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뽀이, 경성을 거닐다 - 만문만화로 보는 근대의 얼굴
신명직 지음 / 현실문화 / 2003년 2월
평점 :
절판


현실문화연구에서 나온 이 책은 일전에 출간된 김진송의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와 쌍을 이루는 책이다. 김진송에 책에 크게 실망했던 바, 이 책에 큰 기대를 하지는 않았지만 이른바 '만화만평'들이 상당수 실려있다는 것을 알고는 냉큼 구입했다. 역시, 책의 가치는 저자의 논리 전개보다는 당시의 만화만평을 직접 볼 수 있다는 데 있다. 사실, 저자의 분류나 해설은 특별히 도움이 되지 않는다. 때로는 방해가 된다고 편이 맞을 것ㅇ,이고, 지나친 과잉해석으로 읽는 도중에 고개를 갸우뚱 거리게 되는 일이 적지 않았다.

이 식민지배기 근대와 전근대가 혼융된 시기의 신문 만화만평들을 보는 일은 경이 그 자체이다. 당시 식민지의 삶 속에서 형성된 '모던'이라는 것과 오늘날 우리의 삶들은 어쩌면 그리도 닮아 있는 것일까!

엉뚱한 이야기이지만, 식민지 근대화론 혹은 남한의 왜곡된 근대화론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한때, 한국 사회 변혁론의 주류를 이루었던 NL/PD론은 현실인식과 혁명 노선의 차이가 있었을 뿐, 남한사회가 근대화/자본주의화의 과정에서 어떤 의미로든 일탈/왜곡되었다는 점에서는 닮아있었다. 이와는 다르지만, 압축성장을 통한 (정상에서 벗어난) 근대화 때문에 우리가 제대로 된 근대적 '의식'이나 삶의 양식(모두스 베빈디)을 지닐 기회를 박탈했다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이 책의 만평들을 접하면서 엉뚱한 생각이 떠올랐다. 식민지라는 일제시대, 그 굴절/왜곡된 환경 속에서 움텄던 근대의식과 근대의 모습은 '식민지'이든, '제국주의 속의 자본주의'든, '압축성장'든 그 무엇이 되었든 간에 그 속에서 배양된 오늘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저자의 해설이 방해가 되었던 이유도 식민지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포착하려들기 보다는 이러한 왜곡된 근대화라는 렌즈 속에서 억지로 잡아내려 했기 때문이었다.

왜 당시의 삶과 지금의 삶이 닮아 있는가? 우리의 삶은 결국 '식민지 근대화'의 장기지속이었던가? 우리는 그 미몽에서 여전히 깨고 있니 못한 것인가? 오히려 반대가 아닐까? 우리가 갈망했고 지향했던 정상적인 근대의식, 정상적인(혹은 혁명적인) 근대화라는 이런 이미지가 미몽은 아니었을까? 오히려, 남한 자본주의의 발전을 주변부 자본주의/제국주의 하의 근대화/근대의식라는 또다른 유형으로 마땅히 제대로 분류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근대의 '다양한' 얼굴의 하나로 봤어야 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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