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 경제학 - 불황에서 살아남는 성공 비즈니스 노하우
이토 모토시게 지음, 홍찬선 옮김 / 시공사 / 2004년 7월
평점 :
절판


경제학,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여기저기 경제학 강의를 다니다보면, 가끔 황당한 질문을 받게 될 때가 있다.

"미시경제학은 왜 들으려 하나요?"

"주식 투자에 도움이 될까 해서..."

"미시경제학은 주식 투자하고는 상관이 없는데요"

"그럼, 경제학은 뭐에 쓸모가 있나요..."

사실, 쓸모가 없다는 대답이 솔직한 것일지 모르나, 경제학으로 밥을 먹고 사는 터라서 그렇게 말할 수는 없는 법. 대개, 경제의 원리를 깨우치는 데 도움이 되고, 감각을 키우는데 필요하다는 식으로 대충 넘어가고 마는 것이 보통이다.

가끔, 경제학 교과서이나 대중서를 대할 때면 지나칠만큼 트렌디하게 흘러가는 경영학 관련 서적들과 크게 대조적이라는 생각이 들곤 한다. 커리큘럼의 규범이 확실하고 립서비스와 진배없는 사기가 아닌 진정한 학문이라서 그렇다, 라는 항변이 가능하겠지만 '자연'이 아닌 '사회'의 과학이고 보면 그 이론이나 이데올로기를 소비하는 대중이 외면하고 소비층이 얇아지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경제학의 위기일지도 모른다.

쉽게 썼다는 수십종의 경제학 풀이서들도 이러한 경향에서 크게 다를 바는 없다. 시중에 나가보면, 원론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딱딱하고 비싼 교과서를 빼고서도, "알기 쉬운"이라는 꼭지를 단 경제학 대중서는 많다. 하지만, 필자의 경험으로 이러한 책들 중에서 제대로 건질만한 책은 극히 드물다. "알기 쉬운"이라는 간판을 내건 이 책들은 경제원론의 표준적인 주제나 쳬계를 따르되, 수식과 그래프만 없애고 몇 가지 잘 알려진 사례를 그럴듯하게 재포장해 내놓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반복적으로 다뤄지는 기본기 이외에, 그리고 경제학 전공자를 위한 전문 교과서 이외에, 대중을 유혹할 수 있는 보다 그럴듯한 포장과 알맹이를 지닌 경제학 대중서는 매우 드물다는 말이다.

산업조직으로 풀어낸 경제학의 묘미

런 면에서 보면, 이토 모토시게의 [비즈니스 경제학]은 그 성공과 실패를 떠나서 매우 대담한 시도를 담고 있는 책이다. 이토 모토시게는 국제경제학을 전공한 일본의 학자로서 전방위적인 관심과 더불어 대중적인 글쓰기로도 널리 알려진 사람이다.

"비즈니스"라는 대중적인 골자를 빼놓고 보면, 이 책은 이른바 '산업조직'에 관한 책에 가깝다. 경제학 원론이나 개론을 가르칠 때 산업조직에 관한 부분에서 김이 빠져버리기 일쑤다. 일단, 이론적인 기반이 되는 완전경쟁 시장을 다루고 그 대척점에 선 완전 독점을 다룬다. 그렇다면, 현실은 그 사이 어딘가 일텐데, 기업간의 현실적인 경쟁의 모습을 담고 있는 과점 시장은 분석이 복잡하다는 이유로 피해간다. 은근 슬쩍 넘어간다고 쳐도, 뒷 맛이 개운치 않기는 마찬가지.

현대 경제학에서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세련화된 산업조직을 원론 차원에서 수용하지 못하다는 이유는 복잡하다는 것이다. 기초적인 내용만으로도 충분히 부담스러운데 엎친데 덮칠 필요는 없다는 것. 또한, 과점 시장을 분석하기 위해서는 게임 이론이라는 또하나의 분석 도구가 필요한데 이것 역시 원론이나 개론 수준에서 가르치고 배우기에는 다소 부담스럽게 다가올 수 있다.

모토시게는 고고할 수 있는 학자임에도 이런 부담스러움을 기꺼히 감수하면서, 속세의 때까지 적당히 묻히기로 작정한 모양이다. 책의 전반부는 산업조직론의 기본 테마인 가격 차별의 논리, 주인-대리인 문제, 그리고 게임이론을 통한 경쟁전략과 같은 최신의 내용을 담고 있다. 이들은 이미 산업조직론에서는 잘 알려진 주제들이지만, 이를 대중적으로 포장해 잘 먹기 좋게 조리해두었다는 점만으로도 그 가치는 충분하다.

이렇게 산업조직론의 대강을 훑은 후에 후반부에는 좀 더 다양한 주제가 펼쳐진다. 마이클 포터의 경쟁 전략 개념을 차용해 경영학의 논의를 끌어들이는가 하면, 정보화로 인해 초래되는 경제의 변화를 논하고 저자 자신의 전공 분야인 국제경제와 비즈니스까지 풀어나가고 있다. 전반부에 비해 공력이 떨어지는 맛이 없지는 않지만, 다양한 주제를 쉽게 전달핟나는 애초의 취지에는 여전히 충실하다.

토착 경제학을 위한 노력

내용을 떠나서 이 책에서 가장 높이 살만한 부분은 경제학의 이론이 말하는 현실을 꼼꼼히 찾아내려 한 모토시게의 노력이다. 요시노야의 규동 판매 전략이라든가 세븐 일레븐의 점포 확대 방식 등을 논한 부분 등 책 곳곳에 등장하는 일본 기업들의 실제 사례는 경제학의 토착화를 시도하는 저자의 지향과 노력을 엿볼 수 있다.

우리의 교과서들에게 가장 아쉬운 부분이라면 그럴듯한 토착적인 사례가 크게 부족하다는 것이다. 경제신문 기사를 맹맹한 수준에서 이리저리 모아놓은 것이 대부분이고 본다면, 적절한 예를 찾아 이론과 맞춰나가려는 우리 학자들의 노력이 부족했던 것 아닐까 싶다. 고고함을 버리고 속세로 뛰어든 모토시게를 우리의 학문 풍통에서 만나고 싶은 생각 역시 간절해진다. 이왕이면 값비싼 하드커버 양장을 한 딱딱하고 부담스러운 교과서 말고 보다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는 부드러운 대중서라면 더 바랄 나위가 없겠다.

아쉬운 점 몇 가지  

경제학에 흥미를 느끼는 모든 이들에게 일독을 권하고 싶은 책이지만, 다음의 두가지는 아쉽게 느껴진다.

첫째, 산업조직론의 이론체계를 지닌 앞부분이 보다 탄탄한 이론의 구성과 치밀한 사례의 소개로 전개됨에 반해 다양한 주제가 섞여 있는 후반부에 들어서는 아무래도 맥이 풀리는 감이 없지 않다. 특히, 정보통신 혁명을 다루는 부분은 피상적인 수준에 머무르고 말았다.  특히, 배리안(H. Varian)과 샤피로(R. Shapiro)가 쓴 명저 [Information Rules]와 같은 뛰어난 참고도서가 존재하는데도 그 내용들이 책에서 거의 흡수되지 않은 점은 꽤나 의아하다. 앞서 장들이 해당 분야의 주요 교과서들을 참고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아쉽다.

둘째, 책의 번역과 관련된 문제. 번역의 전반적인 수준은 무난하나, 세부적으로 아쉬움을 남기는 부분들이 간혹 드러난다. 크게 두 가지만 지적하겠다.

우선, 일본 책을 번역할 때 미국 저자들의 이름이 어떻게 표기되어야 하는지 종종 의아할 때가 있다. 개인적으로는 우리의 번역서에서는 서구권 저자들의 인명 표기에 가타카나 표기를 따를 필요는 없다고 본다(현재 이에 대한 번역업계의 규정이나 관행이 어떤 것인지 필자로서는 아는 바가 없다). 어쨌든 폴 밀그롬(Paul Milgrom)이 "미르그롬"이라고 적혀 있는 부분은 꽤나 거슬렸다.(하지만, 마이클 포터 같은 경우에는 그냥 "포터"라고 되어 있는 것으로 봐서는 역자의 실수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다음으로 원저자인 모토시게의 착각이라고 생각되지만, 게임이론 관련 부분의 참고서가 된 딕시(Dixit)와 네일버프(Nalebuff)의 책은 [전략의 게임 Games of Strategy]가 아니라 [전략적 사고 Thinking Strategically]이다. [전략의 게임]은 딕시와 수전 스키스(Susan Skeath)가 쓴 다른 게임이론 관련 서적의 제목이다. 미루어 짐작하자면, 원저자가 혼동했거나 아니면 일본에서 출판될 때 책 제목이 바뀌었거나 둘 중 하나일 듯 하다(번역문에는 영어 원제 앞에 "전략적 사고란 무엇인가"라고 표기되어 있어 전자일 가능성이 더욱 높아 보인다). 하지만, 번역이 또하나의 창작이라는 적극적인 취지에서는 이러한 부분 정도는 미리 잡아낼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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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대학살 - 프랑스 문화사 속의 다른 이야기들 현대의 지성 94
로버트 단턴 지음, 조한욱 옮김 / 문학과지성사 / 1996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을 산 건 책에 대한 익히 알았던 명성과 이에 더해 최근 1년 남짓 사이에 우리 가정에서 불붙고 있는 고양이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다. '고양이 대학살'이라니! 일단, 제목부터 꽤나 그럴듯하지 않은가? 하지만, 책의 구입이라는 행위에까지 도달하려면 개인적인 호감이라는 단순한 이유는 넘어서야 한다. 학부 때 꽤나 즐겨 읽었던 아날 학파에 일정하게 반기를 들었다고 전해들은 이른바 "망딸리테" 역사의 주요 저작의 하나라는 (출처가 불분명한) 지식도 책의 구매에 단단히 한 몫했다.

어쨌든, 책은 구입한 것은 1년도 넘은 일이지만, 어쩐 일인지 읽지는 못했다. 아마도, 경제학을 전공한데다가 구조주의적 사고방식에 익숙한 나에게, 자본주의 3층위 이론을 제시하며 물질 문명의 근원을 밝혀준 아날 학파의 역사 유물론적 가치를 부인했다는 사실 자체가 거북스러웠던 듯 싶다. 게다가, 최근 우리 서점가에 유행하고 있는 이른바 인류학을 원용한 쉬운 역사학 저술의 실망스러움도 책을 멀리하는 데 근거없는 한 몫을 했을 터이다. 이 책과 질낮은 역사 서술은 너무도 분명 구분되는 것이지만, 독서의 선택이란 비슷한 취향의 장 속에서 작용하기 마련이니까.

이렇게 내가 방치해 둔 책을 멜로리가 먼저 열심히 읽었고 매우 재미있다는 '강추' 사인을 켜주었다. 이쯤 되면 집어들지 않기가 더 힘든 법.

책의 부제가 알려주듯, "프랑스 문화사 속의 다른 이야기들"은 이 책의 소재와 주제 모두를 잘 포괄하고 있다. 저자는 일관성과 역사적 법칙을 현시한다는 거창하지만 관습적인 역사학의 목표를 버린 대신, 훨씬 구체적인 역사의 무대로 독자들을 끌고 간다.

로버트 단턴의 [고양이 대학살]은 이런 면에서 프랑스의 문화사를 관통하는 거대한 풍경화같은 느낌이다. 한쪽 영역에선 동화에 대한 정신분석학의 정적인 해석에 반대하여 동화가 지닌 역사성과 삶의 풍경을 강조하는가 하면, 다른 쪽 부분에서는 역사 교과서에서 앙상하게 추려지는 계급간의 대립이 어떻게 상징 투쟁으로 역동적으로 출현했는지를 그려보이고 있다(개인적으로 이 "고양이 대학살" 논문에서는 영국 노동 계급 자녀들의 학교에 대한 저항과 재순화를 동적으로 묘사한 책 Learning to Labor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로웠던 논문은 경찰 수사관이 기록한 문필 공화국의 분류와 해부이다. 혁명 직전 계몽주의의 불씨가 여기저기서 지펴지던 파리에서 도서감찰관 데므리가 모은 지식인에 대한 시시콜콜한 자료와 그 서술은 그 자체만으로도 흥미진진하다. 그는 왕국을 사수한다는 철저한 직업의식에 입각해있으면서도 지식인들의 느낌과 성향과 전력을 분류했고, 이 저술 덕분에 계몽주의라는 사상적 실체는 훨씬 풍부한 색채로 다가온다.

이렇듯 단턴이 프랑스 문화사 속의 이면을 캐낼 수 있었던 건, 문서 보관소를 인류학자의 심정으로 샅샅이 찾아 헤맸기 때문이다. 법칙에 따라서 간략하게 추려진 역사의 골격에서 대면할 수 없는 기이함과 난처함을 최대한 그 당시의 시각으로 따라간다는 것이 단턴의 전략인 셈이다. 그가 스스로 밝히듯, 이는 외부인으로서 매우 낯선 지역의 현지조사를 수행해야 하는 인류학자와 같은 처지이다. 문화적인 선입견이나 공통의 언어 없이 최대한 날 체험과 시각 만으로 그 사회를 재구성해낸다는 것이다.

하지만, (자신도 분명히 인정하듯이) 관찰과 저술을 동시에 수행할 수 있는 인류학과 관찰에 대한 부정확하고 불확실한 2차 기록으로만 저술 해야하는 이른바 망딸리떼의 역사 접근은 동일시할 수는 없다. 단턴이 결론에서 유보를 달듯이, 자신이 발굴한 자료의 정확성과 대표성은 느슨한 차원에서나마 담보되기 힘들다. 대신, 그는 현재 우리가 지닌 인식과 지적 체계가 그 자체로서 역사적인 것이라고 했을 때, 이러한 체계에 비추어 매우 "불투명한" 뭔가를 찾아냈다면 제대로 짚은 것 아니겠느냐고 슬쩍 우겨본다. "우리로서는 생각도 할 수 없어 보이는 것에 부딪혔을 때 우리는 낯선 정신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타당한 입구에 마주친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단턴이 자인하는 방법론적인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접근의 우위는 분명하다. 그에 따르면, 통계적 자료의 발굴과 이로부터 객관적이고 엄정한 역사를 도출해내려고 애쓴 아날학파의 노고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결론적으로는 자가 당착에 빠지고 말았다고 본다.

연옥의 영혼들을 위해 행해진 미사의 막대 그래프가 내려간 것에서 보벨은 탈기독교화를 보는 반면, 필립 아리에스는 신앙이 보다 내향적으로 강렬해졌던 경향을 보고 있다. 보벨, 로슈, 로제 샤르티에 같은 속세의 좌익들에게 있어서 통계학적 곡선은 세계관의 부르주아화를 대체적으로 지적하였던 것인 반면, 아리에스, 쇼뉘, 베르나르 플롱주롱 같은 종교적 우익에게 있어서 그것은 가족의 애정과 자선의 새로운 유형을 보이는 것이었다(368쪽).

요컨대, 통계와 계량으로 역사를 재구성하려 했던 아날학파는 모순에 빠져들거나 문화적 차원이 지닌 독자성 및 역사적 삶의 풍부성을 놓치고 말았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말하자면, 단턴의 방법론은 매우 흥미로움에도 불구하고 그 자신이 인정한 한계를 여전히 지니고 있다. 각 장 별로 단턴의 해석과 함께 실려 있는 원문을 읽어보면 역사학자로서 그의 뛰어난 상상력에 경탄하게 되지만, 이러한 해석이 역사에 대한 안정적인 문화적 이해방식으로서 가치를 지닐 것인지 선뜻 긍정하기는 힘들다. 물론, 책 한권 달랑(그것도 대충) 읽어보고는 이러한 결론을 짓는 것은 섣부르다. 곧이어 단턴의 주저인 [책과 혁명]을 읽을 계획이지만, 현재로서는 망딸리떼의 역사가 역사 이론으로 정립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확신하기 어렵다.

또하나, 최근의 인류학은 진화생물학(evolutionary biology)의 영향을 받아 이론없이 개별사를 서술하는 기존의 흐름에서 천천히 벗어나고 있다.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제레미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는 이러한 서술의 강점을 잘 보여주는 책이다. 그 자체를 그대로 이해한다는 기존 접근의 서술 중심성과 파편성을 보완할 강력한 대안으로서, 생물학적 존재로서의 인간과 그 진화의 특성을 출발점으로 삼자는 입장이 대두하고 있는 것이다. 개별성에서 한 발 벗어나 보편성을 흡수하는 쪽으로 움직이는 인류학의 이동에 비추어본다면, 인류학에 대한 단턴의 절대적 신뢰가 다소 의아하게 느껴진다. 물론, 인류학이라는 해독제를 통해 역사학이 풍부함을 지닐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망딸리떼의 역사가 '피와 살'을 동시에 갖춘 일종의 종합을 이룰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이런 개인적인 평가를 떠나서 [고양이 대학살]는 그 자체로서 매우 흥미롭고 격조 높은 책이다. 특히 역사학 분야에서 "알기 쉬운"이라는 종류의 꼬리표를 단 질낮은 책들이 판치는 지금의 시류에서는 더욱 그렇다. 역사학에 대한 개인적인 기호와 판단과는 별도로 엄지 두 개를 들어줄만한 명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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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inkampf 2005-01-05 0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총균쇠의 저자는 제레미가 아니고 제레드 다이아몬드입니다.

그리고 "엄지 두 개"는 영어권 국가들에서 출간된 책들의 서평에서 자주 등장하는 "two thumbs up"을 그대로 옮긴 표현이라 매우 어색하군요....

전체적으로 좋은 글이라 생각되지만 옥에 티라고 생각되는 부분을 찾아봤습니다.

 
대한민국 사이버 신인류 - KI신서 551
황상민 지음 / 21세기북스 / 2004년 2월
평점 :
품절


황상민, <대한민국 사이버 신인류>, 21세기북스, 2004

요란한 선언, 그러나 빈약한 구체성

1. 요지는 간략하다

황상민 교수의 요지는 간단하다. 산업화는 뒤졌지만 정보화는 앞서가자는 산업 입국의 구호로 역설적으로 인터넷이라는 공간이 생겨났고, 이를 점거한 것은 주류 사회의 주변인(주변인)이었던 청소년과 폐인들이었다. 이들의 철학, 사고방식, 라이프 스타일은 모두 기성 세대와 충돌하는 것이다. 이렇게, 이미 견고한 구조를 지닌 오프라인의 세계와 새로운 질서를 내포한 온라인의 세계가 충돌한다. 더불어, 오프라인 세계에는 불가해한 온라인 세계에 대한 근심이 날로 커져간다.  온라인 게임의 PK를 현실 사회에서 벌어지는 살인의 연장으로 이해하고, 강짱에 환호하는 온라인을 정신병원과 다르지 않다고 규정해버린다. 하지만, 온라인 세계는 그 나름의 논리를 지니며 기성 세대와 구별되는 확연한 독자적인 철학, 미학, 행동 양식을 지닌 것이다. 이를 적극적으로 이해하려하지 않고 기성의 틀로 재단하려 하는 한 오프라인의 세계와 온라인 세계의 반목을 지속될 것이다.

위에서 보듯, 황교수의 책처럼 대규모의 패러다임 시프트를  외치는 주장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비난 인터넷 열풍 뿐이랴. 산업 사회의 종말, 근대의 종말 등 여러 변화를 징후 삼아 이를 새로운 시대로 나누려는 논자들의 시도는 매우 일상적이다.

2. 구체성의 결여

황교수의 주장과 비슷한 계열로는 더글러스 러시코프의 [카오스의 아이들]과 쉐리 터클의 [스크린 위의 삶]이 있을 터이다. 두 책 모두 선형적인 논리와 대별되는 맥락적인 논리를 말하며, (강도의 차이는 있으나) 이를 독자적인 무엇으로 적극적으로 구축하고자 시도했다. 그런데, 이 두 권의 책과 황교수의 책은 결정적인 부분에서 차이가 난다. 러시코프나 터클의 책이 자신이 주장하려는 바를 구현하고 있는 대상에 대해 깊이 천착하고 있어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풍부한 구체성을 체감케해준다면, 황교수의 책은 반대로 그 대상에서 계속 멀어지는 느낌이다. 예를 들어, 책에서 가장 구체적인 장이라고 할만한 5장 "온라인 게임: 네버랜드에서 하는 놀이"를 보면 리니지에 대한 피상적인 분석에 머물고 있을 뿐이다. 그나마, 소개되고 있는 구체성 조차 게임을 직접 플레이한 사람의 심층을 파고드는 것이라기 보다는 얄팍한 서베이 결과나 단편적인 신문 기사에 머물고 있다. 책의 논지를 떠나서 이러한 구체성의 결여는 책 읽는 맛을 뚝 잘라먹는 부분이다.

덧붙여 말하면, 책에서 간간히 소개되고 있는 신문기사들이 왜 게재되었는지 잘 이해할 수 없었다. 기사들은 이미 잘 알여진 사건들로 반복적이며 단편적이다. 만일, 이 책의 목표가 사이버 세계를 정신병원으로 오해하고 있는 기성 세대의 시각을 교정하기 위한 것이라면 어느정도 수긍할 만하다. 하지만, 세상 돌아가는 일에 어지간히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익히 알고 있는 사례들을 재삼 반복적으로 소개할 필요가 있었을까?

3. 지나치게 명쾌한 논리의 어색함 혹은 당황스러움

책은 매 챕터 끝 마다, 기성세대와 사이버 신인류의 사고방식을 도표로 정리해주고 있다. 복잡한 현실을 간단하게 정리할 수 있다면 이는 분명 미덕이다. 하지만, 그 정리와 도식화가 무리하게 진행된다면, 오히려 고개가 갸우뚱거려지는 부분이 늘게 마련이다. 도식화의 논리는 간단하다.

기성 세대       = 선형적, 규칙, 논리, 규칙 중시, 일과 놀이의 분리, Top-down, 명분 중시, 근대적, 물질적 성공, 결과 중시...
사이버 신인류 = 비선형적, 상황, 맥락, 창조 중시, 일과 놀이의 통합, Bottom-up, 표현/재미 중시, 탈 근대적,  과정 중시...

이념형을 구분했다는 것이 문제는 아니다. 다만, 이 이념형을 도구로 보지 않고 무리하게 현실로 끌어내릴 때 문제가 생기게 된다. 어차피, 변화라면 두가지 세계관이 충돌하면서 빚어지는 것일테니, 현실의 청소년이 경험하는 것은 그들의 품은 새로운 세계관과 기존의 주어진 세계관의 충돌일터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두 세계의 충돌은 저자가 말하듯, 온라인 세계에 대한 매도, 오해, 게임중독, 자살과 같은 극적인 충돌만 가져올까?

오히려, 이러한 충돌이 예외적인 것은 아닐까? 인지할 수 없는 가운데, 두 세계는 적당한 수준에서 섞이고 적당한 수준에서 타협한다. 저자가 대한민국의 정보화를 혁명적인 단절로 파악하고 있다면, 내가 보는 현실은 진화적인 변형이다. 인터넷이라는 충격은 새로운 세계관을 배태했지만, 이 세계는 기존 세계와 뒤섞이면서 서서히 변화한다. 폐인을 자처하는 청소년들의 진짜 삶, 의식, 철학은 이 뒤섞이는 혼합점 어딘가에 위치해있을 법 싶다.

너무 뻔한 이야기 아니냐고? 맞다. 하지만, 뻔한 이야기를 뻔하지 않게 역동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이론가의 의무 아니던가?

4. 온라인 게임에 대한 이해와 오해

책 전체에 걸쳐 가장 뚜렷한 논지라면 온라인 게임에 대한 기성 세대의 오해에 대한 반론이다. 황교수는 온라인 게임 중독이란 없다고 말한다. 온라인 게임의 세계는 독자적인 생존 논리를 지닌 세계이며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데에서 온라인 게임을 둘러싼 오해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온라인 게임이 하나의 독자적인 세계를 형성하고 있다는 데 동의할 수 있다. 하지만, 앞서와 마찬가지로 그 세계는 현실의 세계에 비해 얼마나 자립적일까? 아이템 현금거래가 온라인 세계를 지지하는 현실은 무엇인가? 황교수는 이를 디지털 이미지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여 터트린 21세기형 대박신화라고 표현한다. 하지만, 그 획득한 가치 때문에 그가 옹호하고자 하는 온라인 세계의 가치가 거꾸로 파괴되고 있다는 역설은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황교수는 선행한 학술적인 실증 조사에서 온라인 세계가 오프라인의 물욕에 좌우되지 않는다는 점을 보이려 노력한 바 있다. 하지만, 대한민국에서 온라인 게임을 즐기는 유저라면, 그가 옹호하고자 하는 그 하나의 온라인 게임이 전적으로 '재미'와 '폐인'의 논리에 따라서만 굴러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을 터이다. 과연 새로운 가치와 철학을 구현하는 온라인 세계가 이미 낡은 오프라인 세계의 논리와 가치에 종속된 것이라면? 아이템 현금거래는 온라인 세계의 가치가 범람해 만들어진 맥주의 거품 같은 찌꺼기에 불과한 것인가?

또한, 온라인 게임에 대한 그의 열렬한 옹호는 또다른 의문을 불러 일으킨다. 황 교수는 아무래도 게임을 좋아하는 것 같지는 않고 책 곳곳에서 그런 흔적을 읽을 수 있다. 그렇다면, 인간이 컴퓨터의 도움을 얻어 체험한 인터랙티비티의 총아라 할만한 컴퓨터 게임과 온라인 게임은 어떻게 구분될까? 컴퓨터 게임은 단순한 반복과 무의미한 시간 죽이기임에 반해서, 온라인 게임을 사회를 체험하는 것이기에 가치를 지니는 것일까? 황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게임을 수백 번 박복하면서 해 보는 과정을 통해 게임의 기본 기법을 스스로 마스터한 초기 온라인 게임 개발자들은 정규 대학에서 게임에 관한 전문 지식이나 기술을 배운 사람이 아니었다. 그들 대부분은 게임에 빠져 거의 '폐인'처럼 지냈던 사람들이었다. 자신들이 좋아하는 반복되는 경험을 통해 감추어진 구도와 기본적인 기술을 파악하고 스스로를 마스터로 만들고 결국에는 게임에 대해서 거의 신과 같은 경지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남은 것은 새로운 창조자가 되는 것뿐이다."

일단, 맞다고 하자. 그렇다면, 한국의 온라인 게임은 매니아의 산물이고 그래서 상업적인 성공과 배치될지도 모를 자체적인 논리를 지니게 되었다. 하지만, 한국 온라인 게임산업의 과거와 현재가 그랬는지는 역시 실증을 거쳐야 하는 문제로 남는다. 그리고, 그 도도한 폐인들이 그토록 빠른 속도로 2-3년 만에 비즈니스의 논리로 흡입되어 간 현실의 궤적은 어떻게 된 것인지 매우 의아스럽다.

그런데, 몇 십 페이지 후에 황교수는 이와는 다른 이야기를 설파한다.

"흥미롭게도 현재 한국 사회에서 온라인 게임을 기획하거나 개발하는 사람들이 가진 패러다임은 실제로 이 게임 세계를 이용하는 사용자와는 뚜렷한 차이가 있다. 청소년들이 대부분의 온라인 게임을 통해 얻는 경험, 아니 온라인 게임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이해할 수 있는 패러다임은 신과학 패러다임이다. 하지만, 게임 세계를 물리적으로 만들고 관리하는 사람들은 사용자와 달리 구과학 패러다임을 활용해야 한다. 왜냐하면 게임 활동이란 이들이 설정한 규칙에 따라 사용자들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 이런 이유 때문에 온라인 게임에서 일어나는 활동을 규제하고 게임 내의 행위를 어떻게 판단할 것인지의 문제와 관련하여 게임 세계에서는 관리자와 사용자 간에 갈등과 긴장관계가 형성된다."

앞서 황교수의 호기로운 매니아론이 왜 여기선 한풀 꺾이고 말았는지 일단 이해하기 힘들다. 게다가, 온라인 게임의 사용자와 관리자를 선량한 신과학 패러다임 대 불량한 구과학 패러다임으로 나누는 논리는 더욱 궤변에 가깝게 느껴진다.

첫번째와 두번째 주장을 합쳐,폐인이 그토록 강한 의지와 힘을 가졌다면 왜 독자적인 게임을 형성하지 못했을까, 라는 세번째 의문이 남는다. 상업적인 요소가 배제되더라도 말이다. 오히려, 이 부분에서는 온라인 천국 한국이 아니라 MUD 게임의 오랜 전통을 지닌 서구의 텍스트 온라인 게임이 훨씬 더 타당한 사례가 되지 않을까 싶다. 상업성을 제한하면서도 상상력에 의해 만들어져나가는 부분이 극대화된 가상 사회, 이것이야말로 아직도 생존해있는 수 많은 텍스트 기반 MUD 게임의 모습이 아닐까?

이러한 황교수의 동요는 온라인 게임의 현실을 그의 이념형에 너무 성급히 끼워맞추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그의 관점은 한국의 온라인 게임이 지닌 특수성을 걸러내지 않은 채, 온라인 게임 일반의 진화형으로 바로 일반화시킨다는 점에서 더욱 위험하다. 온라인 게임 내의 행태를 그 자체의 논리로 이해하자는 주장은 타당하지만, 그래서 PK나 현거래가 모두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5. 과연 이 책의 독자는 누구일까?

사실, 이 책을 고른 이유는 황교수가 이 분야에서 나름의 권위자이기 때문이었다. 온라인 게임이나 사이버 문화를 학술적으로 이해하려는 틀이 부족한 가운데, 가장 앞서 있는 사람의 주장을 통해 정수를 취해보고자 했다. 하지만, 내가 책에서 느낀건 상당한 실망감 뿐이다.
이 책에서는, 페이퍼 RPG와 코스츔 플레이에서 새로운 놀이의 가능성을 끌어내고 이를 근대적 사고체계가 지닌 선형성의 붕괴와 멋지게 연결시킨 러시코프의 감각도, 컴퓨터를 매개로 체험한 인터랙티비티가 MUD게임으로 만개하게 되는 과정을 따라간 터클의 섬세함도 찾을 수 없었다.

남은 것은 무엇인가. 나에게, 이 책은 앙상한 선언문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독자는 누구일까? 사이버 세계를 오해하고 있는 기성세대? 이 책을 읽고 기성 세대가 교화될 수 있다면 개인적으로도 무척 다행스럽게 느껴진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런 일이 벌어질 것 같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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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스터 마을의 경제학 - 읽기 쉬운 경제 우화
사이카린 신세이 지음, 부지영 옮김 / 프리미엄북스 / 2003년 11월
평점 :
절판


일본 저자들의 책에는 독특한 취향이 있다. 우리로 치면 입시용 참고서 분위기로 정리된 다이제스트서를 잘 내는 것으로도 유명하지만, 지식의 대중화 내지는 지식의 세속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그네들의 주요한 출판 풍토의 하나가 아닐까 싶다.

아이카린 신세이가 지은 [몬스터 마을의 경제학]은 일테면 케인즈주의적인 입장에서 거시경제학의 화폐론과 유효수요의 중요성을 우화를 통해 풀어내고 있는 책이다. 이상하게도 역자는 이 책이 금융위기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며 일본의 낙후된 금융시스템을 꼬집고 있는, 즉 우리에게도 반면교사 노릇을 해주는 책이라고 설명하고 있다.(여담이지만, 가끔 조선일보 기자들이 옮긴 책의 서문을 보며 이렇게 눈을 다시 부비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물론, 이러한 역자의 오해는 저자 자신의 불명확한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책의 뼈대를 이루는 케인즈 경제학을 못보고 지나친 것은 역자의 무지라고 해야 마땅할 것이다.

어쨌든. 책은 화폐의 출현을 발생학적으로 따라가는 것에서 시작한다. 장인들이 옹기종기 모여사는 몬스터 마을은 화폐 경제가 서지 않은, 즉 욕망의 이중적 일치가 발생할 때만 교환이 일어나는 동네이다. 그 동네에 인간인 미스터X가 출현하여 화폐를 도입한다. 이를테면 화폐를 독점적으로 유통하는 중앙은행인 셈이다. 처음에는 금본위제를 실시하다가, 경제의 규모가 커지면서 화폐를 추가적으로 발행해야 하는 압력에 놓인다. 금본위제에서 중앙은행의 신용에 기초한 순수한 화폐경제의 출현을 보여준다. 그리고, 미스터X의 부인은 생산은 하지 않고 오직 사치하는 존재로 등장하여 몬스터 마을의 서비스업이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X의 부인은, 케인즈가 말한 바, 비록 비생산적일지라도 국가가 유효수요를 창출하는 것이 경제를 부양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주장을 실현한 존재인 셈이다.

몬스터 마을이 그럭저럭 굴러갈 즈음, 옆 아쿠아 마을의 미스터 푸가 등장한다. 그는 몬스터 마을이 지닌 금융시스템의 취약점을 이용하려는 악당. 이미 전면적인 화폐경제로 이행했음에도 몬스터 마을은 여전히 금과 화폐의 태환을 실시하고 있었다 . 이를테면, 화폐는 불태환 지폐가 아니라 태환 지폐였던 셈이다. 경제의 규모에 맞게 많은 돈을 풀었고 마을 주민들의 축적 욕구도 충분히 고무한 덕택에, 몬스터 마을의 금은 천정부지로 올라 있었다. 미스터 푸의 작전은 이렇다. 그는 몬스터 마을에 와서 시세보다 비교적 싼 값에 금을 판다. 금이 많이 풀리면서 가격이 떨어지고 점차 주민들 사이에 금에 대한 회의가 퍼지게 된다. 이때 미스터 푸는 자신의 하수인을 통해 원래 팔았던 값보다 훨씬 싸게 금을 되산다. 이렇게 미스터 푸는 아쿠아 마을에서 소용할 가치 기준인 금과 유통 수단인 화폐를 몬스터 마을에서 휩쓸어간다(다소 이해가 안 되지만, 책에서는 조폐기는 오직 미스터X만 소유하고 있으며, 그래서 미스터 푸가 부득불 이런 작전을 펼칠 수 밖에 없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미스터 푸의 이러한 '작전'은 고정환율제 하에서 영국 정부를 상대로 파운드 전쟁을 벌여 거대한 부를 쌓은 소로스의 꽁수와 무척이나 닮아 있다.

돌아온 미스터X는 이미 아쿠아 마을의 가치 기준이 된 몬스터 마을의 돈을 마구 찍어 다시 아쿠아 마을로 건너가 비슷한 방법으로 아쿠아 마을의 금을 바닥낸다. 몬스터 마을에서 가져온 제한된 화폐만을 지니고 있는 미스터 푸로서는 사람들의 금태환 요구를 모두 수용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일. 미스터 푸는 마침내 모라토리움을 선언하고 이번에는 아쿠아 마을이 초토화된다.

하지만, 두 마을 간의 전쟁에 승자없었다. 그 가치를 의심치 않았던 금의 가격 폭락으로 인해 몬스터 마을은 심각한 불황에 빠져들게 된다. 게다가, 이제 사치를 전담하는 미스터X의 부인도 없으니 불황을 탈출하는 일이 더욱 힘들게 되었다. 이른바 케인즈의 '저축의 역설'이 작용하게 된 것이다. 개인의 차원에서 잘살기 위해 소비를 줄일 수록, 국가 전체로서는 유효수요가 축소되어 되려 불황의 골을 깊게 한다는 것이다. 결국, 미스터X의 최종적인 해결책은 사람들에게 임의로 돈을 풀어 유효수요를 인위적으로 창출하는 것이었다. 정확히 대공황에 대한 케인즈의 해법이다.

여기까지는 나쁘지 않다. 정작 내가 갸우뚱해지기 시작한 것은 "노 비전이라는 이름의 나라"라는 제목의 장부터다. 노골적으로 일본을 지시하고 있는 가상국가 "노 비전"은 정부의 유효수요를 "낭비"적인 부분에 소모했기 때문에, 오늘날 자취를 감춘 것이라고 미스터X는 열변을 토한다. 즉, 정부의 지출은 "생산적인 쪽"으로 씌여야 한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이는 지금까지 책의 뼈대를 끌고 온 케인즈의 유효수요론이 지닌 본질을 완전히 호도하는 것이다. 즉, 케인즈의 유효수요는 대공황이라는 자본주의의 병리적 이상 상태를 벗어나기 위한 단기적인 해법이다. 극단적으로 말해, 책에 나온 것 처럼 사람들을 데려다가 오늘은 땅을 파게 하고 내일은 같은 자리를 묻게 하더라도 공황의 상황에서 그것이 선(善)이 된다. 그리고, 책의 테마와 기조 또한 이러한 분위기로 흘러왔다. 예를 들어, 미스터X의 부인은 비생산적인 존재였지만, 그 자체로서 서비스업이라는 확실한 유효수요를 창출하여 몬스터 마을의 경제 성장에 크게 기여했던 것이다.

이렇게 저자는 지금까지 잘 이끌고 나왔던 단기 거시경제학을 갑자기 '장기'로 틀어 일본 경제의 저성장과 침체, 그리고 나아가 창조성 부재까지 싸잡아 비난하고 나선다. "노 비전"이라는 국가에 대한 미스터X의 주장이 맞는지 틀리는지 나로서는 제대로 알수 없었다. 다만, 책의 제목이 표방하고 있는 "알기쉬운 경제 우화"라는 표제는 이 책에 절반만 적당하지 않을까 싶다. 차라리, 마지막 부분의 어설픈 일본 경제 비판이 없었다면 훨씬 좋았을 것인데 말이다. 덕분에 우스꽝스러운 역자 서문도 나왔으니, 책을 두번 죽인 격이나 다름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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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나라에서 온 스파이
최인석 지음 / 창비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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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석을 처음 접한건 실천문학사에서 나온 소설집을 통해서였다. 제목은 잘 기억이 안나지만, 그가 쓴 단편 제목은 [세계의 바닷가]였다. 소설은 당시의 ‘운동’ 소설 답지 않게 추리소설의 구성을 탄탄하게 따르며 흘러나갔다. 소설을 끝낸 후, 슬며시 눈시울이 젖었다. 운동권 소설치고는 꽤나 셌던 김하기, 권운상 등등의 소설도 심드렁하게 봤건만 최인석의 [세계의 바닷가]는 마음 깊은 곳을 울렸고, 이후 나는 그의 추종자가 되었다.

최인석의 초기 소설들은 '잔잔하게' 사회성을 추구한다. 사회성이 너무 추상적인가? 그의 소설은 그 핵심에 있어 실천 지향적이다. 다만, 지향을 앙상하게 드러내는 것을 미학으로 삼았던 시대의 조류와 달리 그의 소설은 탄탄한 서사를 갖추고 있는데, 단편집 [혼돈을 향한 한걸음], [나를 사랑한 폐인], [아름다운 나의 귀신] 등이 그렇다. 그런데, 내가 과문했는지 작가의 특성인지 그의 장편은 접하기 힘들었다. 자고로, 소설의 제대로 된 맛은 장편에서 우러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의 '장편' 소설 [이상한 나라에서 온 스파이]를 뒤늦게 흔쾌히 집어들었다.

이미 [나를 사랑한 폐인], [아름다운 나의 귀신]에서 그 흔적이 드러나긴 했지만, 이 소설은 환상적 리얼리즘의 백미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리얼리즘은 현실에 천착하는 것인데, 어찌 그것이 환상 혹은 마술과 어울릴 수 있을까? 그래서, 이 계열에 속하는 소설이 더욱 매혹적인지도 모르겠다. 남미 혹은 그곳의 삶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면 전적으로 가브리엘 마르께스의 [백년의 고독] 덕택이다. 최인석의 이 소설은 국내에서는 보기 드문 환상적 리얼리즘을 시도했고, 내친김에 한국적인 완성까지 이뤄내고 말았다.

심우영은 고아로 태어나 공장이라는 주변부 자본주의 착취 메커니즘의 핵심을 피해 미군부대로 흘러든다. 그곳에서 자신의 모범이었던 건전한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몰락을 목격하고, 순애보의 타락에 아파하며, 층층히 세워진 폭력의 구조를 열성적으로 학습한다. 이 주변부 자본주의에서도 떨어질 듯한 벼랑 끝에 무슨 희망이 있겠냐고? 이 위태로운 삶에 나타난 존재가 지장보살과 같은 밥어미 작은년이다. 그녀는 '열고야'의 스파이. 도대체, 무슨 이야기냐고? 이 책의 스토리를 요약하는 일은 한마디로 무의미하다. 곳곳에 등장하는 판소리적 문체의 리듬에 (말 그대로) 몸을 맡기게 되고, 인물의 마음 속으로 통채로 빨려들어가고 만다. 읽는 이의 이러한 경험을 통째로 떠내는 것은 어쨌든 불가능하니까.

동시에, 독서를 진행하는 것 역시 매우 불편하다. 누구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현대사의 주변부를 접하는 건 의례 그렇지만, 이 소설의 감응 정도는 지나치다. 책을 읽다가 몇 번이나 덮어 버렸으며, 공공 장소에서는 표정이 너무 찡그려질까 두려워 함부로 펴지 못했다. '지옥이 텅비지 않는다면 결코 성불을 서두르지 않겠나이다. 그리하여 육도의 중생이 다 제도되면 깨달음을 이루리다.' 인간의 죄를 대신 받는 보살, 극락도로 가는 것을 자발적으로 거부한 이가 지장보살이라면, 소설에 등장하는 열고야의 간첩 '작은년'이 똑 그렇다. 그는 어머니이자 누이이며 연인이다. 주변의 벼랑이라는 황폐한 삶의 조건에서 인간의 선성(善性)을 발견해내는 기인하고 놀라운 능력을 지닌 존재이다.

작은년은 왜 열고야라는 낙원을 버리고 이 저주받은 땅에까지 몸소 강림했는가? 이 질문은 소설이 끝까지 추구하는 바이며 동시에 끝까지 의문으로 남는 점이기도 하다. 작은년의 존재는 신비스럽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비현실적인 공상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이룰 수 있는 아름다운 무엇일지도 모른다. 아마도, 최인석이 이 소설을 통해 거둔 환상적 리얼리즘의 성과라면 마르께스처럼 이처럼 현실/환상, 이성/감성의 경계를 성공적으로 허물었다는 데 있을 터이다. 아마도, 우리네 이야기인지라 흥미롭다는 삼자적 감성보다는 거리없음의 불편함과 아픔이 더 컸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에 대한 기대는 '기대 이상'으로 충족되었다. 엄지 두 개가 모자란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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