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성평등에 반대한다 도란스 기획 총서 1
정희진 엮음, 정희진.권김현영.루인 외 지음 / 교양인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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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하기 전에 결혼은 하나의 '제도'일 뿐이라고 안일하게 생각했던 것을 후회한다. 같이 삶을 영위하는 문제인 만큼 더 꼼꼼하게 합의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무엇을 합의해야 할 지조차 모른 채, 시댁과 관련된 문제나 경제권과 관련된 문제, 가사 문제 등에 대해 논의하는 과정에서 내가 느꼈던 불합리와 '고구마'를 10박스 먹은 것 같은 답답함을 겪으며 '나는 다를 것이고 그 사람 역시 다를 것이다'라고 생각했던 너무나도 흔한 착각에 빠져 있음을 비로소 자각했다.

 

페미니즘이 '선택'이 아니라 '필수'로 내게 인식된 것은 2013년에 결혼한 내가 당시 느꼈던 부조리를 설명해줄 수 있는 유일무이한 인식론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덕분에 나는 여러 모로 '계몽'되었다. 무엇보다 가장 큰 이득은 페미니즘이 여성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페미니즘 이론을 공부하면서 나는 여성이 그러했듯, 소수자로서 온갖 인식론적 배제와 차별의 그늘에 놓여 있는 소수자들의 문제를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그런 점에서 페미니즘이 '양성평등'을 지향하지 않으며 오히려 남성과 여성을 이분법으로 나누는 인식론 자체를 공격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오래 묵었던 체증이 내려가는 것처럼 나는 '나'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고 고정된 '정체성'이 있지 않다는 사실에 확신을 가지고 나의 몸과 '나'를 있는 그대로 긍정할 수 있었다. 지금의 '나'와 과거의 '나'와, 또 앞으로 변화하게 될 '나'에 대해서까지.

 

남편에게 페미니즘이 나를 이렇게 변화시켰다고 말하며 페미니즘은 양성평등이 아니라고, 내가 페미니즘과 관련된 모임에 나가면서 알게 된 '퀴어'들은 단순히 남녀 평등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다름'은 인정하고 성차로 인한 배제와 차별에 저항하려는 것이라고 말했었다. 나는 부족하기만 한 내 말은 더 이해가능하고 명징한 형태로 제시하고 있는 이 책을 남편에게 읽어 보라고 하였다. 남편이 이 책을 읽고 페미니즘에 대해 가졌던 편견을 조금이라도 바꿀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 책 전에 내가 읽어보라고 한 레베카 솔닛의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를 읽고는 별 감흥이 없었던 모양인데, 이 책은 한국의 현실에 기반해서 최근의 논의들을 아우르고 있느니 만치 조금은 다르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이 책을 읽고는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남편이 '토론'이라고 주장하는 방식이 아니라) '대화'를 해 볼 수 있기를.

 

서로가 이성애자(일 것이)라는 지나치게 당연시 되어온 '전제' 혹은 '규범'을 받아들여서 결혼에까지 이른 우리에게, 페미니즘이 앞으로 어떤 변화를 가져오게 될 지 모르겠다. 같이 많이 이야기하고 존중하고 이해하면서 헤쳐나가야 겠지. 그래서 나 스스로도 결혼이 '제도'일 뿐이라는 생각에서, 긍정적인 방식으로 벗어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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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사 기담
양진채 지음 / 강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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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벚꽃이 휘날린다고, 첫눈이 온다고 사진을 찍어 보내고 문자를 해주던 그가 이제 곁에 없다."

 

이 문장에 심장이 내려 앉았다. 소설이 끝나고 <작가의 말>의 첫문장이다.

이런 문장 같은 것을 쓰기 위해 소설을 쓰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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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따위 자본주의는 벌써 끝났다 - 여성주의 정치경제 비판
J K 깁슨-그레엄 지음, 엄은희.이현재 옮김 / 알트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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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화에 대해 의심하고 자본주의의 신체를 퀴어화함으로써 우리는 여러 색다른 스크립트들을 위한 공간을 열어젖힐 수 있으며, 색다른 결과들의 실현에 참여할 다수의 색다른 행위자들을 불러모을 수도 있다."

 

이 한 문장을 건진 것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로운 책. '강간 스크립트'에 대해 다루고 있는 6장은 논란이 될 법하지만 한번 생각해볼 만한 문젯거리를 던져준다. 나와 지향하는 방향이 '거의' 비슷하지만 다른 부분들을 통해 고민을 벼릴 수 있게 해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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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코의 미소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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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의 고통에 대한 접근법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동정, 연민, 동감, 통감..)
고통받는 타자가 자기 외의 고통받는 타자에게 다가섬으로써 어떻게 다른 사람이 되어가는가. 뒤늦은 후회와 그 후회를 갚아가면서 성립되는 관계들. 혹은 끝내 성립되지 못하였던 관계에 대한 애도사.
한국문학의 '단편'이라는 형식의 특수성(이라 쓰고 한계라고 읽는다)에 대해 생각해보게 하다. 한 인간의 내면의 결을 붙잡아 내기에 한국문학 특유의 '단편'은 분량이나 현재까지 고정되어온 스타일에 있어 뭔가 부족함을 느끼게 한다. 만족스럽지가 못하다. 어쩌면 이 소설이 가지고 있는 '착함'에 대한 나의 거부감이 '형식'에 대한 불만족으로 표출되고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충분히 좋은 소설집임에도, 그렇다는 것은, 이 작가에게 장편을 기대해서인가.
<쇼코의 미소>는 캐릭터 설정에서부터 치밀하게 잘 짜여졌다고 생각했고 특히 주인공 소유의 '할아버지'가 인상적이었다. 이런 식의 캐릭터는 그다지 등장한 적이 없지만 충분히 나왔어야 하는 인물이었다는 점에서.
<씬짜오, 씬자오>는 배경이 독일이면서 베트남 전쟁 이야기를 하고, 그러면서 가해자와 피해자의 역할 뒤바뀜에 대해 '독일'에서 말한다는 것이 이 작가의 영리함을 돋보이게 하였다. 위안부 할머니들이 베트남 전쟁 피해자들과 만났다는 기사가 생각났다. 고정된 피해자, 가해자는 없다. 그것을 만들어내는 구조 안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는 데서 함께 느껴야 하는 '죄책감'의 성격은 무엇일까를 생각했다. 내가 저지른 죄가 아님에도 죄를 나누어서 살아가는 존재로서의 '우리'.
<언니, 나의 작은, 순애 언니>에서는 채만식의 <치숙>에서 느꼈던 무력한 남성지식인(과거이자 현재로서의 '운동권')에 대한 복잡한 내면풍경을 담고 있다. 아내의 등골을 빼먹고 사는 남성지식인에 대한 평가는 채만식의 소설만큼 연민이 담겨 있지는 않다. 그럼에도 과거에 그래왔듯이 신화화하지도, 그렇다고 요즘의 정서와 부합(?)하는 식으로 비난 일색이지도 않다. 서술자의 엄마가 계속 부채감에 시달리다가 마지막에 '용서'(?)를 받는다는 식의 설정에 대해서는 어쩐지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있어서...
<한지와 영주> '단순함'이라 쓰고 '무신경함'이라 읽는다. 이 '무신경함'에 대해 <씬짜오, 씬짜오>의 일구절을 빌려서 말하자면 '몰라서 미안해'라고 할 수 있을까. 칸트가 생각난다. 모르는 것도 죄라고 했던. 여기서 알고 모르고의 차원이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은 당연한 것. 죄인지 모르고 저질러놓고(말해놓고) 나중에 생각해보니 죄였다는 것은 <쇼코의 미소>에서도 반복되는 인식의 구조.
<먼 곳에서 온 노래> 내가 이 책의 편집자였다면 이 소설의 제목은 다른 것으로 바꾸었을 것이다. '운동권'에 대한 반감은 이 소설에서는 다소 노골화된다. 엄밀히 말하면 '운동권'입내 하면서 20대 개새끼론을 펼치는 기득권 386에 대한 분노와 염증이겠으나. 후련하면서도, 소설에 등장하는 '미진'역시 지나치게 전형화되었다는 느낌이..
<미카엘라>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를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는 이 소설에 재현되는 '엄마'의 전형성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 재현이 그저 현실의 '반영' 뿐은 아니라고 한다면 이러한 '엄마'의 전형성은 이제 그만 나올때도 되지 않았을까. <쇼코의 미소>의 '할아버지'에게서 다소간이라도 느꼈던 신선함이 다른 소설에서도 발견될 수 있었으면 싶다.
<비밀> 뭐가 '비밀'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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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그래도 수업을 하는 데는 자신이 없어서 그동안 한 수업에 대한 평을 잘 보지 않으려고 했다. 충북대는 평가를 보지 않으면 성적을 매길 수가 없어서 봤더니 생각보다 평들이 나쁘지 않았고(수업 진행이 너무 주관적이라는 지적이 있기는 했지만) 한림대는 수향 언니 말로는 평이 나쁘지 않다고 했고.. 그래서 내가 더 재밌게 했다고 생각한 서울대 평가도 나름 기대를 했는데

 

역시 서울대 애들은 뭔가 평가가 엄격하다. 자신들이 누군가를 '평가'한다는 입장이 누구보다 확고한듯. 계절학기의 특수성(고학번, 재수강이 많다는 점)이 있어서인지 강의를 통해 무엇을 얻었고 무엇을 고쳐야 하는지가 냉정하게 평가되고 있어서 조금 충격을 받았다. 인정이 없다는 것이 이런 말일까. 한달 여간 주3일씩 보면서, 그리고 서로가 쓴 글들을 읽고 평을 하면서 개개인들에 대해 알아간다는 느낌이 있었는데 이 친구들은 그저 이 '수업'을 통해 자신이 무엇을 얻어갈지에 대해 '계산'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한 태도가 좋고 나쁘고 평가하는 것을 떠나 이 친구들은 내가 수업을 즐긴만큼도 '수업'을 즐기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수업 준비를 충분히 하지 못했다거나 인문학적 글쓰기에 치우쳐 있었다거나 '특별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거나 하는 평을 떠올리면 지금은 실소가 나온다. 나 역시 내가 즐기지 못한 수업에 대해서는 가혹한 수업평가를 하기도 했으니 남의 얘기만도 아닌 셈이다. 수업을 한다는 것, 수업을 듣는다는 것. 무엇을 위한 것이고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글쓰기 수업을 통해 학생들이 원하는 것은 자기 글에 대한 피드백이고, 그 피드백이 단순히 잘못된 점을 지적하는 것을 넘어 어떻게 써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것이라고 했을때 내 수업이 그런 지점들을 만족시켜주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거기에는 이 수업 하나 듣는다고 해서 학생들 글쓰기 실력이 비약적으로 늘지는 않는다는 자조와 냉소가 한몫했으려나. 그럼에도 수업을 하는 동안 학생들의 글을 읽으며 감탄을 했었는데, 그건 그저 고학번, 재수강이라는 요소가 작동했기 때문일뿐인지도 모른다.

 

결국 나 혼자 들떴다가 배신감을 느끼고 있는 것인지도. 계절학기라는 한계가 있기는 했지만 어떤 식으로 강의를 하면 좋을지에 대한 고민은 계속 하게 된다. 학생들도 '학점'을 따는 것을 넘어 수업을 즐길 수 있게 하려면 어떤 식으로 커리를 운영하면 좋을까. 나만 재미있는 수업이 아닌, 수업을 듣는 학생들에게도 도움이 되고 그러면서도 수업을 즐길 수 있게 하기 위해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해 봅시다.

 

어쨌든 피드백을 받는다는 것은 좋은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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