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시마 유키오 對 동경대 전공투 1969~2000 - 연대를 구하여 고립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미시마 유키오.기무라 오사무 외 지음, 김항 옮김 / 새물결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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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마유키오대전공투]가 나름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신문의 북섹션에 꽤 많이 비중있게 소개되었으니, 이 정도면 기획에는 성공한 셈이다. 대부분의 언론이 착목한 내용은 천황제의 온전한 부활을 외치며 할복한 극우 미시마 유키오와 동경대를 점거하며 기존 체제의 붕괴를 꿈꾸었던 극좌 전공투 사이의 대화라는 사실이다. 그래서인지, 대부분의 언론에서는 기사의 제목을 "극좌와 극우가 통했대"라는 식으로 뽑았다. 나도 북섹션의 유혹에 이끌려 책을 구입했지만, 책에 대한 이러한 평가는 정당한 것일까?

책의 앞부분에 해당하는 둘 간의 대담은 읽고는 그들의 만남이 이렇게 단순하지 않음을 깨달았다.(1) 극과 극은 통한다는 일반적인 통설이 항상 맞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경우를 자주 보게 되긴 하지만, '법칙'이라고 주장할 만큼은 못된다. 게다가, 미시마와 전공투 간의 대화에 대해 이러한 꼬리표를 다는 것은 어떤 점에서 부당하기까지 하다. 그들의 어색한 통정은 '극과 극은 통하기 마련'이라는 조소의 자기장에서 훌쩍 벗어나 있다는 편이 옳을 것이다.

우선, 둘 간의 대화/논쟁은 전혀 도식적이지 않다. 놀랍게도 정세적이거나 정치적이지도 않다. 천황제라는 첨예한 문제에 대해 대립할 때에도 둘은 추상적이고 철학적인 수준까지 깊게 들어간다. 둘 간의 대화는 공간과 시간성의 모순적 충돌, 역사에서 과거-현재-미래의 뒤엉킴, 한 실존적 개체를 존재하게 만드는 동인, 기존 체제의 파열과 해방구의 생성과 같이 얼핏보면 사변적이고 철학적인 주제들을 주로 섭렵하고 있다. 아마도, 노회찬과 정형근이 벌이는 시사토론 류의 재미난 싸움의 풍경을 기대했던 사람들이라면 다소 실망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 점이 둘 간의 만남을 더할 나위 없이 매력적으로 만든다. 구체적인 것이 항상 진리에 보다 가깝게 닿아 있고, 우리는 그 맥락에서만 비로소 진리 일반과 조우할 수 있다. 그래서, 전공투가 점령한 찰나의 해방구에서 벌이는 이들의 철학적이지만 치열한 논쟁이 훨씬 값진 것이다.

극좌와 극우가 통한다면 어떤 의미에서 그럴까? 폭력의 사용을 동의한다는 점에서? 아님 둘다 기존 체제를 꽤나 싫으니까? 이런 단편적인 대답을 넘어서려면 미시마가 왜 홀홀단신으로 봉쇄를 뚫고 동경대로 향했는지 알아야 할 것이다. 미시마 유키오와 동경대 전공투가 공유한 지점은 무엇이었을까? 한쪽은 일반화된 국가 정신으로서의 천황을 옹호했고 다른 쪽은 기존 체제의 소실점으로서의 해방구를 꿈꾸었던 존재들이었다. 아마도, 이들이 공유했던 것은 어정쩡하지만 강고했던 '일본 자본주의'의 종말이라는 지향이었을지도 모른다. 미사마는 '일본'에, 전공투는 '자본주의'에 온통 천착했던 것이 차이랄까? 이런 점 때문인지, 보편과 특수라는 범주의 문제에 있어서 둘의 차이는 상당히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는 이 논쟁에 담긴 가장 흥미로운 점의 하나이다.

나하고 제군들의 정치사상은 정반대라고 합니다. 정말 정반대겠지만, 단지 나는 지금까지 일본 지식인들이 사상과 지식에 힘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만으로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모습이 지긋지긋하게 싫었습니다. … 나는 일본인의 안심해버린 눈 속에서 뭔가 불안을 읽어내려 합니다. … 그런 점에서 제군들과 나 사이에 어떤 공감이 있을까 하고 이야기하러 왔지만, 나는 결코 제군들의 지지자가 아닙니다. 제군들을 이해하고자 하는 욕망에 불타 여기에 온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서로 상대를 이해하지 않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오늘은 이야기로 한판 붙어보고 싶습니다.

개인적으로 더욱 흥미로웠던 것은 미시마 유키오라는 인물이다. [금각사] 등을 통해 유미주의를 지향한 일본 소설가 정도로만 알고 있었던 나에게 그의 사상적 깊이와 통찰력은 꽤나 놀라운 것이었다. 토론을 마치고 난 이후 미시마 유키오가 따로 정리한 후기를 읽고는 굉장한 통찰력과 지력을 가졌던 인물이었다는 점을 새삼 알 수 있었다.

나의 전공투 방문은 대체로 유쾌한 경험이었다. … 나중에 들은 일이지만 '민청'(일본공산당 계열의 학생조직)이 토론회 유인물을 전부 뜯어냈기 때문에 토론장을 가리키는 표식은 전혀 없었다. … 나는 어디로 들어가야 할지 모른 채 입구에서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

잠시후 토론장 입구에 나를 고릴라 모습으로 캐리커처한 그림이 눈에 들어왔는데, 큰 글씨로 '근대 고릴라'라고 쓰여 있고 고랼라 사육료가 100엔 이상이라고 적혀 있었으며, [엽은인간]과 그 밖의 내 저서로부터 뽑아낸 인용문이 여기저기 풍자적으로 붙어 있었다. 내가 그걸 보고 웃는 것을 보며 많은 학생들이 이중삼중으로 나를 둘러싸고 웃고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 자체에서 나는 이미 이 회합에 웃음이 섞여 있다는 사실을 알아챌 수 있었다. 물론 그러한 웃음이 냉소나 조소일 수도 있으나, 적어도 사람은 웃으면서 싸우지는 못한다. …

나는 그들의 논리성을 인정하더라도 그들이 노리는 권력이 그다지 논리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그들이 적대하는 권력 자체의 비논리성이야말로 나 또한 싸워야 할 커다란 대상이라는 사실은 말할 필요가 없다. 내가 그러한 권력을 진정 논리적으로 만드는 일에 성공했을 때 3파 전학련(미시마는 전공투라는 말 대신 3파 전학련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또한 그와 마찬가지로 진정한 적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아닐는지?

책장을 넘기면서, 최근 몇 년간 우리의 진보진영에서 풍부해진 68에 관한 각종 담론에 중요한 공백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프랑스를 비롯해 서구의 68년에 대해서는 많은 논의와 운동의 로망까지도 생겨났지만, 이러한 관심이 무색하리만치 일본의 전공투를 진지하게 소개한 책이나 글은 드물다. 일본에 대한 민족 보편의 거부감이 무의식적으로 이러한 무관심을 낳은 것은 아닐까?
어떤 면에서 보면, 일본의 전공투 운동은 서구의 68보다 한층 더 흥미롭다. 우선, 히로마츠 와타루가 사상사적으로 제기했다는 '근대의 초극론'을 운동과 담론의 형태로 미리 (상당히 온전한 형태로) 선취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서구의 68만큼이나 일본의 전공투 운동은 자본주의를 넘어서 근대라는 시대 자체에 대한 성찰이자 항의였다.(2) 요컨대, 전공투는 패전의 민족적 굴욕을 딛고 단숨에 세계 제 2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해버린 일본의 특수성에 입각한 구체적이고 진지한 문제제기였던 셈이다. 한국 사회가 몇몇 지점에서 일본과 상당히 닮았다는 현실을 고려한다면, 전공투 운동에 대한 반성적 검토에서 우리가 배울 것이 꽤 많을지도 모를 일이다.

책의 내용은 매우 훌륭하지만, 책 자체는 그리 권할만 하지는 않다. 책은 두권의 원저를 합쳐놓은 형태인데, 당시 미사마와의 대담에 참석했던 사람들의 후일담을 담고 있는 후편이 필요했는지 의문이다. 이 부분의 사료적인 가치가 얼마나 뛰어난 것인지 섣불리 판단하기 힘들겠지만, 근대의 초극론이나 신으로서의 천황과 인간으로서의 천황의 차이와 같은 미묘한 역사특수적 맥락과 쟁점에 무지한 나 같은 사람들이 감당하기에 벅찬 지적 생략과 축약이 너무 많았다. 오히려, 대담 자체와 참석자들의 후기만으로 구성된 전편과 역자의 친절한 해설이 곁들여진 형태로 마무리 되었다면 책 자체나 가격 모두에서 만족할 만 했으리라.

P.S. 집에 [전공투]에 대한 만화책이 한 권있다. 지금은 절판된 책인데, 무척 흥미로운 책이다. 이 대담집을 읽고 다시 보니 훨씬 더 쏙쏙 잘 들어오는 듯.


(1) 기사를 썼던 기자들도 최소한 앞 부분의 대담은 읽었을텐데, 왜 한결같이 위의 기조로 기사를 썼는지 모를 일이다.

(2) 자신있게 말할 수는 없지만, 한때 유행했던 가라타니 고진의 논의들 역시 이 맥락에서 보다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는 느낌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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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연쇄살인 - 희대의 살인마에 대한 범죄 수사와 심리 분석
표창원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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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다. 연쇄살인자(serial killer)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이. 아마도 데이비드 핀처의 <세븐>의 오묘한 분위기 때문인 거 같기도 하고, 존 맥노튼의 <헨리: 연쇄 살인자의 초상>이 준 커다란 문화적 충격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아니면, 원래 슬래셔 무비를 좋아하는 '악취미' 가 어느덧 이쪽으로 슬쩍 물꼬를 틀었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책을 고를 때 "연쇄 살인"은 어느덧 중요한 키워드가 되어 있었다(뭐 그렇다고 내가 이쪽으로 매우 많은 책을 탐독했다는 것은 아니니 오해는 마시길).

우선, 이 방면에서 영화/소설에서 단편적으로 엿본 내용(혹은 편견)들을 그나마 체계적으로 다듬게(혹은 교정하게) 해주었던 책은 레슬러의 [살인자들과의 인터뷰]였다. 프로파일링 기법을 현장에서 개척하고 다듬었던 장본인 답게 그 사례들이 매우 생생했고 수사관 레슬러의 체험과 얽혀있는 살인의 추억들이 생생하게 다가왔다. 희대의 살인마들의 진짜 후일담을 만나는 즐거움(혹은 관음증) 또한 쏠쏠했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다만, 개인적인 경험과 뒤섞여 있어서 그런지 개념의 정립이나 사건의 재구성이 그닥 치밀하지 못한 점이 아쉬움으로 남았다. 나중에 원본을 아마존에서 찾아보니, 이 책은 전문 작가와 함께 집필된 대중적으로(아울러 꽤나 자극적으로) 기획된 책이었다.  

문득, 이 책을 읽으면서 (어느 책을 읽으면 그렇지 아니하랴만) 우리의 상황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한국에는 전형적인 의미의 연쇄 살인범은 없다는데, 과연 그래? 연쇄 살인은 누군가 주장하듯이 도시 및 자본주의 발달과 연결된 그 무엇일까?(에릭 라슨의 베스트셀러 [화이트 시티]는 이 점에서 도시가 창출해내는 이성과 광기의 이중주에 대해 매우 구체적인 풍경화를 보여주고 있기는 하다) 유영철 등의 범죄에서 드러나는 바, 최근 급증하는 한국의 연쇄살인적 징후를 담게 된 범죄들은 역으로 한국의 자본주의 발달 정도를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나? 문득, 한국에 범죄사를 이런 시각에서 살펴본 책이나 연구는 없을까 궁금해졌지만 취미로 파고들기에는 너무 깊이 들어가는 탐사라서 레슬러의 책을 덮은 후로는 쭉 잊고 지냈다.

이런 기억들이 되살아 난 것은 최근 표창원 교수의 책이 출간되고 난 이후였다. 원래 TV 고발 프로에서도 살인 관련 프로를 꼼꼼히 챙겨봐서인지 그의 얼굴이 그닥 낯설지 않았는데, 차분한 말투와 학자적인 신중함을 이미 인상깊게 눈여겨 봐둔 터였다. 한마디로 이 책은 연쇄살인을 한국의 맥락에서 (그것도 대중과 호흡하면서) 접근하려는 하는 꽤 야심적인 시도이다. 대개, 이런 대단한 시도들은 처참하게 실패하기 마련이어서 다소 걱정이 앞섰지만, 적어도 찌는 듯한 여름 날씨를 잊는데 조금은 도움이 되리라 기대하며 책을 집어들고야 말았다.

도입부로 들어간 최인구 사건을 제외하면 책은 연쇄살인에 대한 이론과 제반 개념을 정리하고 이를 기반으로 한국의 연쇄살인을 역사적으로 풀이해가는 구성을 취하고 있다. 한국의 연쇄살인'사史'라고 이름 붙여도 나쁘지 않을 듯 싶다.

앞 부분에 해당하는 이론적 접근에서 가장 인상깊게 본 것은 연쇄살인(serial murder)와 연속살인(continuous murder) 간의 개념 정리이다. 분명한듯 하면서 번역 자체에서부터 제법 애매한 개념인데, 저자는 이 부분을 꽤나 명쾌하게 정리해주고 있다. 그에 따르면 연속살인은 단속없이 감정의 흥분상태가 지속되면서 이루어지는 "spree murder"에 가깝다. 그에 반해 연쇄 살인은 하나 하나의 살인 사건이 독자적인 계획과 실행의 단위 지니면서 중간 중간의 냉각기를 거치는 형태를 띠고 있다.

아울러, 저자는 연쇄 살인에 대한 널리 알려진 기준과 조건들을 나열하며 대중 문화를 통해 과장되고 왜곡된 통념(증거를 남기지 않는 치밀한 살인, 특이한 시그니쳐 등)에 대한 일정한 교정을 시도하고 있는데, 이 역시 눈여겨 봐둘만 하다. 레슬러의 책처럼 연쇄살인범에 대한 프로파일링은 그들에 대한 심리 분석을 통해 범인의 성격에 대한 공통점을 추려내는 것을 핵심으로 한다. 레슬러의 책에도 그 과정과 연쇄 살인의 특징이 어느 정도 서술되어 있으나 이 책이 보다 정돈되고 간결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는 것도 책의 장점이다. 하지만, 심리학적 접근에서 흔히 접하기 쉬운 요인 나열식 분류와 서술 방식은 뭔가 결정적인 한방이 빠진 다소 맥빠진 느낌이다. 이러한 느슨함은 저자의 한계라기 보다는 아직까지 연쇄살인범의 재구성에 있어 보다 온전하게 다가가지 못하는 프로파일링 기법의 한계가 아닐까 추측해본다.

책에서 프로파일링 기법의 현단계와 그 쟁점에 대한  논의가 빠져 있는 점이 그래서 아쉽다. 개인적으로는 프로파일링 기법이 더욱 많은 사례와 보다 꼼꼼한 항목으로 정리 분류되는 단계를 겪는다면, 통계학적인 방법을 통해 양적으로 보다 정교한 접근을 취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즉, 프로파일링의 다양한 세부 항목들과 범죄의 성향 수법들 및 각종 전과 및 범죄 자료들을 통계학적으로 연관시키는 시스템이 가능하다면 전문가들의 질적 진단에 의한 오류를 최소화시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기대 말이다. 책에서도 프로파일링이란 것 자체가 수사에 혼선을 초래하고 되려 범인의 검거를 방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조심스럽게 추구되어야 한다는 조건을 달고 있지만, 이를 보정하기 위한 별다른 대책이나 방법이 소개되어 있지는 않다. 이에 대한 추가적인 논의가 궁금하다면 범죄심리학 문외한이 너무 앞서 나간 것이 될까?

좌우간, 이렇게 잘 정리된 이론부를 지나고 나면 1970년대부터 2000년대의 유영철까지 연쇄살인범죄의 궤적들이 빼곡하게 수록된 역사로 나아가게 된다. 단편적으로 기억하고 있는 사건들의 내막을 알게 되면서 느끼는 경이와 두려움에 책장을 정신없이 넘기고 말았다. 저자의 말처럼, 이렇게 생각보다 많은 연쇄살인 사건들 앞에서 화성 사건은 되려 너무 과장된 면이 없지 않다.

사회과학을 전공하는 입장에서 가장 먼저 들어오는 것은 우리에게 유달리 사회적 균열의 틈새에 놓인 찰스 맨슨형의 연쇄살인자가 많았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실제 부자들에 대한 공격이라는 형태로 실현되었건 아니면 엉뚱하게 사회적 약자에 대한 폭력으로 우회되었건 간에, 사회에 대해 느낀 소외감이 그들의 범죄에 주요한 동기이자 뒤틀린 정당화였다는 점은 일견 놀랍기도 하다. 하지만, 어찌 보면 급속한 사회이동의 자취에 남겨진 집단 정신병의 상흔인가 싶어 뒷맛이 씁쓸하다.  

그간 우리가 언론에서 단편적으로 때로는 선정적으로 접해온 사건들에 대해 저자가 많은 자료를 접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다만, 레슬러의 책에서 보듯 프로파일링의 핵심이 실제 범인과의 면밀한 접촉을 통한 이론화/유형화에 있다고 할 때, 책의 서술이 수사 자료 및 알려지지 않았던 후일담에 대한 재구성과 분석에 치우친 듯한 느낌은 꽤나 아쉽게 다가온다(실제로 저자가 범인들에 대한 프로파일링의 기회를 가졌는지 나로서는 알 도리가 없다). 범인에 대한 심리분석 역시 고개를 끄덕이게 할 뿐 뇌리의 현들을 튕겨주는 듯한 탄력은 찾아보기 힘들다.

물론, 이는 전적으로 저자의 잘못이라고 볼 수 없을 것이다. 레슬러는 자신의 책에서 연쇄살인자를 형장의 이슬로 허무하게 보내기보다 이들을 거름삼아 연쇄살인범을 예방할 수 있는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러한 프로파일러의 호소는 그것이 공익의 차원에서 아무리 타당하더라도 현행의 법 체계 내에서 제도적으로 수용되기도 힘들 듯 하거니와 직접적인 형태의 복수를 원하는 대중의 불같은 정서와도 부합하지 않을 것이다.

한편, 학자의 길을 걷기 전에 경찰에 직접 몸담았던 저자가 들려주는 수사 과정의 이모저모는 <살인의 추억>과 겹쳐지는 부분이 많아서 인지, 황당함과 안타까움을 전하기도 한다. 관할 구역 간의 보이지 않는 텃세와 내부의 정치적인 고려사항 혹은 쓸데없는 시국관리에 치안력을 낭비하는 동안 수사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거나 한번 잡았던 범인들을 종종 놓치게 되는 대목들에서는 자연스레 눈살을 찌푸리게 되었다. 반면, 이 모든 악조건들 속에서도 (살인의 추억의 송강호가 분했던 시골 형사의 자세 마냥), 발로 죽어라 뛰어 범인을 잡아내고 말았던 대한민국 형사들의 근성 앞에서는 솔직히 박수라도 쳐주고 싶었다.(참고로 말하면, <살인의 추억>에 등장하는 형사중 누구편이냐고 묻는다면 공식적으로 서울 형사 편이라고 말하겠지만, 심정적으로는 시골 형사라고 고백하고 싶을 때가 종종 있다.)

어쨌든, 이래저래 아쉬운 점은 있지만 [한국의 연쇄살인]은 전체적으로 균형 잡혀 있으며 유쾌하지는 않을지라도 재미 삼이 읽기에 나쁘지 않은 책이다. 책장을 덮으면서 문득 미셸 푸코의 근대에 관한 연구의 메스가 (정신)병원을 향해 있음을 떠올리게 되었다. 과거 병원이야말로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재판소와 같은 역할이었고, 바로 그 작용에 근대와 함께 성립한 이성의 권력이 함께 작동하고 있었다고 그는 보았다. 아마도 한국의 연쇄살인범에서 한국의 근대화가 빠른 속도로  움직이면서 만들어낸 권력 작용의 집단적인 병적 징후들에 대한 '고고학적인 발견'을 이룰 수 있지는 않을까 공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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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짜경제학 - 상식과 통념을 깨는 천재 경제학자의 세상 읽기
스티븐 레빗 외 지음, 안진환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5년 6월
평점 :
절판


존 베이츠 클라크 메달을 받은 스티븐 레비트야 경제학계에서는 널리 알려진 인물이지만, 책 제목이 참으로 요상하다. 아마존에서 사려고 벼르다가, 최근 눈에 띄게 빨리진 베스트셀러의 국내 번역 속도를 감안하여 조금 더 기다리는 전략을 취했다. 역시나! 책이 바로 번역되어 나왔다. 역자가 썩 마음에 들진 않지만 나름 무난한 번역을 하는 사람이라서 그럭 저럭 마음에 든다. 역시 기획출판에 있어서도 제국이 한수 위라는 생각이다. 최고의 경제학자와 최고의 글쟁이를 붙여 놓았으니 도랑 치고 가재 잡겠다는 노림수다. 대개, 논리는 칼 같아도 언어가 빈곤하고 건조한 것이 경제학자라는 족속이고 보면 저자 둘이 엮인 것은 썩 훌륭한 궁합이다.

이미 그 괴상한 제목과 흥미로운 내용으로 북미에서도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른 책인데, "Freakonomics"라는 제목보다는 원저의 부제가 나의 마음을 더 끌었다. " A Rogue Economist Explores the Hidden Side of Everything" 얼마나 멋진 제목인가. 특히, "Rogue"라는 대목이 와 닿는다. 어떻게 국역본에서 이 단어를 "천재"로 번역했단 말인가!

책은 술술 잘 읽힌다. 속독과는 거리가 멀지만, 잡은지 하루만에 뚝딱 해치웠다. 책은 제목 그대로 삶의 이면을 집요하게 파고 든다. 그는 경제학이 소비자, 기업과 같은 전통적인 주제들을 분석하는 데 활용하는 방법으로 현실을 고문하면 흥미로운 질문과 생뚱맞지만 쓸만한 해답이 튀어나온다고 믿는다. 그 방법이 뭐냐고? 바로 사람들은 인센티브에 반응한다는 단순하지만 명징한 사실이다.

이 인센티브라는 무기로 미국 사회의 역사와 동시대의 삶을 헤집어 놓는데, 그 질주는 어지러우리만치 종횡무진이다. 고부담 시험제도 하에서 교사가 학생들의 점수를 조작할 가능성을 탐색하다가, 스모 선수들의 암묵적 담합을 밝혀내는가 하면, 다시 시선을 틀어 KKK단과 부동산 중계업자가 공유하고 있는 엉뚱한 정보의 문제를 밝혀낸다. 은밀한 갱단의 조직구성이 세상에 널린 자본주의 기업 맥도날드과 닮았다는 괴변에서 그들의 조직운영의 인센티브를 논하는가 하면, 낙태시술의 합법화가 미국의 범죄율을 줄였다는 논쟁적인 주장으로 거침없이 나아간다. 아이의 이름을 선택하는 데 있어 작용하고 있는 사회적 요인에 대해서 매우 황당해보이지만 세밀한 논설에 이르면, 어느새 아쉬움에 쩝쩝거린 채 책장의 끝을 잡고 있는 자신을 보게 된다. 품격과 재치까지 곁들여진 산뜻한 지적 수다의 향연이라면 느낌을 적당히 표현한 것이 될까?

경제학자로서 레비트가 지닌 미덕은 크게 두가지라고 보고 싶다. 우선, 레비트는 경제학자들이 지니고 있는 "무게감"  혹은 "진지함"이 없다. 세속적인 수준에서 경제학이라고 하면 뭔가 거대한 것을 추구해야 할 듯(물가 안정을 추구하고, 효율성을 추구하고, 실업을 줄이는 등의 공공 선의 추구에서 주식 등 투자나 이재에 밝아 떼 돈을 번다는 사적인 성공의 쟁취까지)하거나, 전문적인 차원에서 본다면 일단 "Econ(omics)"이라는 운을 떼기 전에 "Math(ematics)"라는 고된 수련장에서 강철처럼 단단하게 몸을 만들고 나와야 할 것 같은 직업적 강박관념 말이다. 오히려, 이러한 사슬에서 자유로운 사고를 펼치는 것이야말로 그의 장점이 아닐까 싶다.

두번째로 그의 실증 지향적 사고방식이다. 공상이나 술자리에서의 안주거리 정도로 적합할 법한 추론을 헛되게 날리지 않고 해당되는 자료를 발견해내는 그의 감각은 거의 '동물적'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실증을 중시하는 태도야 이미 경제학 일반에서 보편화된 것이지만, 미시 자료를 뽑아내는 그의 솜씨는 훔쳐오고 싶을 만큼 부러운 재능이다.

대개, 이런 식의 책은 경제학적인 기본 논리를 어중간하게 끌어들여 그 개념을 간략히 소개하고는 "알기 쉬운"이나 "열린" 따위의 제목을 달아놓기 일쑤다. 아니면 비교적 세밀한 논설을 취하고 있어도 그 논리가 너무 역겨워 받아들이기 힘든 경우가 많은데(랜즈버그의 [Armchair Economist]가 딱 그렇다. 최근 [런치타임 경제학]이라는 제목으로 다시 번역되어 나왔다), 이 책은 그 두 가지 함정을 모두 잘 빠져나온 책이다. 다만, 몇몇 대목에서는 뒷맛이 개운치 않은 면이 있는 것은 사실이나, 더운 여름날을 잊게 해줄 만큼 짜릿한 지적 여행임은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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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것의지망생 2005-07-10 0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책은 열심히 보고 있지만 종횡무진 질주에 어지러워하고 있는 참이었는데.. 정말이지 롤러코스터 같은 책입니다. 서평 즐겁게 읽고 갑니다~

초콜렛 2005-07-14 18: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진 서평 고맙습니다. 이 책 찜했습니다.

두비 2005-07-20 2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단한 서평입니다. 이 책을 편집한 편집자인데요... 앞으로 책 만들 때 이 서평 떠오를 것 같습니다. 참! 'rouge'를 '천재'로 바꾸어 부제를 단 점은... 솔직히 상업적인 고려 때문이었습니다. '괴짜'에 '깡패''불량'까지 가기에는...

귀여운양~ 2005-07-21 1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멋진 서평이네요. 저도 한번 읽어 봐야 겠습니다.

오우아 2005-07-26 1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괴짜 경제학이라는 호기심에 재밌게 읽었습니다. 또한 좋은 서평을 대하고 보니 저의 부족함을 느낌니다. 다만 조금 아쉬움이 있다면 사과 속에 왜 레몬이 들어있는지, 생각해봤으면 어땠을까 합니다. 이것은 저자 말대로 정보의 비대칭성 문제와 관련이 있는데 그 부분에 대한 해석이 없음이 아쉬움으로 남는 듯 합니다. 좋은 서평 잘 읽었습니다.

2005-07-26 10: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슈마리 2005-07-26 15: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왔더니, 이렇게 많은 덧글을. jozefow님 말이 맞네요. 제가 원래 이름을 잘 틀립니다. 고쳐두겠습니다. 모두들, 감사합니다.

더운 여름 건강하게 보내시길.
 
비즈니스 경제학 - 불황에서 살아남는 성공 비즈니스 노하우
이토 모토시게 지음, 홍찬선 옮김 / 시공사 / 2004년 7월
평점 :
절판


경제학,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여기저기 경제학 강의를 다니다보면, 가끔 황당한 질문을 받게 될 때가 있다.

"미시경제학은 왜 들으려 하나요?"

"주식 투자에 도움이 될까 해서..."

"미시경제학은 주식 투자하고는 상관이 없는데요"

"그럼, 경제학은 뭐에 쓸모가 있나요..."

사실, 쓸모가 없다는 대답이 솔직한 것일지 모르나, 경제학으로 밥을 먹고 사는 터라서 그렇게 말할 수는 없는 법. 대개, 경제의 원리를 깨우치는 데 도움이 되고, 감각을 키우는데 필요하다는 식으로 대충 넘어가고 마는 것이 보통이다.

가끔, 경제학 교과서이나 대중서를 대할 때면 지나칠만큼 트렌디하게 흘러가는 경영학 관련 서적들과 크게 대조적이라는 생각이 들곤 한다. 커리큘럼의 규범이 확실하고 립서비스와 진배없는 사기가 아닌 진정한 학문이라서 그렇다, 라는 항변이 가능하겠지만 '자연'이 아닌 '사회'의 과학이고 보면 그 이론이나 이데올로기를 소비하는 대중이 외면하고 소비층이 얇아지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경제학의 위기일지도 모른다.

쉽게 썼다는 수십종의 경제학 풀이서들도 이러한 경향에서 크게 다를 바는 없다. 시중에 나가보면, 원론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딱딱하고 비싼 교과서를 빼고서도, "알기 쉬운"이라는 꼭지를 단 경제학 대중서는 많다. 하지만, 필자의 경험으로 이러한 책들 중에서 제대로 건질만한 책은 극히 드물다. "알기 쉬운"이라는 간판을 내건 이 책들은 경제원론의 표준적인 주제나 쳬계를 따르되, 수식과 그래프만 없애고 몇 가지 잘 알려진 사례를 그럴듯하게 재포장해 내놓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반복적으로 다뤄지는 기본기 이외에, 그리고 경제학 전공자를 위한 전문 교과서 이외에, 대중을 유혹할 수 있는 보다 그럴듯한 포장과 알맹이를 지닌 경제학 대중서는 매우 드물다는 말이다.

산업조직으로 풀어낸 경제학의 묘미

런 면에서 보면, 이토 모토시게의 [비즈니스 경제학]은 그 성공과 실패를 떠나서 매우 대담한 시도를 담고 있는 책이다. 이토 모토시게는 국제경제학을 전공한 일본의 학자로서 전방위적인 관심과 더불어 대중적인 글쓰기로도 널리 알려진 사람이다.

"비즈니스"라는 대중적인 골자를 빼놓고 보면, 이 책은 이른바 '산업조직'에 관한 책에 가깝다. 경제학 원론이나 개론을 가르칠 때 산업조직에 관한 부분에서 김이 빠져버리기 일쑤다. 일단, 이론적인 기반이 되는 완전경쟁 시장을 다루고 그 대척점에 선 완전 독점을 다룬다. 그렇다면, 현실은 그 사이 어딘가 일텐데, 기업간의 현실적인 경쟁의 모습을 담고 있는 과점 시장은 분석이 복잡하다는 이유로 피해간다. 은근 슬쩍 넘어간다고 쳐도, 뒷 맛이 개운치 않기는 마찬가지.

현대 경제학에서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세련화된 산업조직을 원론 차원에서 수용하지 못하다는 이유는 복잡하다는 것이다. 기초적인 내용만으로도 충분히 부담스러운데 엎친데 덮칠 필요는 없다는 것. 또한, 과점 시장을 분석하기 위해서는 게임 이론이라는 또하나의 분석 도구가 필요한데 이것 역시 원론이나 개론 수준에서 가르치고 배우기에는 다소 부담스럽게 다가올 수 있다.

모토시게는 고고할 수 있는 학자임에도 이런 부담스러움을 기꺼히 감수하면서, 속세의 때까지 적당히 묻히기로 작정한 모양이다. 책의 전반부는 산업조직론의 기본 테마인 가격 차별의 논리, 주인-대리인 문제, 그리고 게임이론을 통한 경쟁전략과 같은 최신의 내용을 담고 있다. 이들은 이미 산업조직론에서는 잘 알려진 주제들이지만, 이를 대중적으로 포장해 잘 먹기 좋게 조리해두었다는 점만으로도 그 가치는 충분하다.

이렇게 산업조직론의 대강을 훑은 후에 후반부에는 좀 더 다양한 주제가 펼쳐진다. 마이클 포터의 경쟁 전략 개념을 차용해 경영학의 논의를 끌어들이는가 하면, 정보화로 인해 초래되는 경제의 변화를 논하고 저자 자신의 전공 분야인 국제경제와 비즈니스까지 풀어나가고 있다. 전반부에 비해 공력이 떨어지는 맛이 없지는 않지만, 다양한 주제를 쉽게 전달핟나는 애초의 취지에는 여전히 충실하다.

토착 경제학을 위한 노력

내용을 떠나서 이 책에서 가장 높이 살만한 부분은 경제학의 이론이 말하는 현실을 꼼꼼히 찾아내려 한 모토시게의 노력이다. 요시노야의 규동 판매 전략이라든가 세븐 일레븐의 점포 확대 방식 등을 논한 부분 등 책 곳곳에 등장하는 일본 기업들의 실제 사례는 경제학의 토착화를 시도하는 저자의 지향과 노력을 엿볼 수 있다.

우리의 교과서들에게 가장 아쉬운 부분이라면 그럴듯한 토착적인 사례가 크게 부족하다는 것이다. 경제신문 기사를 맹맹한 수준에서 이리저리 모아놓은 것이 대부분이고 본다면, 적절한 예를 찾아 이론과 맞춰나가려는 우리 학자들의 노력이 부족했던 것 아닐까 싶다. 고고함을 버리고 속세로 뛰어든 모토시게를 우리의 학문 풍통에서 만나고 싶은 생각 역시 간절해진다. 이왕이면 값비싼 하드커버 양장을 한 딱딱하고 부담스러운 교과서 말고 보다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는 부드러운 대중서라면 더 바랄 나위가 없겠다.

아쉬운 점 몇 가지  

경제학에 흥미를 느끼는 모든 이들에게 일독을 권하고 싶은 책이지만, 다음의 두가지는 아쉽게 느껴진다.

첫째, 산업조직론의 이론체계를 지닌 앞부분이 보다 탄탄한 이론의 구성과 치밀한 사례의 소개로 전개됨에 반해 다양한 주제가 섞여 있는 후반부에 들어서는 아무래도 맥이 풀리는 감이 없지 않다. 특히, 정보통신 혁명을 다루는 부분은 피상적인 수준에 머무르고 말았다.  특히, 배리안(H. Varian)과 샤피로(R. Shapiro)가 쓴 명저 [Information Rules]와 같은 뛰어난 참고도서가 존재하는데도 그 내용들이 책에서 거의 흡수되지 않은 점은 꽤나 의아하다. 앞서 장들이 해당 분야의 주요 교과서들을 참고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아쉽다.

둘째, 책의 번역과 관련된 문제. 번역의 전반적인 수준은 무난하나, 세부적으로 아쉬움을 남기는 부분들이 간혹 드러난다. 크게 두 가지만 지적하겠다.

우선, 일본 책을 번역할 때 미국 저자들의 이름이 어떻게 표기되어야 하는지 종종 의아할 때가 있다. 개인적으로는 우리의 번역서에서는 서구권 저자들의 인명 표기에 가타카나 표기를 따를 필요는 없다고 본다(현재 이에 대한 번역업계의 규정이나 관행이 어떤 것인지 필자로서는 아는 바가 없다). 어쨌든 폴 밀그롬(Paul Milgrom)이 "미르그롬"이라고 적혀 있는 부분은 꽤나 거슬렸다.(하지만, 마이클 포터 같은 경우에는 그냥 "포터"라고 되어 있는 것으로 봐서는 역자의 실수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다음으로 원저자인 모토시게의 착각이라고 생각되지만, 게임이론 관련 부분의 참고서가 된 딕시(Dixit)와 네일버프(Nalebuff)의 책은 [전략의 게임 Games of Strategy]가 아니라 [전략적 사고 Thinking Strategically]이다. [전략의 게임]은 딕시와 수전 스키스(Susan Skeath)가 쓴 다른 게임이론 관련 서적의 제목이다. 미루어 짐작하자면, 원저자가 혼동했거나 아니면 일본에서 출판될 때 책 제목이 바뀌었거나 둘 중 하나일 듯 하다(번역문에는 영어 원제 앞에 "전략적 사고란 무엇인가"라고 표기되어 있어 전자일 가능성이 더욱 높아 보인다). 하지만, 번역이 또하나의 창작이라는 적극적인 취지에서는 이러한 부분 정도는 미리 잡아낼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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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대학살 - 프랑스 문화사 속의 다른 이야기들 현대의 지성 94
로버트 단턴 지음, 조한욱 옮김 / 문학과지성사 / 1996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을 산 건 책에 대한 익히 알았던 명성과 이에 더해 최근 1년 남짓 사이에 우리 가정에서 불붙고 있는 고양이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다. '고양이 대학살'이라니! 일단, 제목부터 꽤나 그럴듯하지 않은가? 하지만, 책의 구입이라는 행위에까지 도달하려면 개인적인 호감이라는 단순한 이유는 넘어서야 한다. 학부 때 꽤나 즐겨 읽었던 아날 학파에 일정하게 반기를 들었다고 전해들은 이른바 "망딸리테" 역사의 주요 저작의 하나라는 (출처가 불분명한) 지식도 책의 구매에 단단히 한 몫했다.

어쨌든, 책은 구입한 것은 1년도 넘은 일이지만, 어쩐 일인지 읽지는 못했다. 아마도, 경제학을 전공한데다가 구조주의적 사고방식에 익숙한 나에게, 자본주의 3층위 이론을 제시하며 물질 문명의 근원을 밝혀준 아날 학파의 역사 유물론적 가치를 부인했다는 사실 자체가 거북스러웠던 듯 싶다. 게다가, 최근 우리 서점가에 유행하고 있는 이른바 인류학을 원용한 쉬운 역사학 저술의 실망스러움도 책을 멀리하는 데 근거없는 한 몫을 했을 터이다. 이 책과 질낮은 역사 서술은 너무도 분명 구분되는 것이지만, 독서의 선택이란 비슷한 취향의 장 속에서 작용하기 마련이니까.

이렇게 내가 방치해 둔 책을 멜로리가 먼저 열심히 읽었고 매우 재미있다는 '강추' 사인을 켜주었다. 이쯤 되면 집어들지 않기가 더 힘든 법.

책의 부제가 알려주듯, "프랑스 문화사 속의 다른 이야기들"은 이 책의 소재와 주제 모두를 잘 포괄하고 있다. 저자는 일관성과 역사적 법칙을 현시한다는 거창하지만 관습적인 역사학의 목표를 버린 대신, 훨씬 구체적인 역사의 무대로 독자들을 끌고 간다.

로버트 단턴의 [고양이 대학살]은 이런 면에서 프랑스의 문화사를 관통하는 거대한 풍경화같은 느낌이다. 한쪽 영역에선 동화에 대한 정신분석학의 정적인 해석에 반대하여 동화가 지닌 역사성과 삶의 풍경을 강조하는가 하면, 다른 쪽 부분에서는 역사 교과서에서 앙상하게 추려지는 계급간의 대립이 어떻게 상징 투쟁으로 역동적으로 출현했는지를 그려보이고 있다(개인적으로 이 "고양이 대학살" 논문에서는 영국 노동 계급 자녀들의 학교에 대한 저항과 재순화를 동적으로 묘사한 책 Learning to Labor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로웠던 논문은 경찰 수사관이 기록한 문필 공화국의 분류와 해부이다. 혁명 직전 계몽주의의 불씨가 여기저기서 지펴지던 파리에서 도서감찰관 데므리가 모은 지식인에 대한 시시콜콜한 자료와 그 서술은 그 자체만으로도 흥미진진하다. 그는 왕국을 사수한다는 철저한 직업의식에 입각해있으면서도 지식인들의 느낌과 성향과 전력을 분류했고, 이 저술 덕분에 계몽주의라는 사상적 실체는 훨씬 풍부한 색채로 다가온다.

이렇듯 단턴이 프랑스 문화사 속의 이면을 캐낼 수 있었던 건, 문서 보관소를 인류학자의 심정으로 샅샅이 찾아 헤맸기 때문이다. 법칙에 따라서 간략하게 추려진 역사의 골격에서 대면할 수 없는 기이함과 난처함을 최대한 그 당시의 시각으로 따라간다는 것이 단턴의 전략인 셈이다. 그가 스스로 밝히듯, 이는 외부인으로서 매우 낯선 지역의 현지조사를 수행해야 하는 인류학자와 같은 처지이다. 문화적인 선입견이나 공통의 언어 없이 최대한 날 체험과 시각 만으로 그 사회를 재구성해낸다는 것이다.

하지만, (자신도 분명히 인정하듯이) 관찰과 저술을 동시에 수행할 수 있는 인류학과 관찰에 대한 부정확하고 불확실한 2차 기록으로만 저술 해야하는 이른바 망딸리떼의 역사 접근은 동일시할 수는 없다. 단턴이 결론에서 유보를 달듯이, 자신이 발굴한 자료의 정확성과 대표성은 느슨한 차원에서나마 담보되기 힘들다. 대신, 그는 현재 우리가 지닌 인식과 지적 체계가 그 자체로서 역사적인 것이라고 했을 때, 이러한 체계에 비추어 매우 "불투명한" 뭔가를 찾아냈다면 제대로 짚은 것 아니겠느냐고 슬쩍 우겨본다. "우리로서는 생각도 할 수 없어 보이는 것에 부딪혔을 때 우리는 낯선 정신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타당한 입구에 마주친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단턴이 자인하는 방법론적인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접근의 우위는 분명하다. 그에 따르면, 통계적 자료의 발굴과 이로부터 객관적이고 엄정한 역사를 도출해내려고 애쓴 아날학파의 노고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결론적으로는 자가 당착에 빠지고 말았다고 본다.

연옥의 영혼들을 위해 행해진 미사의 막대 그래프가 내려간 것에서 보벨은 탈기독교화를 보는 반면, 필립 아리에스는 신앙이 보다 내향적으로 강렬해졌던 경향을 보고 있다. 보벨, 로슈, 로제 샤르티에 같은 속세의 좌익들에게 있어서 통계학적 곡선은 세계관의 부르주아화를 대체적으로 지적하였던 것인 반면, 아리에스, 쇼뉘, 베르나르 플롱주롱 같은 종교적 우익에게 있어서 그것은 가족의 애정과 자선의 새로운 유형을 보이는 것이었다(368쪽).

요컨대, 통계와 계량으로 역사를 재구성하려 했던 아날학파는 모순에 빠져들거나 문화적 차원이 지닌 독자성 및 역사적 삶의 풍부성을 놓치고 말았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말하자면, 단턴의 방법론은 매우 흥미로움에도 불구하고 그 자신이 인정한 한계를 여전히 지니고 있다. 각 장 별로 단턴의 해석과 함께 실려 있는 원문을 읽어보면 역사학자로서 그의 뛰어난 상상력에 경탄하게 되지만, 이러한 해석이 역사에 대한 안정적인 문화적 이해방식으로서 가치를 지닐 것인지 선뜻 긍정하기는 힘들다. 물론, 책 한권 달랑(그것도 대충) 읽어보고는 이러한 결론을 짓는 것은 섣부르다. 곧이어 단턴의 주저인 [책과 혁명]을 읽을 계획이지만, 현재로서는 망딸리떼의 역사가 역사 이론으로 정립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확신하기 어렵다.

또하나, 최근의 인류학은 진화생물학(evolutionary biology)의 영향을 받아 이론없이 개별사를 서술하는 기존의 흐름에서 천천히 벗어나고 있다.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제레미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는 이러한 서술의 강점을 잘 보여주는 책이다. 그 자체를 그대로 이해한다는 기존 접근의 서술 중심성과 파편성을 보완할 강력한 대안으로서, 생물학적 존재로서의 인간과 그 진화의 특성을 출발점으로 삼자는 입장이 대두하고 있는 것이다. 개별성에서 한 발 벗어나 보편성을 흡수하는 쪽으로 움직이는 인류학의 이동에 비추어본다면, 인류학에 대한 단턴의 절대적 신뢰가 다소 의아하게 느껴진다. 물론, 인류학이라는 해독제를 통해 역사학이 풍부함을 지닐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망딸리떼의 역사가 '피와 살'을 동시에 갖춘 일종의 종합을 이룰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이런 개인적인 평가를 떠나서 [고양이 대학살]는 그 자체로서 매우 흥미롭고 격조 높은 책이다. 특히 역사학 분야에서 "알기 쉬운"이라는 종류의 꼬리표를 단 질낮은 책들이 판치는 지금의 시류에서는 더욱 그렇다. 역사학에 대한 개인적인 기호와 판단과는 별도로 엄지 두 개를 들어줄만한 명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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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inkampf 2005-01-05 0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총균쇠의 저자는 제레미가 아니고 제레드 다이아몬드입니다.

그리고 "엄지 두 개"는 영어권 국가들에서 출간된 책들의 서평에서 자주 등장하는 "two thumbs up"을 그대로 옮긴 표현이라 매우 어색하군요....

전체적으로 좋은 글이라 생각되지만 옥에 티라고 생각되는 부분을 찾아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