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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시집 외 ㅣ 책세상문고 세계문학 1
장용학 지음 / 책세상 / 2002년 12월
평점 :
품절
해방기, 전후 작가들의 작품을 찾아읽다보면 작품도 특이하지만 이력부터가 남다른 경우가 많다. 손창섭이 그렇고 서기원이 그렇다. 장용학의 경우에는 문학을 하게 된 계기가 특이한데, 1942년 와세다에서 공부하다 2학년에 학병으로 제주도에 복무했는데, 해방을 맞아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교통사고를 당해서 누워했다가 친구에게 받은 오키의 [희곡론]을 읽고 희곡을 읽어야 겠다고 결심하는 것이다. 다리 부상이 회복되어 청진여중에 교사로 부임하고 여기서 예술제에 공연할 각본을 쓰게 되는데, 3.1운동을 소개로 한 것이 시인민위원회에서 상연금지 명령을 받아서(교장의 허락으로 공연을 하긴 했지만) 공산당 정권 아래서는 자기가 쓰고 싶은 작품을 쓸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한 그는 1947년 9월 월남하게 된다.
그런데 월남하고보니 남한에서는 관객의 대부분이 어린아이인 것을 보고 실망해서는 소설로 진로를 바꾸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후 장용학은 소설을 쓰면서 1961년 5.16쿠데타가 일어날 때까지 경기고에서 교사생활을 했고 이후 덕성여대 교수로 부임했다. 1973년까지 경향신문, 동아일보에서 논설위원으로도 활동했는데 군사정권에 반대하다 안기부에 끌려가기도 했고 결국 유신체제가 공고히되지 해직되었다. 이후 거의 바깥 출입을 하지 않고 지인들과도 접촉하지 않았다는데 이는 일본으로 건너가버린 손창섭을 떠올리게 한다.
이 책에서는 두꺼비를 숭배하게 된 근대주의자의 이야기를 다룬 [미련소묘], 언청이의 재생에 대한 소설 [육수], 그리고 [요한시집]을 읽었는데, 앞의 두 작품에 비해 [요한시집]은 여전히 문제작임에 틀림없다. 이 작품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는데, 토끼에 대한 우화가 실린 부분, 누혜(요한)의 예언을 실현하기 위해 그의 어머니를 찾아나선 동호(예수)에 대한 부분, 그리고 누혜의 유서가 실린 마지막 부분이 그렇다.
우화에서는 이 소설에서 '자유' 혹은 칸트적 의미에서의 '자율'을 비꼬는 희미한 문맥을 읽어낼 수 있는데, 피투성이가 되어 나왔음에도 햇빛을 보자마자 바로 눈이 멀어버린, 그리고 그 자리에서 더이상 벗어나지조차 못하는 토끼를 우상인양 숭배하게 되었다는 언급을 통해 이를 알 수 있다(플라톤의 동굴의 우화를 떠올릴 수 있겠다). '자유'가 얼마나 허무맹랑한 구호에 불과한 것인지,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답답함을 느끼는 순간 거기에서 어떻게든 빠져나오려 하지만 그것이 결국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는 것일 뿐이라는 것. 이는 누혜의 삶이 대변하는 것이기도 하다.
토끼의 우화와 누혜의 우화 사이에 동호의 이야기가 끼어 있는 셈인데, 여기에 주목되는 몇 구절을 적어둔다.
<무엇보다도 성실하게 살아야 한다. 진리를 찾는다고 애매한 제스처를 부려서는 안 된다. 차라리 그 진리를 버려야 한다. 그런 제스처 때문에 이 공기가 얼마나 흐려졌는지, 그것을 정확하게 계량해낼 수 있다면 우리는 살아 있는 것이 시시해질 것이다.>(64)
하지만 그가 맞닥뜨린 것은 누혜의 어머니, 아니 인간이 빠져 있는 역사의 비참이다. 그 비참에 도무지 '의미'가 없다는 데서 오는 절망이다. 그가 보는 환영은 모든 문명이 종말된 이후 돼지떼가 꿀꿀거리며 행진하는 풍경이다. 소리 없는 행진이 지나가고 나무들의 행렬이 이어지면서 고요한 낙원이 나타난다. 그러나 고요한 대로 있을 수는 없다. 다시 <자유를 보장하는 감찰>을 나누어주는 역사가 도래한다.
<바깥 세계에서는 눈이 시름 없이 내리고 있는데, 이런 역사는 그만하고 그쳤으면 좋겠다.>(80)
김춘수에게서 나타나는 역사허무주의와 다름 없는 관점이다. 포로 수용소에서 누혜의 자살이 데카당의 시작이나 끝을 보여준다면, 그 요한의 계시록 이후 출현한 예수의 임무는 세계에 다시 사랑의 질서를 세우는 것이 아닐까. 이 소설은 동호가 '자유'가 죄를 짓는다는 것임을, 동시에 존재의 무수한 가능성과 연결된다는 이율배반을 깨달으며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를 긍정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과연 실존주의적인 결론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소설의 결론에는 구원도 없으며 사랑도 없다. 다만 실존적 자유를 깨달은 주체가 자신에게 주어진 불분명하기만 한 사명에 눈을 뜨는 여명 직전의 순간만이 그려진다. 전후 소설의 가능성은 여기까지가 아니었을까. 그 여명 직전까지만을 보여주는 것.
하지만 '이런' 역사는 그치지 않았고 그의 '자유'는 더 많은 '죄'로 그를 옭아맬 것이었음을, 장용학의 생애가 말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