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화씨님께서 2003-09-21일에 작성하신 "2003. 9. 20. 토요일 - 농협중앙회 팜스테이 행사"이라는 제목의 글입니다.

아침. 사무실에 나온지 얼마 안돼 전화가 왔다. 불씨다. 아침에 혼자 앞산엘 올랐는데 등산로를 제대로 찾지 못해서 엉뚱한 곳으로 내려간 모양이다. 지리를 잘 모르기도 하거니와 다시 걸어 올 엄두가 나지 않으니 차로 데리러 오란다. 또 한번 사무실이 뒤집어졌다. “우째 이런 일이~” 차를 몰고 가면서도 웃음이 났다. 그것도 길을 물으러 들어 간 집이 하필 권혁천 씨 댁이다. 도착해서 보니 불씨는 권혁천 씨와 마주 앉아 고추를 다듬고 있었다. 바지며 신발이 엉망이다. 30분이면 돌 코스를 1시간 30분이나 헤매고 다녔단다. 등산로 입구에 세워둔 자전거를 가지러 그곳까지 데려다 주고 학교로 돌아 왔다.

팜스테이 행사 때문에 방문하는 가족들을 위해 황토방을 청소하고 동향면에 나갔다. 어제 맡긴 인절미를 찾고 막걸리 한 말을 사기 위해서다. 오늘 마을에서는 길을 정비하는 부역을 하신다고 했다. 마을 어른들이 다 모이는 자리라 인사차 떡과 막걸리를 준비 한 것이다. 동향면은 작은 시골마을이었다. 마을사람들이 서로 얼굴을 잘 알고 있어서 외지에서 온 사람은 금방 알아보는 모양이다. 어디서 왔느냐고, 살려고 왔느냐고, 가는 곳마다 물어 본다.

12시가 되어서 약속된 소나무 밑으로 올라갔다. 다 모여있을줄 알았는데 한분만 계신다. 점심은 각자 집에서 먹기로 했단다. 허탈한 맘으로 내려오는 길에 몇분을 만났다. 취지를 말씀드리고 막걸리와 떡을 건네 드렸다. 오후에 참으로라도 드시라고 했더니 고맙다는 인사를 하신다. 연세 많으신 분들이 일을 하는데 그냥 돌아서 오기가 미안했다. 얼굴을 익히고나서 다시 일이 생기면 같이 해야 할 일이다.

점심 무렵, 손님들이 왔다. 겨자씨와 불씨가 손님맞이를 하고 나머지는 각자의 일을 했다. 저녁 식사를 하고는 작은 방에 불을 넣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학교로 내려가고 혼자만 남았다. 밤새가 울고 가을벌레 소리가 요란하다. 종이도 젖고 나무도 젖어서 불붙이기가 쉽지 않다. 겨우 불을 지폈다. 아궁이 앞에 앉아 타오르는 불을 바라보았다.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지난다. 매운 연기를 피하느라 하늘을 보니 어둠 속에서 나를 굽어보는 커다란 상수리나무가 눈에 들어 왔다. 나는 내 안의 상념에 잡혀있었어도 그런 나를 바라보는 우주의 허허롭고 넓은 마음이 느껴진다. 집 뒤에는 언덕에는 집보다 세배나 키가 큰 나무들이 내려다보고 있다. 대문 앞에서 집을 바라보노라면 그 커다란 나무들이 집을 포옥 안고 있는 듯 하다. 밤에 올려다보는 그 나무들은 더욱 장하게 느껴진다. 고양이 세 마리가 살금살금 불 밑으로 찾아왔다. 사람을 봐도 도망가지 않고 무엇인가를 열심히 찾는다. 불 밑으로 찾아드는 여치를 잡아먹기 위해서다. 고요한 밤하늘엔 별이 쏟아질 듯 하다. 내일을 날이 좋을 모양이다. 홀로 있는 시간을 즐기는데 전화가 울렸다. 홀씨다. 손님들과 함께 모닥불을 피우고 청주를 한잔씩 돌리는 모양이다. 좋은 자리에 빠진 식구를 챙기는 홀씨의 마음이 정겹다. 불길을 몰아놓고 손을 씻었다.

모닥불 가에는 벌써 술이 한 순배 돌고 있었다. 어두운 하늘아래 아이들과 어른들이 모닥불을 바라보며 옹기종기 모여 있는 모습이 아름답다. 인사를 하고 자리에 끼었다. 20년 만에 이런 자리를 가져본다는 아주머니가 있었다. 기왕에 추억을 만드는 김에 확실하게 만들자는 생각으로 기타를 잡았다. 별을 노래하고 추억을 노래하며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아이들과 어른들이 목소리를 모아 부르는 노래가 별이 되는 듯 밤하늘의 별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겨자씨의 액매기(액 막이)타령이 구성지게 밤공기를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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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4-02-28 1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홍화씨'라는 분의 글을 읽으니, 마치 한 편의 짦은 영화를 본 듯합니다. 황토방 주변의 나무들과 새소리가 손에 잡힐듯이, 그리고 매캐한 아궁이의 연기 내음이 코 끝에 와닿는 것 같네요.
님이 올린 글들을 읽으며, 님과 주변분들하시는 일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알 수 있는 기회가 되어 기쁩니다. ^^

김여흔 2004-02-29 0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홍화씨는 춘천에서 양주로 이사하셔서 글 쓰는 일과 출판쪽 일을 하고 계시죠. 그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방에 제가 잠시 기거했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