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코의 미소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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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의 고통에 대한 접근법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동정, 연민, 동감, 통감..)
고통받는 타자가 자기 외의 고통받는 타자에게 다가섬으로써 어떻게 다른 사람이 되어가는가. 뒤늦은 후회와 그 후회를 갚아가면서 성립되는 관계들. 혹은 끝내 성립되지 못하였던 관계에 대한 애도사.
한국문학의 '단편'이라는 형식의 특수성(이라 쓰고 한계라고 읽는다)에 대해 생각해보게 하다. 한 인간의 내면의 결을 붙잡아 내기에 한국문학 특유의 '단편'은 분량이나 현재까지 고정되어온 스타일에 있어 뭔가 부족함을 느끼게 한다. 만족스럽지가 못하다. 어쩌면 이 소설이 가지고 있는 '착함'에 대한 나의 거부감이 '형식'에 대한 불만족으로 표출되고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충분히 좋은 소설집임에도, 그렇다는 것은, 이 작가에게 장편을 기대해서인가.
<쇼코의 미소>는 캐릭터 설정에서부터 치밀하게 잘 짜여졌다고 생각했고 특히 주인공 소유의 '할아버지'가 인상적이었다. 이런 식의 캐릭터는 그다지 등장한 적이 없지만 충분히 나왔어야 하는 인물이었다는 점에서.
<씬짜오, 씬자오>는 배경이 독일이면서 베트남 전쟁 이야기를 하고, 그러면서 가해자와 피해자의 역할 뒤바뀜에 대해 '독일'에서 말한다는 것이 이 작가의 영리함을 돋보이게 하였다. 위안부 할머니들이 베트남 전쟁 피해자들과 만났다는 기사가 생각났다. 고정된 피해자, 가해자는 없다. 그것을 만들어내는 구조 안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는 데서 함께 느껴야 하는 '죄책감'의 성격은 무엇일까를 생각했다. 내가 저지른 죄가 아님에도 죄를 나누어서 살아가는 존재로서의 '우리'.
<언니, 나의 작은, 순애 언니>에서는 채만식의 <치숙>에서 느꼈던 무력한 남성지식인(과거이자 현재로서의 '운동권')에 대한 복잡한 내면풍경을 담고 있다. 아내의 등골을 빼먹고 사는 남성지식인에 대한 평가는 채만식의 소설만큼 연민이 담겨 있지는 않다. 그럼에도 과거에 그래왔듯이 신화화하지도, 그렇다고 요즘의 정서와 부합(?)하는 식으로 비난 일색이지도 않다. 서술자의 엄마가 계속 부채감에 시달리다가 마지막에 '용서'(?)를 받는다는 식의 설정에 대해서는 어쩐지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있어서...
<한지와 영주> '단순함'이라 쓰고 '무신경함'이라 읽는다. 이 '무신경함'에 대해 <씬짜오, 씬짜오>의 일구절을 빌려서 말하자면 '몰라서 미안해'라고 할 수 있을까. 칸트가 생각난다. 모르는 것도 죄라고 했던. 여기서 알고 모르고의 차원이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은 당연한 것. 죄인지 모르고 저질러놓고(말해놓고) 나중에 생각해보니 죄였다는 것은 <쇼코의 미소>에서도 반복되는 인식의 구조.
<먼 곳에서 온 노래> 내가 이 책의 편집자였다면 이 소설의 제목은 다른 것으로 바꾸었을 것이다. '운동권'에 대한 반감은 이 소설에서는 다소 노골화된다. 엄밀히 말하면 '운동권'입내 하면서 20대 개새끼론을 펼치는 기득권 386에 대한 분노와 염증이겠으나. 후련하면서도, 소설에 등장하는 '미진'역시 지나치게 전형화되었다는 느낌이..
<미카엘라>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를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는 이 소설에 재현되는 '엄마'의 전형성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 재현이 그저 현실의 '반영' 뿐은 아니라고 한다면 이러한 '엄마'의 전형성은 이제 그만 나올때도 되지 않았을까. <쇼코의 미소>의 '할아버지'에게서 다소간이라도 느꼈던 신선함이 다른 소설에서도 발견될 수 있었으면 싶다.
<비밀> 뭐가 '비밀'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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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의 매뉴얼 - 라깡, 바디우, 일상의 윤리학
백상현 지음 / 위고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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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게 읽었고 여러 모로 도움을 많이 받았기는 하지만 이 책에 대해 좋은 평가를 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나도 라깡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개념 사용이 다소 엄밀하지 못한 것 같고. 궁극적으로는이 책에서 설명하는 라깡의 주체론에 대한 견해에 동의하지 못하겠다.

 

무엇보다 허무에서 창조가 가능한 이유를 갑자기 주체의 결단으로 설명하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안티고네의 결단? 안티고네는 무엇을 창조한 것일까? 안티고네는 상징계에 구멍을 뚫은 것뿐이다. 고독했던 광주의 시민군이나 인상파 화가나 안티고네는 우리를 부러워하지 않을 것이라고? 그들이 어떤 기분이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무를 욕망해서는 우울증환자가 될 뿐이다. 무를 향해 나아가는 것과 무를 욕망하는 것을 구분해야 한다. 저자는 이를 엄밀하게 구분하지 않으면서 우울증환자에게 구원자로서의 신화를 덧씌운다. 그러면서 의도치않게 구원자에게 우을증자의 이미지를 부여한다.

 

<영혼의 슬픔>에서 이종영 선생님이 간디의 비폭력운동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도 들었던 궁금증은 허무주의의 극단에 이른 자에게 도대체 '역사'는 어떠한 의미일까 하는 것이었다. 자아나 세계가 허구임을 알면서도 정치운동을 하는 이들은 어떠한 이유 때문일까? 자아와 영혼이 아무런 관련이 없고 대립적인 것이라면 왜 비폭력운동을 하는 것일까?

 

* 이 책에서 말하는 '고독'의 의미가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단순히 주류로부터의 소외를 말하는 것이라면 너무나 편협한 해석이 아닌지. '홀로됨'이 추구하는 것은 주류도 비주류도 모두 허구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일 뿐이다. 진리가 없다는 것의 의미 역시 마찬가지. 단순히 진리가 구성된 것이라는 사실 뿐만이 아니라 그럼에도 여전히 추구해야 할 진리가 있으며 그 진리가 무엇인지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 책에서는 예술가적인 '고독'을 너무 신성시하면서 모더니티의 이념을 부르짖는 데서 더 나아가지 못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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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슬픔 - 두 개의 삶 사이에서
이종영 지음 / 울력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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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으로>를 읽고 후속작을 기다려왔었다. 책을 샀지만 한동안 펴볼 엄두는 나지 않았다. 마침내 책을 펴고 읽기 시작했지만 읽고 나서의 난감함 때문에 여전히 머리가 아프다.

 

마침 하이데거의 니체 강의록을 읽고 있던 와중이었는데, 이 책은 신기하게도 데카르트, 칸트, 헤겔, 니체에 이르는 유럽 형이상학의 역사를 한 눈에 꾀어볼 수 있게 해주었다. 프로이트, 라깡의 정신분석학은 물론이고. 주체, 자아, 물자체, 세계 등 형이상학적 개념의 의미들이 단번에 정리되는 느낌이었다. 그러면서 헤겔의 변증법, 데카르트의 주체론이 지니는 한계와 그것을 넘어서고 있는 칸트와 라깡의 주체론에 대해서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하지만 놀라움과 함께 찾아온 당혹스러움은 이런 것이었다. 그러니까 자아도, 또한 자아가 만들어낸 이 세계도 허구에 불과하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영혼과 신에 대한 그의 주장을 받아들인다는 것이 어떠한 의미인지는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 아니, 이것이 이해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 그렇다면 이것은 행위 그러니까 수련의 문제인데 이 책에서는 수련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것. 이 책 이후 독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조금도 답하지 않고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어서 기쁘다'라고 끝맺는다는 것.

 

이 책 자체가 어떤 기로를 보여주는 느낌이다. 학문과 학문이 아닌 것 사이에 위태롭게 놓여 있는. 자신이 갈 길은 스스로 찾아야 하는 것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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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 평전
최하림 지음 / 실천문학사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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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60년대 시대사나 시인들의 평전을 쭉 읽어가는 와중에 이 책은 그 중에서 여러 모로 추천할 만한 평전으로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좋은 점을 말하기 전에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저자가 밝혔듯이 김수영 어머니의 증언에 많이 의존하고 있어서 다양한 시각을 접할 수 없다는 점. 사실 이것은 이 책 뿐만 아니라 다른 책들에서도 공통적으로 느낀 것인데 한 인물에 대해서 한 가지 관점만 있을 수는 없는 만큼 해당 인물에 대해 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취재원들이 한 인물에 대해 다양한 견해를 밝히는 지점들을 다양하게 보여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점을 제외하면 이 책은 김수영의 삶에 대해 성실하고 진지하게 그러면서도 치우침 없이 전달해주고 있다. 저자가 국문학을 전공하는 연구자이자 시인이기도 해서인지 김수영의 문학사적 가치를 인지하면서 그의 시를 충실하게 해석해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러면서도 김수영의 인간적 면모를 김수영에 대한 신화에 그렇게 얽매지 않고 서술해주고 있어서 막힘없이 술술 읽을 수 있었다. 김수영의 집안 내력에 대한 설명이 특히 인상적인데, 경제적인 계산이 빨랐던 할아버지와 그의 어머니, 아내, 그리고 그의 형제와는 달리 무능력했던 아버지와 김수영 자신의 대비가 재밌었다. 김수영의 시나 산문에 보면 어머니와 아내를 경멸하는 듯한 장면이 많이 나오는데, 이것이 자신의 경제적 무능력에 대한 죄책감일 수도 있으며 그 죄책감을 이런 방식으로 드러낸다는 것이 얼마나 위악적인 것인지를 알면서도 그는 자신의 치졸함을 숨기지 않았다. 물론 나는 이 치졸함마저 '신화'로 만들어버리는 김수영 추종자들의 입장에는 반대하고 김수영 자신이야말로 자신에 대한 '신화'에 대해 가장 모욕을 느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 가지 더. 김수영이 의용군에 끌려 갔다가 포로 수용소에 수감되었다는 사실을 잘 알려져 있지만 그가 끌려갈 당시의 상황은 지나친 반공주의로 인해(특히 고은) 너무 폭력적인 것으로 그려져 왔던 것 같다. 김수영이 직접 쓴 소설을 찾아보고 참고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또 김수영의 두 남동생이 모두 북으로 넘어갔으며 이 때문에 김수영이 반공주의의 공포에 사로잡혔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그가 이어령과 한 '시와 정치' 논쟁에서 마무리를 짓지 못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동생이 남에 내려왔다는 사실로 인해 논쟁 이후 형사에게 끌려가기도 했다는 점(그는 이 논쟁 때문에 끌려간줄 알고 겁에 질리기도 했다)을 생각해보면, 김수영은 투사라기보다는 겁이 많은 싸움꾼이었으되 공포에 사로잡히면서도 그 공포에 지지 않으려고 했다는 점이 조금 감동적이었다. 그는 아무런 겁도 없이 '자유'를 주장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언제 잡혀갈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두려워하면서도 말을 했던 것이다. 아마 자신이 말에 대한 공포에 사로잡혀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인식했기에 이런 주장을 할 수도 있었던 것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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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시집 외 책세상문고 세계문학 1
장용학 지음 / 책세상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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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기, 전후 작가들의 작품을 찾아읽다보면 작품도 특이하지만 이력부터가 남다른 경우가 많다. 손창섭이 그렇고 서기원이 그렇다. 장용학의 경우에는 문학을 하게 된 계기가 특이한데, 1942년 와세다에서 공부하다 2학년에 학병으로 제주도에 복무했는데, 해방을 맞아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교통사고를 당해서 누워했다가 친구에게 받은 오키의 [희곡론]을 읽고 희곡을 읽어야 겠다고 결심하는 것이다. 다리 부상이 회복되어 청진여중에 교사로 부임하고 여기서 예술제에 공연할 각본을 쓰게 되는데, 3.1운동을 소개로 한 것이 시인민위원회에서 상연금지 명령을 받아서(교장의 허락으로 공연을 하긴 했지만) 공산당 정권 아래서는 자기가 쓰고 싶은 작품을 쓸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한 그는 1947년 9월 월남하게 된다.

 

그런데 월남하고보니 남한에서는 관객의 대부분이 어린아이인 것을 보고 실망해서는 소설로 진로를 바꾸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후 장용학은 소설을 쓰면서 1961년 5.16쿠데타가 일어날 때까지 경기고에서 교사생활을 했고 이후 덕성여대 교수로 부임했다. 1973년까지 경향신문, 동아일보에서 논설위원으로도 활동했는데 군사정권에 반대하다 안기부에 끌려가기도 했고 결국 유신체제가 공고히되지 해직되었다. 이후 거의 바깥 출입을 하지 않고 지인들과도 접촉하지 않았다는데 이는 일본으로 건너가버린 손창섭을 떠올리게 한다.

 

이 책에서는 두꺼비를 숭배하게 된 근대주의자의 이야기를 다룬 [미련소묘], 언청이의 재생에 대한 소설 [육수], 그리고 [요한시집]을 읽었는데, 앞의 두 작품에 비해 [요한시집]은 여전히 문제작임에 틀림없다. 이 작품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는데, 토끼에 대한 우화가 실린 부분, 누혜(요한)의 예언을 실현하기 위해 그의 어머니를 찾아나선 동호(예수)에 대한 부분, 그리고 누혜의 유서가 실린 마지막 부분이 그렇다.

 

우화에서는 이 소설에서 '자유' 혹은 칸트적 의미에서의 '자율'을 비꼬는 희미한 문맥을 읽어낼 수 있는데, 피투성이가 되어 나왔음에도 햇빛을 보자마자 바로 눈이 멀어버린, 그리고 그 자리에서 더이상 벗어나지조차 못하는 토끼를 우상인양 숭배하게 되었다는 언급을 통해 이를 알 수 있다(플라톤의 동굴의 우화를 떠올릴 수 있겠다). '자유'가 얼마나 허무맹랑한 구호에 불과한 것인지,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답답함을 느끼는 순간 거기에서 어떻게든 빠져나오려 하지만 그것이 결국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는 것일 뿐이라는 것. 이는 누혜의 삶이 대변하는 것이기도 하다.

 

토끼의 우화와 누혜의 우화 사이에 동호의 이야기가 끼어 있는 셈인데, 여기에 주목되는 몇 구절을 적어둔다.

 

<무엇보다도 성실하게 살아야 한다. 진리를 찾는다고 애매한 제스처를 부려서는 안 된다. 차라리 그 진리를 버려야 한다. 그런 제스처 때문에 이 공기가 얼마나 흐려졌는지, 그것을 정확하게 계량해낼 수 있다면 우리는 살아 있는 것이 시시해질 것이다.>(64)

 

하지만 그가 맞닥뜨린 것은 누혜의 어머니, 아니 인간이 빠져 있는 역사의 비참이다. 그 비참에 도무지 '의미'가 없다는 데서 오는 절망이다. 그가 보는 환영은 모든 문명이 종말된 이후 돼지떼가 꿀꿀거리며 행진하는 풍경이다. 소리 없는 행진이 지나가고 나무들의 행렬이 이어지면서 고요한 낙원이 나타난다. 그러나 고요한 대로 있을 수는 없다. 다시 <자유를 보장하는 감찰>을 나누어주는 역사가 도래한다.

 

<바깥 세계에서는 눈이 시름 없이 내리고 있는데, 이런 역사는 그만하고 그쳤으면 좋겠다.>(80)

 

김춘수에게서 나타나는 역사허무주의와 다름 없는 관점이다. 포로 수용소에서 누혜의 자살이 데카당의 시작이나 끝을 보여준다면, 그 요한의 계시록 이후 출현한 예수의 임무는 세계에 다시 사랑의 질서를 세우는 것이 아닐까. 이 소설은 동호가 '자유'가 죄를 짓는다는 것임을, 동시에 존재의 무수한 가능성과 연결된다는 이율배반을 깨달으며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를 긍정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과연 실존주의적인 결론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소설의 결론에는 구원도 없으며 사랑도 없다. 다만 실존적 자유를 깨달은 주체가 자신에게 주어진 불분명하기만 한 사명에 눈을 뜨는 여명 직전의 순간만이 그려진다. 전후 소설의 가능성은 여기까지가 아니었을까. 그 여명 직전까지만을 보여주는 것.

 

하지만 '이런' 역사는 그치지 않았고 그의 '자유'는 더 많은 '죄'로 그를 옭아맬 것이었음을, 장용학의 생애가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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