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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성의 종말 경성대문화총서 1
지안니 바티모 지음, 박상진 옮김 / 경성대학교출판부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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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근대성의 종말>을 다 읽었다. 교정을 제대로 보지 않아서일까. 너무 많은 오타가 눈에 띈다. 어떤 부분은 문장이 이어지지조차 않아서 당혹스러웠다. 그럼에도 니체와 하이데거의 허무주의를 다루는 관점에 있어서 흥미로운 책이 아닐 수 없다. 사실 이 책의 저자 바티모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여타 포스트 모더니즘 이론가들에 비해 낯선 이름인 것이 사실이다. 이 책 역시 몇몇 흥미로운 관점들을 접할 수 있었던 반면에 심도 깊은 논의가 이뤄지지 않는 점은 아쉬웠다.

가령 허무주의를 '숙명(fate)'가 아니라 '운명(destination)'이라고 한 대목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내가 논문에서 다루려고 하는 관점과 일치해서 그렇겠지만. 여기서 '운명'이라는 것은 그것이 정해진 순서,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것으로서가 아니라 도달해야 하는 종착지(destination)의 의미를 지닌다는 것으로 읽을 수 있겠다. 프랑크푸르트 학파를 비롯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근대에 대해 지니는 위치를 나름 명쾌하게 설명하는 점도 재밌다(진정성의 파토스!). 들뢰즈를 니체의 관점을 오독했다고 비판하는 부분 역시(<차이와 반복>에서 들뢰즈가 시뮬라크르에 영광을 돌리는 것은 니체가 쳐놓은 올가미에 걸린 것이라는). 

 

책 내용을 따라 읽어보면, 우선 역자 서문에서 지적하듯, 바티모는 <존재는 자신의 위치를 부동의 것으로 보지 않는 "약한" 입장을 고수함으로써, 자신의 자리의 변화에 따라 끝없이 변화로운 시각을 가질 수 있게 된다.>(14)고 본다. 여기서 '약한' 입장이라는 것이 허무주의적인 태도를 가리키는 것이다. 신이라고 하는 절대적인 가치가 무너진 이후 인간은 각자 '약한'입장에 처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는데, 그것이 주는 장점을 받아들여 허무주의를 일종의 운명으로 보자는 것이다. 이것을 하이데거의 용어로 설명하면 세계에 대한 '열림'의 태도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즉, 허무주의의 계획은 모든 이성체계가 설득의 체계라는 것을 폭로하고 형이상학적 합리적 사고의 기반이 되는 논리가 일종의 수사임을 보이는 것이다. 이런 데서 장식으로서의 예술을 옹호하는 관점이 출현하는데, 이는 또한 데리다의 입장을 상기시킨다. 또한 프루스트의 소설을 떠올리게 만든다(자질구레한 것들에 대한 프루스트의 그 많은 수다들에 진리가 있다). 

 

그렇지만 바티모가 '심화적 극복'이라는 개념을 고수하는 것은 다 나름의 이유가 있다. 그가 한국어판 서문에서 밝히듯이, 로티와 데리다는 형이상학적 보편주의를 아무 위기도 없었다는 듯이 계속 추구하거나 그 보편주의를 죽은 말처럼 취급하기 때문이다. 이들과 달리 바티모는 <약하고 세속화된 어떤 것을 빌어><합리적 보편성의 개념을 재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세속화라는 개념이다. <신성한 지평에서 떨어져 나간다고 해서 종교에서 손을 뗀다는 말은 아니다. 그보다 오히려 성스러움의 진리를 더욱 정통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기독교의 정신이 민주주의와 평등, 그리고 사회적, 정치적 권리의 근대적 발명에서 어라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왔던가를 생각하면>(60)서 바티모는 <우리의 선택은 무제한적이지 않으며, 우리 선택의 기준은 어떤 영원하거나 초역사적인 진리를 추정한다든지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운명 자체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찾아야 한다>(62)고 말한다. 아름다운 문장이 아닐 수 없다. 

 

이에 따라 우리가 세계의 경험에서 만나는 것은 해석에 불과하게 된다. 세계의 사물은 우리의 주관적 가치에 의거해 해석된다. 역자의 설명처럼 이는 데리다, 들뢰즈, 푸코, 리오타르의 철학과 연결된다. 이런 점에서 근대는, 혹은 허무주의, 혹은 세속화, 역사의 종말 등은 극복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심화적 극복'(이것은 하이데거가 사용한 개념이다)의 대상이 된다. 도그마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점에서. 이를 니체의 '성취된 허무주의'와 하이데거가 존재가 교환가치로 변형된다는 하이데거의 주장과 연결되는데, 이와 같이 존재를 가치로 소비한다는 것을 긍정한다는 점과 그리고 더불어 인문주의의 위기를 주체성의 위기로 보면서도 그것을 부정하지 않고(슈펭글러나 블로흐와 달리) 이를 통해 오히려 기존의 형이상학 전통을 심화시키면서 극복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쳐나간다는 것이 재밌는 지점이다.

 

물론 하이데거가 바티모의 주장대로 인간이 가치로 소비된다는 것을 어느 정도라도 긍정하고 있는지(이것은 기존에 내가 알던 하이데거와는 완전히 다르다, 그러니까 하이데거가 반인문주의자라는 바티모의 지적은 타당한가?) 또 그가 말하는 심화적 극복이라는 개념이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가 여전히 모호해서 이 부분을 논박해볼 필요는 있을 것 같다. 특히 하이데거와 관련해서는 그의 예술론에 등장하는 '대지'의 개념이 아주 중요하게 다뤄질 수 있겠다.

<대지는 그 자체로서의 실존이며, 언제나 새롭게 주의를 그는 어떤 것으로 표명되는 구체적인 나타남이다.>(148)

<대지는 예술작품의 지금 여기이며, 모든 새로운 해석은 언제나 그리로 돌아가고 언제나 새로운 읽기로 나아가며 따라서 새로운 가능한 세계로 이끄는 것이다.>(149)

하이데거의 '대지' 개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이 '보여줌(Zeigen)'의 의미이다. 여기서 바티모는 하이데거의 말을 직접 인용한다.

<"언어는 보여줌이다. 그러나 사물을 보여주기 위한 도구라는 말은 아니다. 보여줌은 특히 모든 사물이 사각형의 거울 게임에서 비추어지도록 만든다는 의미에서 "나타나게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 말이 파괴되는 영역인 보여줌은 사물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을 그 사물이 속하는 세계의 지역들의 틀 내에서 또는 거기에 가깝게 위치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필멸의 존재이기 때문에 그 사각형에 속한다.>(157)

<사물 자체로 나아간는 것은 그 사물을 대상으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현존재가 무엇보다도 스스로의 죽음을 경험하는 언어의 표류게임에서 그 사물을 만나는 것을 의미한다.>(161)

 

하이데거에게 시가 중요한 것은 <언어가 부서지는 것, 또는 파괴되고 부서지는 것으로 떠오르는 곳은 다른 어떤 곳보다도 바로 시에서이기 때문이다>(162) 하이데거는 "'이다'는 말이 부서지는 곳에서 떠오른다'고 <예술작품의 근원>에서 말한 바 있다. 그런 의미에서 다음의 역설을 견뎌야만 시가 된다. <파괴는 곧 기념비와 공식의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말의 완전성을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약화와 죽음의 모습에 순응하는 것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그리스 신전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자연스러운 사물"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공식과 기념비가 되는 것에서는 시적인 말의 파괴의 두번째 의미가 예고된다. 만일 기념비가 되면서 시적인 말이 죽음의 모습 안에서만 지속하는 것으로 준비되면서 파괴된다면, 기념비성은 또한 드러냄과 감춤의 이중적인 요소들로 명백하게 특징지워지는 진리의 일어남의 양상을 시사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하이데거가 말한 세계와 대지의 대립 속에서 실행되는 "진리의 작동"으로서의 예술작품의 정의에 다름 아니다.

 

한편 예술작품에서 진리가 작동한다고 보는 니체와 하이데거의 관점은 바디우의 예술론을 상기시킨다(아마도 이는 바티모가 8장에서 비판하는 가다머와 마찬가지로 바디우가 예술의 윤리성을 중시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나 이렇게 되면 진리의 허무주의적 성격을 말하기 어렵다), . 바디우는 예술을 다시 철학보다 하위적인 항목으로 강등시킨 감이 있는데 하이데거나 니체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 <진리는 사건이기 때문에 기념비이면서 언어의 파괴의 모습으로 일어날 수 있다. 시의 경험에서 우리는 형이상학적 진리를 회상할 수 있지만, 그 진리는 오직 그 이전의 거드름을 상실한 어떤 것으로 다가오며, 모든 흔적처럼, 신화와 기억처럼, 필멸의 특징을 지닌다. 따라서 시가 기초하는 의미의 세계는 토대를 결여한 세계다.>(32) 역자의 설명이다. 형이상학이 죽음을 맞이하였으므로, 철학의 역할은 그 죽음을 확인시켜주는 것일 뿐일까. 사회학, 인류학, 정신과학 등 새로운 학문 분과의 출현은 형이상학의 죽음과 무관치 않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예술이다. 예술은 근대성의 논리에서 벗어나 역사와 시간을 경험하게 하는 비연속적 역사성의 미적 모델이다. 여기서 <탈근대의 미적 의식은 우리에게 허무주의적이라 불리는 진리의 약한 경험을 제공한다>(36).

 

9장 문화인류학에 대한 로티와 바티모의 견해차를 보면 '심화적 극복'의 개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로티는 문화인류학이 타자의 문화를 해석하려는 해석학적 소명을 지니기 때문에 중요하다고 하는데 반해, 바티모는 그것이 순진한 환상일 수 있음을 지적한다. 하이데거가 <타자의 문화와의 대화가능성은 지구와 인류의 완벽한 유럽화에 의해 위협당한다>라고 지적한 것을 들면서 말이다. 가령 인류학자들이 지구촌 어딘가의 원시부족집단의 평화로운 삶을 보여주면서 그것을 근대의 폭력성에 대한 치유로 발견할 때, 그러한 시선 역시 근대적인 시선이라는 점을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 '심화적 극복'의 의미가 아닐까 싶다. 맞다. 이는 역시 데리다의 '해체'를 생각나게 한다. 역자도 이렇게 정리한다. <탈근대의 경험은 서구문화에서 해체와 함께 처음으로 가능하게 되었다.>(40) 이는 한국어판 서문에서 저자가 데리다의 해체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을 함께 참고할 수 있다. <해체는 완전무결하게 보이는 그럴싸한 겉치레가 차연의 틈에 의해 전면적으로 균열되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54)

 

특히 8,, 9, 10장을 정리하는 다음 부분은 이 책의 내용을 잘 정리하고 있다. <존재의 경험은 시간의 폐허를 가로질러 오는 전달의 수신이자 응답의 경험이다. 그래서 존재론은 해석학이 된다. 해석학적 존재론의 입장에서 볼 때 존재 자체로 남는 것은 없고 오직 파편과 흔적, 잔여물만 남는다. 그래서 존재는 약하다. 이런 식으로 존재의 경험에 접근할 때 우리는 심화적 극복의 개념에 의거하여 전통에서 전달된 것을 다시 모으고 해석하고, 따라서 언제나 비틀고자 한다.>(역자의 말, 41)

 

마지막으로 역자는 바티모가 서구의 입장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점을 다소 비판적으로 보는 것 같은데, 이는 바티모의 관점에서 보면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푸코가 그러했듯 자신이 알지 못하는 현실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는 것은 너무나도 윤리적인 태도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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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를 기록하다 - 침몰·구조·출항·선원, 150일간의 세월호 재판 기록
오준호 지음 / 미지북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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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드문 논픽션의 수준높은 경지를 보여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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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탠 바이 미 - 스티븐 킹의 사계 가을.겨울 밀리언셀러 클럽 2
스티븐 킹 지음, 김진준 옮김 / 황금가지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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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볼 때의 애처로움과

그렇게 노력하는 자의 마음을 어떻게든 헤아려보려는

소년들의 우정이 주는 찡한 느낌

"제일 중요한 일들은 말하기도 제일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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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D] 페드르 큰글 세계문학전집 9
장 바티스트 라신 지음, 장성중 옮김 / 큰글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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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라신, 페드르, 만남 출판사

 

페드르: 하느님 맙소사! 오늘 내가 무슨 일을 저질렀지? 이제 내 남편이 나타날텐데. 그리고 그의 아들도 함께. 내 정념의 불길을 목격한 그 증인이 내가 어떤 낯으로 자기 아버지에게 다가가는지 주시하는 따가운 시선을 느끼게 되겠지. (73~74)

 

페드르: 그의 안하무인의 눈빛 속에 나의 파멸이 분명히 적혀 있구나. (79)

 

 

이 희곡은 어릴 적 장세니즘(Jansenism)의 중심지인 포르 루아얄에서 교육을 받은 라신의 이력을 떠올리게 한다. 한편으로는 신의 예정과 은총의 절대성을, 다른 한편으로는 원죄 이후의 인간의 무력함을 강조하는 장세니즘은 <페드르>에서는 정념에 무력한 페드르의 모습과 무고한 죽음을 맞는 이폴리트를 통해 표현된다.

 

그런 점에서 이 책에 붙어 있는 각주 117의 설명이 인상적이다. “여기서, 사랑에 버림받은 자의 정념에 대한 어떤 공식이 성립된다. , 그들은 정념에 이끌린 비참의 절정에서 상대방을 죽일 것인가 아니면, 자살을 할 것인가의 기로에서 어느 한 쪽의 선택을 강요받게 된다.”

 

인간이 아무리 선행을 한다고 해도 구원을 받을지 말지를 결정하는 신은 인간에게 철저히 무관심하다. 최근 바디우와 아감벤이 말하는 사도 바울의 사상 역시 이러한 장세니즘과 연관되어 있다.

 

선행(virtue)과 은혜(grace)의 이러한 엇갈림에 대해서는 지젝이 히치콕과 함께 라깡에 대해 알고 싶었지만 히치콕에게 물어보지 못한 것에서 설명하고 있기도 하다. 이 책에서는 79쪽 페드르의 대사가 "그의 불손한 응시 속에 나의 파멸이 크게 써 있도다"라고 번역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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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을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 있을까? - 관리되는 민주주의와 전도된 전체주의의 유령
셸던 월린 지음, 우석영 옮김 / 후마니타스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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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미국이 건강한 민주주의 체제였다면, 이 사건을 야당을 점화시켜 의회에서 필요한 만큼의 충분한 기간 동안, [선거] 쿠데타를 고발하도록, 그 적법성을 두고 싸우도록 했을 것이다. 선거라는 협상불가능한, 민주주의의 한 가지 주춧돌에 대한 냉소적 전복이라는 사태에 대응해, 전국적으로 거대한 저항 운동이, 적어도 총파업과 시민 불복종 운동이 있어야 마땅했다. 하지만 우리가 목도한 것은 불만의 물결이 미미한 가운데 거행된, 적법성에 하자가 있는 대통령의 취임식이었다. 축하 행사의 전문가들과 언론들은 이 취임식이 모든 과거 취임식과 유사한 것처럼 보이도록 만전을 기했다. 정치적으로 공화당원들에게 일찌감치 패배한 바 있는 전임 대통령[빌 클린턴]이 지켜보는 가운데, 권한이 이양되고, 연속성은 보존되는 것처럼 보였다. 이로써 헌정 민주주의는 사망했다. 대통령 만세! (p.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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