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화씨님께서 2003-09-23일에 작성하신 "2003. 9. 22. 월요일 - 푸르고 높은 가을하늘"이라는 제목의 글입니다.

쨍하게 맑은 가을 하늘이 산으로 폭 둘러싸인 능길마을을 내려다보고 있다. 하늘엔 온통 푸른 물감을 풀어 놓은 듯 눈이 시리다. 얼마 만에 이런 하늘을 보는지 감회가 새롭다. 덕유산자락 해발 400미터에 자리 잡은 마을은 아직 오염되지 않은 자연이 살아 있다. 가끔 논에 뿌린 농약 냄새가 바람결에 실려 오는 것을 빼고는 더없이 좋은 환경이다.

사무실에 나와서 컴퓨터를 키고 부팅 되는 동안 현관에 나가 앞산을 바라보았다. 동쪽에서 떠오르는 아침햇살을 받아 산은 깨어나고 있다. 그리 크지는 않지만 소나무가 빽빽한 앞산의 동쪽능선은 햇살을 받아 신선하게 빛나고 있다. 햇살이 닿지 않는 부분은 검푸른 빛으로 손을 대면 동상이 걸릴 듯하다. 가을이다! 가을을 처음으로 느낀 소년시절에 보았던 산처럼 학교 앞 풍경이 가슴속에 들어온다. 이슬을 머금은 길은 촉촉하게 젖어있다. 하루에 몇 번 안 다니는 버스가 느릿느릿 학교 앞을 지나갔다. 손님은 한명도 없이 기사만 혼자 여유 있는 표정으로 차를 몰고 있다.

아침나절에 사무실에 앉아있는데 벌써 발이 시리다. 겨울 준비를 단단히 하지 않으면 올 겨울을 무사히 넘기기 어려울 듯 하다. 이제 다가오는 첫 겨울을 무사히 버텨내야 한다. 석유난로 대신 나무를 때는 난로를 설치해야 하리라. 가을동안 열심히 장작을 해다가 쌓아 놓아야겠다. 다음에 집에 가면 두꺼운 저고리도 하나 챙겨야겠다. 추위에 강하다는 홀씨도 발이 시린지 자주 햇살을 받으러 나간다. 밖에 나오면 햇살이 이리도 따스한데... 몸을 뒤집으며 햇살을 한껏 몸에 저장하고 들어와도 금방 발이 시려온다.

오늘부터는 겨자씨와 사과씨가 식사를 준비한다. 조금 불안한 마음으로 점심을 먹으러 갔다. 아니나 다를까? 두 사람은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지난주에 찬거리를 많이 사용하기도 했지만 찬이 너무 부실하다고 다들 한마디씩 한다. 뭐든 다 한번씩 해 보는 것은 좋은 방법인 듯 하다. 그 일을 하는 사람의 어려움이나 노고를 몸으로 느껴야 감사하는 마음으로 서로를 이해 할 수 있게 해 주는 좋은 방법이다. 차츰 잘하는 일에 전문적으로 종사하는 사람이 생길테지만 처음에는 다같이 일을 돌아가며 해보는 것이 좋겠다.

오후에는 대전 유성구에 있는 고용안정센터에 갔다. 나무씨와 겨자씨, 나, 그리고 양말 사러 간다고 홀씨가 동행을 했다. 춥긴 추웠나 보다. 실업급여를 받아 이곳 살림에 보태기 위해서다. 가족이 있는 사람들은 큰일이다. 빨리 이 지경을 벗어나야 할텐데... 가족들을 굶길 수는 없는데, 아직 묘책이 없어서 가슴만 답답하다. 벌써 두 번째로 실업급여를 받는다. 한번은 (주)이장을 위해서 이번에는 풀씨네를 위해서. 빨리 자생적인 틀을 만들어 가족들과 함께 즐겁게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 여러 가지 가능성들이 보이긴 하지만 아직 실체가 없는 일이다. 시작한지 얼마 안 되어서부터 조바심을 낼 필요는 없지만 꾸준히, 열심히 노력해야 할 일이다.

한 시간 이상에 걸친 교육을 마치고 나왔다. 주변을 돌아본 홀씨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곳에 온 김에 바람이를 만나고 갈까 하다가 만나봐야 밥 한 끼 못살 형편이라 통화만 하고 그만 두기로 했다. 나무씨가 운전을 하고 능길로 발길을 돌렸다. 우선 주유소에 연료를 채워야 했다. 2만원어치만 넣었다. 기름도 넉넉하게 넣지 못한다. 2주에 한번씩 이곳에 오려면 기름값과 톨게이트 비용을 합해 2만원 정도가 들어야 할 듯 하다. 오늘은 종일 머릿속에 돈 문제만 가득한 것 같다. 머리를 흔들고 창밖을 내다 봤다. 5시박에 안되었는데 벌써 저녁 햇살이 비춘다. 고원지대에 솟은 산은 야트막한듯해도 벌써 해를 삼켜버린 놈도 있다. 군데군데 그늘진 곳에서 해를 바라보면 영락없이 해가 진 듯 하다.

도착하자마자 저녁을 먹었다. 오늘 저녁에는 유난히 불만들이 많다. 반찬이 너무해~ 불만들이 많다. 반찬이 너무 짜서 밥을 두 번이나 퍼왔다고, 홀씨 평생에 이런 일을 처음이라고 특히 홀씨가 불만이 많다. 그래도 낄낄거리며 즐거운 식사를 마쳤다. 아직 도착하지 못한 피씨와 올리브씨가 걱정이 됐다. 저녁을 먹지 못하고 올텐데, 밥솥을 보니 밥은 많이 있는 듯 하다. 그런데 반찬은 어이할꼬...

저녁 회의를 하기 전에 작은 방에 불을 지폈다. 큰방에는 보일러가 들어와 새벽 추위를 건널 수 있지만 작은방은 추울 듯 했다. 사과씨와 짚씨가 추운방에서 잘 생각을 하니 아궁이를 지나칠 수 없다. 여전히 나무가 부족하다. 불씨에게 집 뒤에 있는 나뭇가지를 가져 오라했다. 하루치 장작은 쓸 수 있겠다. 이젠 제법 불길이 잘 든다. 어느 정도 때면 추위는 면 할 수 있겠다. 방바닥을 만져보니 미지근한 기운이 올라온다. 이대로 불씨를 남겨두면 될 듯 하다. 시계를 보니 8시다.

저녁 회의에는 먹을거리 축제와 10월 1일에 열리는 마을 체육대회에 대한 얘기를 했다. 마을을 대표해서 우리가 배구팀을 이루어야 할 듯 하다. 회의를 마치고 식당에서 청주 한잔을 돌리고 있는 동안 피씨와 올리브씨가 도착했다. 이틀 만에 만나는데도 몹시 반갑다. 반찬이 없어서 걱정을 했는데 사과씨 집에 들러서 작은 냉장고와 밑반찬 몇 가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김치를 챙겨 가지고 왔다. 두 사람은 라면을 끓여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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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4-04-02 2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정말 많이 기다렸는데, 드뎌 풀씨네 이야기를 풀어 놓으셨군요...
9월인데도 산 속 마을엔 이른 겨울이 찾아 오는군요. 그 냉기를 아궁이의 장작불로 달래야 하고...
자연 공동체 실현의 현실적인 문제들이 내비추어진 글이네요...
아, 글고 사과씨께선 아무래도 좀더 요리 연습을 하셔야 할 듯 하네요?
물어봐 주시겠어요? 지금은 요리 실력이 많이 좋아지셨는지? ^^

김여흔 2004-04-02 2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거기서 감자볶음 배웠다 합니다.
기름진 쌀밥, 맛있는 라면, 더 맛있는 계란후라이는 원래 잘하고
... 또 ... 없나 ㅋ
그러더군요, 사.과.씨.가요. ^^V

2004-04-04 00:1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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