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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궁전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3월
평점 :
요근래 가장 재미있게 읽었다. 오랜만에 소설에 푹 빠진 느낌이다.
M.S.포그라는 한 청년의 '성장' 소설이라 할 만한 이 작품은 설렁설렁한 듯하지만 그 담백함이 오히려 몰두하게 만든다. 사생아로 태어나 어머니도 일찍 잃고 플루트 주자인 외삼촌과 살아온 포그는 그 외삼촌마저 세상을 떠나자 상실감에 빠져든다.
삼촌이 남겨준 만여 권의 책과 얼마되지 않는 돈도 떨어지고 센트럴 파크에서의 노숙자 생활을 '택한' 그가 기아와 외로움을 '이겨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빠져드는 초반부의 이야기는 매우 흥미로왔다. 그는, 우리가 흔히 배워왔고 이야기하고 믿듯이, 자신에게 닥친 고난과 역경을 악착같이 이겨내는 건전한 청년이 아니라 밑바닥까지, 갈 데까지 가보자는 - 사실은 그마저도 아주 적극적인 의지가 아닌 듯한데 - 약하고 단순한 인물이다.
그가 쓰레기통을 뒤지고 한뎃잠을 자고 세찬 비에 어쩔 줄 몰라 하는 장면들은 안쓰럽다기 보다는, 어쩌면 그가 그 상황에서 벗어날 것이라 예상했기 때문에, 통과의례 정도로 느껴지면서 그래 조금만 힘을 내, 하고 응원하고 싶어지게 만들었다.
키티 우라는 중국계 여자와 친구의 도움으로 '극한' 상황에서 구출된 포그가 한 눈먼 부자 노인의 집에 들어가 그의 시중을 들면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듣는 것이 중반부. 괴팍하지만 감수성이 예민하고 뭔가 신비한 이야기를 숨기고 있는 듯한 노인 에핑의 젊은 시절 '모험담'을 듣는 것 또한 매우 흥미진진하다. 에핑은 이미 한 번 '죽은 사람'이며 그의 존재는 숨겨져 있다. 사지(死地)에서 살아온 사람치고는 그다지 선량하거나 '인간 승리의 표본'이라고 할 수 없는 점 또한 포인트. 하지만 신체적인 죽음보다 정신적인 고독과 '의미 없음'에 대한 절절한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사람이다.
(표지글에 '주인공 3대'라는 문구가 분명히 있었지만 솔직히 나는 책을 후반부까지 읽어나가면서 누가 포그의 아버지인지 짐작하지 못했고 포그의 아들이 등장하는 걸로 바보 같은 상상도 했다.)
후반부에 등장하는 또다른 인물 - 역시 극한에 가본 바 있는 - 에핑의 아들 바버는 사랑의 실패, 기회의 어긋남을 경험한 후 스스로 고독의 길로 들어선다. 이들 세 사람의 만남과 헤어짐은 절묘하게 구성되어 있어 그것들이 작위적이거나 어색하다는 느낌은 주지 않았다.
<80일 간의 세계일주>의 주인공 이름과 같았던 포그, 오랜 여행과 넘치는 이야기를 경험하고 결국 다시 혼자가 된다. 서쪽 해안 끝, 세상의 끝에 홀로 선 포그는 그곳에서 자신의 삶이 시작된다고 말한다. 그다지 큰 목표나 바람 없이 살아왔던 포그 치고는 장족의 발전이다. 그가 커다란 희망을 이야기하다니 말이다. 역시 극한의 고독과 슬픔을 이겨낸 결과일까. 그의 젊음이 '달' 착륙 시점부터 시작되었고 그가 새로운 희망을 품는 서쪽 해안에서 '달'을 바라보는 것으로 끝나는 이 소설은 포그가 내내 동경하던 공간, 레스토랑 '문팰리스'와 아주 절묘하게 겹쳐진다.
그다지 힘을 주지 않고도 쿨하면서도 담백하게 한 청년의 이야기를 맛있게, 감칠맛 나게 풀어놓는 작품. <호밀밭의 파수꾼>과 여러 모로 비견할 만하다. 포그가 이후 어떻게 살고 있는지 후속편은 없을까 모르겠다.
에핑이 포그에게 '그 그림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상상하며 보라고 했던 블레이크록의 <문라이트>를 나 역시 제대로 감상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