 길렐스에 닮아 있다. 듣기 부담스러울 정도의 박력을 유지하면서도 전체 멜로디 구성은 이상스러울 정도로 편안하다. 그리고 한 소절 한 소절, 한 음 한 음 살아 꿈틀대는 느낌이라니...
어느새 1악장 마지막. '폭발'이라는 말 이외에 설명할 도리가 없다. 무시무시한 속도와 박력으로 몰아친 다음 다시 한없이 여린 목소리로 멀어지더라.
그리고 주제와 변주를 주고 받는 2악장. 여리게 시작하지만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점점 빨리지면서 '열정'의 불꽃을, 그 불씨를 보이지 않게 이어나간다. 이제껏 들어본 2악장 중 가장 빠른 템포였지만 조급하다기보다는 3악장에 폭발에 대비해서 도화선까지 불씨를 꺼뜨리지 않고 옮겨가는 느낌. 딱 리히테르의 프라하 실황 2악장의 감성. 그리고 드디어 도화선에 불이 옮겨붙었다.
!
페달을 깊게 밟지 않고 다소 드라이하게 같은 화음을 두드리면서 시작. 이거 정말 리히테르 프라하 실황 분위기잖아. 하는데. 정말 믿겨지지 않을 정도의 속도와 미친듯한 열기가 불어닥친다. 이제껏 들었던 그 어떤 "열정"보다 빠르고 격렬하다. 정말 '제대로'미쳐 돌아간다. 시간이 흘러가는게 아깝기 그지없지만 그걸 인식조차 못할 정도로 멍- 하니 들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드디어 코다. 무슨 말을 붙이는데 군더더기다. 그런 묵직함과 속도가 가능하다니... 이건 번스타인의 차이콥스키 4번을 이야기할때 매너가 쓴 표현이지만, 석유 드럼통에 불붙인 다이너마이트 던져넣은 모양새라는 말 밖엔... 아... 그리고 끝.
코리안 타임에 연주중에도 움직이는 매너 없는 사람들 많았지만, 음악 콩나물 대가리도 모르는 사람들이라도 그 분위기만은 감지했는지, 사람들 모두 폭발한다. 미친듯한 환호성과 기립박수. 매너도 홀린듯 벌떡 일어나 박수를 쳐 댔으니. 매너 좋으신 백건우 선생님, 커튼 콜 몇 번을 받으시고 아주 낭만적이고 아련한 앵콜곡 한 곡까지 선물해 주시다.
역시나. 나오니깐 사람들 구름같이 모여서 사인 받으려 줄 서있고, 백건우 선생님 CD판매대에서는 미친 듯이 사람들이 CD를 사고 있다. 그거 자제하느라 혼났다. 사인을 받을까 하다가 에이 뭐... 이정도 선물도 감지덕지지. 하고 한 발자욱 물러서다. 예전 풍월당에서 프로코피에프 협주곡 CD에 받은걸로도 충분한걸. 더 욕심 부리면 아니되지...
역시나... 그 힘든 연주 하시고도 우리의 백건우 선생님, 한시간동안 팬들과 사진 찍어주시고 같이 웃어주시며 마지막 팬까지 사인 다 해 주셨단다... 아... 정말 대단하신 분이다. 앞으로도 많은 연주자들의 많은 곡 많이 음반 남겨주시길... ^_^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