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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대학살 - 프랑스 문화사 속의 다른 이야기들 ㅣ 현대의 지성 94
로버트 단턴 지음, 조한욱 옮김 / 문학과지성사 / 1996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을 산 건 책에 대한 익히 알았던 명성과 이에 더해 최근 1년 남짓 사이에 우리 가정에서 불붙고 있는 고양이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다. '고양이 대학살'이라니! 일단, 제목부터 꽤나 그럴듯하지 않은가? 하지만, 책의 구입이라는 행위에까지 도달하려면 개인적인 호감이라는 단순한 이유는 넘어서야 한다. 학부 때 꽤나 즐겨 읽었던 아날 학파에 일정하게 반기를 들었다고 전해들은 이른바 "망딸리테" 역사의 주요 저작의 하나라는 (출처가 불분명한) 지식도 책의 구매에 단단히 한 몫했다.
어쨌든, 책은 구입한 것은 1년도 넘은 일이지만, 어쩐 일인지 읽지는 못했다. 아마도, 경제학을 전공한데다가 구조주의적 사고방식에 익숙한 나에게, 자본주의 3층위 이론을 제시하며 물질 문명의 근원을 밝혀준 아날 학파의 역사 유물론적 가치를 부인했다는 사실 자체가 거북스러웠던 듯 싶다. 게다가, 최근 우리 서점가에 유행하고 있는 이른바 인류학을 원용한 쉬운 역사학 저술의 실망스러움도 책을 멀리하는 데 근거없는 한 몫을 했을 터이다. 이 책과 질낮은 역사 서술은 너무도 분명 구분되는 것이지만, 독서의 선택이란 비슷한 취향의 장 속에서 작용하기 마련이니까.
이렇게 내가 방치해 둔 책을 멜로리가 먼저 열심히 읽었고 매우 재미있다는 '강추' 사인을 켜주었다. 이쯤 되면 집어들지 않기가 더 힘든 법.
책의 부제가 알려주듯, "프랑스 문화사 속의 다른 이야기들"은 이 책의 소재와 주제 모두를 잘 포괄하고 있다. 저자는 일관성과 역사적 법칙을 현시한다는 거창하지만 관습적인 역사학의 목표를 버린 대신, 훨씬 구체적인 역사의 무대로 독자들을 끌고 간다.
로버트 단턴의 [고양이 대학살]은 이런 면에서 프랑스의 문화사를 관통하는 거대한 풍경화같은 느낌이다. 한쪽 영역에선 동화에 대한 정신분석학의 정적인 해석에 반대하여 동화가 지닌 역사성과 삶의 풍경을 강조하는가 하면, 다른 쪽 부분에서는 역사 교과서에서 앙상하게 추려지는 계급간의 대립이 어떻게 상징 투쟁으로 역동적으로 출현했는지를 그려보이고 있다(개인적으로 이 "고양이 대학살" 논문에서는 영국 노동 계급 자녀들의 학교에 대한 저항과 재순화를 동적으로 묘사한 책 Learning to Labor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로웠던 논문은 경찰 수사관이 기록한 문필 공화국의 분류와 해부이다. 혁명 직전 계몽주의의 불씨가 여기저기서 지펴지던 파리에서 도서감찰관 데므리가 모은 지식인에 대한 시시콜콜한 자료와 그 서술은 그 자체만으로도 흥미진진하다. 그는 왕국을 사수한다는 철저한 직업의식에 입각해있으면서도 지식인들의 느낌과 성향과 전력을 분류했고, 이 저술 덕분에 계몽주의라는 사상적 실체는 훨씬 풍부한 색채로 다가온다.
이렇듯 단턴이 프랑스 문화사 속의 이면을 캐낼 수 있었던 건, 문서 보관소를 인류학자의 심정으로 샅샅이 찾아 헤맸기 때문이다. 법칙에 따라서 간략하게 추려진 역사의 골격에서 대면할 수 없는 기이함과 난처함을 최대한 그 당시의 시각으로 따라간다는 것이 단턴의 전략인 셈이다. 그가 스스로 밝히듯, 이는 외부인으로서 매우 낯선 지역의 현지조사를 수행해야 하는 인류학자와 같은 처지이다. 문화적인 선입견이나 공통의 언어 없이 최대한 날 체험과 시각 만으로 그 사회를 재구성해낸다는 것이다.
하지만, (자신도 분명히 인정하듯이) 관찰과 저술을 동시에 수행할 수 있는 인류학과 관찰에 대한 부정확하고 불확실한 2차 기록으로만 저술 해야하는 이른바 망딸리떼의 역사 접근은 동일시할 수는 없다. 단턴이 결론에서 유보를 달듯이, 자신이 발굴한 자료의 정확성과 대표성은 느슨한 차원에서나마 담보되기 힘들다. 대신, 그는 현재 우리가 지닌 인식과 지적 체계가 그 자체로서 역사적인 것이라고 했을 때, 이러한 체계에 비추어 매우 "불투명한" 뭔가를 찾아냈다면 제대로 짚은 것 아니겠느냐고 슬쩍 우겨본다. "우리로서는 생각도 할 수 없어 보이는 것에 부딪혔을 때 우리는 낯선 정신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타당한 입구에 마주친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단턴이 자인하는 방법론적인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접근의 우위는 분명하다. 그에 따르면, 통계적 자료의 발굴과 이로부터 객관적이고 엄정한 역사를 도출해내려고 애쓴 아날학파의 노고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결론적으로는 자가 당착에 빠지고 말았다고 본다.
연옥의 영혼들을 위해 행해진 미사의 막대 그래프가 내려간 것에서 보벨은 탈기독교화를 보는 반면, 필립 아리에스는 신앙이 보다 내향적으로 강렬해졌던 경향을 보고 있다. 보벨, 로슈, 로제 샤르티에 같은 속세의 좌익들에게 있어서 통계학적 곡선은 세계관의 부르주아화를 대체적으로 지적하였던 것인 반면, 아리에스, 쇼뉘, 베르나르 플롱주롱 같은 종교적 우익에게 있어서 그것은 가족의 애정과 자선의 새로운 유형을 보이는 것이었다(368쪽).
요컨대, 통계와 계량으로 역사를 재구성하려 했던 아날학파는 모순에 빠져들거나 문화적 차원이 지닌 독자성 및 역사적 삶의 풍부성을 놓치고 말았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말하자면, 단턴의 방법론은 매우 흥미로움에도 불구하고 그 자신이 인정한 한계를 여전히 지니고 있다. 각 장 별로 단턴의 해석과 함께 실려 있는 원문을 읽어보면 역사학자로서 그의 뛰어난 상상력에 경탄하게 되지만, 이러한 해석이 역사에 대한 안정적인 문화적 이해방식으로서 가치를 지닐 것인지 선뜻 긍정하기는 힘들다. 물론, 책 한권 달랑(그것도 대충) 읽어보고는 이러한 결론을 짓는 것은 섣부르다. 곧이어 단턴의 주저인 [책과 혁명]을 읽을 계획이지만, 현재로서는 망딸리떼의 역사가 역사 이론으로 정립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확신하기 어렵다.
또하나, 최근의 인류학은 진화생물학(evolutionary biology)의 영향을 받아 이론없이 개별사를 서술하는 기존의 흐름에서 천천히 벗어나고 있다.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제레미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는 이러한 서술의 강점을 잘 보여주는 책이다. 그 자체를 그대로 이해한다는 기존 접근의 서술 중심성과 파편성을 보완할 강력한 대안으로서, 생물학적 존재로서의 인간과 그 진화의 특성을 출발점으로 삼자는 입장이 대두하고 있는 것이다. 개별성에서 한 발 벗어나 보편성을 흡수하는 쪽으로 움직이는 인류학의 이동에 비추어본다면, 인류학에 대한 단턴의 절대적 신뢰가 다소 의아하게 느껴진다. 물론, 인류학이라는 해독제를 통해 역사학이 풍부함을 지닐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망딸리떼의 역사가 '피와 살'을 동시에 갖춘 일종의 종합을 이룰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이런 개인적인 평가를 떠나서 [고양이 대학살]는 그 자체로서 매우 흥미롭고 격조 높은 책이다. 특히 역사학 분야에서 "알기 쉬운"이라는 종류의 꼬리표를 단 질낮은 책들이 판치는 지금의 시류에서는 더욱 그렇다. 역사학에 대한 개인적인 기호와 판단과는 별도로 엄지 두 개를 들어줄만한 명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