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박민규 지음 / 한겨레출판 / 200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책을 집어든 날 바로 저녁 무렵에 끝내버렸다. 책이 워낙 재미있어서 일까? 가볍고 날렵한 문체가 속독을 부추긴 것일까? 크게 집중해서 읽은 것도 아니건만 단숨에 페이지가 지나가 버렸다.
소설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우선 첫 번째 부분은 어린 시절 삼미 슈퍼스타즈를 통해 배운 한국 사회의 쓴 맛을 해학적으로 풀어내고 있다. 책 전체에 걸쳐 가장 압권이라 불러도 좋다. 80년대 말부터 90년대 초반 학번들이 알아챌만한 농담과 수다의 코드를 모아놓고 타이틀전을 벌이는 격이다. 프로야구에 대한 서술이라든가 이를 풀어내는 소년들의 기지는 누구나 어린 시절 추억의 한 켠에 쟁여두었을 만한 내용이다.
더불어, 은근한 회고풍으로 쓰고 있는 초반부는 소설이 가져야 마땅한 두가지를 잘 구현하고 있다. 우선, 회고풍으로 서술된 슈퍼스타즈에 대한 추억은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의식을 담고 있다. “잡기 힘든 공은 잡지 말고 치기 힘든 공은 치지 말자.” 어린시절 끝까지 삼미의 팬으로 남았던 두 소년은 이 잠언을 아픔으로 새기지만, 이후 삶의 궤적에서 다시 중요한 깨달음으로 다가온다. 두 번째로는 전반부의 회고체 서술이 지닌 문체의 독특함이다. 표지 뒤에 나와 있는 황석영의 선정 이유에는 '가벼움'이 문제로 떠올랐다고 되어 있지만, 거꾸로 이러한 자조적이고 독백적인 농담이야 말로 이 시대의 수다를 특징짓는 것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정작 주인공이 박터지게 머리 속에 지식을 우겨넣어 일류대에 입성하는 이후를 다룬 대학 시절은 매우 실망스럽다. 일단, 이 가운데 토막은 소설 전체의 주제의식과 완전히 동떨어져 있다. 이 시기의 삶이 삼미에 대한 추억과 교훈, 그리고 이후 교훈의 재발견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고리를 좀처럼 발견하기 힘들다.
에피소드나 스토리 진행, 그리고 문체까지 살짝 바뀐 이 토막은 90년대 초반에 크게 붐을 이루었던 주인석, 박일문 등의 '(운동권)회고담 소설'과 퍽 닮아 있다. 혁명, 섹스, 록큰롤은 삼중주는 그것이 진짜 그 누군가의 삶을 관통해 지나쳤다고 해도, 전혀 자연스럽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런데, 이 개인적인 악감정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
한가지 흥미로운 점은 운동권에 몸이나 마음의 일부를 담궜던 작가들은 엽기발랄함으로 한 없이 달려가다가도 줄에 매인 짐승처럼 다시 과거로 끌려들어간다는 것이다. [무협학생운동사]로 데뷔했다는 사실을 은근히 감추는 김영하, 이 방면의 대표주자인 백민석, 이들 모두에게서 비슷한 흔적을 읽게 되는 것은 그들이 지니고 있을 법한 일종의 찜찜한 부채감 때문일까?
그나마 마지막 토막은 좋았다. 프로의 세계에서 칠 수 없는 공을 쳐내지 않는 것, 잡을 수 없는 공을 포기하는 것은 죄악에 가깝다. 더구나, '프랜차이즈'의 실현에 불과한 식민지 땅에서 그 죄악에 대한 질타는 더욱 가혹하기 마련이다. 슈퍼스타즈가 준 교훈, 이러한 가짜 프로 의식을 거부하고 이기는 것을 거부하고 오직 자기 수양을 위해 야구를 한, 목적보다는 수단을 중요시한 교훈이 주인공에게 새로운 삶의 가치를 일깨워준다. 맑스의 사위인 라파르그가 말한 ‘게으를 수 있는 권리’란 게 이것일터이고, 네그리가 말한 노동의 거부란 바로 쳇바퀴처럼 순환하는 자본의 당위를 물리칠 때 가능한 것임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더구나, IMF라는 황망한 배신의 시간을 통해 전개되는 삼미의 재발견은 더욱 설득력있고 감동적이다. 다만, 주인공에게 교훈 전달자로 갑자기 부활한 그 시절의 단짝 조성훈이 일본에서 겪은 일은 너무나 동화같아서 고대극에서 볼 수 있는 "데우스엑스마키나dues ex machine" 만큼이나 작위적이라는 느낌은 지울 수 없다.
전체적으로 단숨에 읽히는 흥미와 함께 진지한 고민거리를 더불어 지닌 흔하지 않은 작품이다. 다만,체험에 기반해 쓰는 작가가 지닐 수 있는 한계 또한 또렷이 보여주었다는 점은 실망스럽다. 회고담 소설이나 내면을 주절거리는 소설을 혐오하는 나로서는 이처럼 서사에 강한 소설가가 또 하나 등장했다는 것을 두 팔로 환영하는 바이다. 그를 소개받았다는 사실만으로 이 소설은 유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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