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시마 유키오 對 동경대 전공투 1969~2000 - 연대를 구하여 고립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미시마 유키오.기무라 오사무 외 지음, 김항 옮김 / 새물결 / 2006년 3월
평점 :
품절


[미시마유키오대전공투]가 나름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신문의 북섹션에 꽤 많이 비중있게 소개되었으니, 이 정도면 기획에는 성공한 셈이다. 대부분의 언론이 착목한 내용은 천황제의 온전한 부활을 외치며 할복한 극우 미시마 유키오와 동경대를 점거하며 기존 체제의 붕괴를 꿈꾸었던 극좌 전공투 사이의 대화라는 사실이다. 그래서인지, 대부분의 언론에서는 기사의 제목을 "극좌와 극우가 통했대"라는 식으로 뽑았다. 나도 북섹션의 유혹에 이끌려 책을 구입했지만, 책에 대한 이러한 평가는 정당한 것일까?

책의 앞부분에 해당하는 둘 간의 대담은 읽고는 그들의 만남이 이렇게 단순하지 않음을 깨달았다.(1) 극과 극은 통한다는 일반적인 통설이 항상 맞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경우를 자주 보게 되긴 하지만, '법칙'이라고 주장할 만큼은 못된다. 게다가, 미시마와 전공투 간의 대화에 대해 이러한 꼬리표를 다는 것은 어떤 점에서 부당하기까지 하다. 그들의 어색한 통정은 '극과 극은 통하기 마련'이라는 조소의 자기장에서 훌쩍 벗어나 있다는 편이 옳을 것이다.

우선, 둘 간의 대화/논쟁은 전혀 도식적이지 않다. 놀랍게도 정세적이거나 정치적이지도 않다. 천황제라는 첨예한 문제에 대해 대립할 때에도 둘은 추상적이고 철학적인 수준까지 깊게 들어간다. 둘 간의 대화는 공간과 시간성의 모순적 충돌, 역사에서 과거-현재-미래의 뒤엉킴, 한 실존적 개체를 존재하게 만드는 동인, 기존 체제의 파열과 해방구의 생성과 같이 얼핏보면 사변적이고 철학적인 주제들을 주로 섭렵하고 있다. 아마도, 노회찬과 정형근이 벌이는 시사토론 류의 재미난 싸움의 풍경을 기대했던 사람들이라면 다소 실망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 점이 둘 간의 만남을 더할 나위 없이 매력적으로 만든다. 구체적인 것이 항상 진리에 보다 가깝게 닿아 있고, 우리는 그 맥락에서만 비로소 진리 일반과 조우할 수 있다. 그래서, 전공투가 점령한 찰나의 해방구에서 벌이는 이들의 철학적이지만 치열한 논쟁이 훨씬 값진 것이다.

극좌와 극우가 통한다면 어떤 의미에서 그럴까? 폭력의 사용을 동의한다는 점에서? 아님 둘다 기존 체제를 꽤나 싫으니까? 이런 단편적인 대답을 넘어서려면 미시마가 왜 홀홀단신으로 봉쇄를 뚫고 동경대로 향했는지 알아야 할 것이다. 미시마 유키오와 동경대 전공투가 공유한 지점은 무엇이었을까? 한쪽은 일반화된 국가 정신으로서의 천황을 옹호했고 다른 쪽은 기존 체제의 소실점으로서의 해방구를 꿈꾸었던 존재들이었다. 아마도, 이들이 공유했던 것은 어정쩡하지만 강고했던 '일본 자본주의'의 종말이라는 지향이었을지도 모른다. 미사마는 '일본'에, 전공투는 '자본주의'에 온통 천착했던 것이 차이랄까? 이런 점 때문인지, 보편과 특수라는 범주의 문제에 있어서 둘의 차이는 상당히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는 이 논쟁에 담긴 가장 흥미로운 점의 하나이다.

나하고 제군들의 정치사상은 정반대라고 합니다. 정말 정반대겠지만, 단지 나는 지금까지 일본 지식인들이 사상과 지식에 힘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만으로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모습이 지긋지긋하게 싫었습니다. … 나는 일본인의 안심해버린 눈 속에서 뭔가 불안을 읽어내려 합니다. … 그런 점에서 제군들과 나 사이에 어떤 공감이 있을까 하고 이야기하러 왔지만, 나는 결코 제군들의 지지자가 아닙니다. 제군들을 이해하고자 하는 욕망에 불타 여기에 온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서로 상대를 이해하지 않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오늘은 이야기로 한판 붙어보고 싶습니다.

개인적으로 더욱 흥미로웠던 것은 미시마 유키오라는 인물이다. [금각사] 등을 통해 유미주의를 지향한 일본 소설가 정도로만 알고 있었던 나에게 그의 사상적 깊이와 통찰력은 꽤나 놀라운 것이었다. 토론을 마치고 난 이후 미시마 유키오가 따로 정리한 후기를 읽고는 굉장한 통찰력과 지력을 가졌던 인물이었다는 점을 새삼 알 수 있었다.

나의 전공투 방문은 대체로 유쾌한 경험이었다. … 나중에 들은 일이지만 '민청'(일본공산당 계열의 학생조직)이 토론회 유인물을 전부 뜯어냈기 때문에 토론장을 가리키는 표식은 전혀 없었다. … 나는 어디로 들어가야 할지 모른 채 입구에서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

잠시후 토론장 입구에 나를 고릴라 모습으로 캐리커처한 그림이 눈에 들어왔는데, 큰 글씨로 '근대 고릴라'라고 쓰여 있고 고랼라 사육료가 100엔 이상이라고 적혀 있었으며, [엽은인간]과 그 밖의 내 저서로부터 뽑아낸 인용문이 여기저기 풍자적으로 붙어 있었다. 내가 그걸 보고 웃는 것을 보며 많은 학생들이 이중삼중으로 나를 둘러싸고 웃고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 자체에서 나는 이미 이 회합에 웃음이 섞여 있다는 사실을 알아챌 수 있었다. 물론 그러한 웃음이 냉소나 조소일 수도 있으나, 적어도 사람은 웃으면서 싸우지는 못한다. …

나는 그들의 논리성을 인정하더라도 그들이 노리는 권력이 그다지 논리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그들이 적대하는 권력 자체의 비논리성이야말로 나 또한 싸워야 할 커다란 대상이라는 사실은 말할 필요가 없다. 내가 그러한 권력을 진정 논리적으로 만드는 일에 성공했을 때 3파 전학련(미시마는 전공투라는 말 대신 3파 전학련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또한 그와 마찬가지로 진정한 적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아닐는지?

책장을 넘기면서, 최근 몇 년간 우리의 진보진영에서 풍부해진 68에 관한 각종 담론에 중요한 공백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프랑스를 비롯해 서구의 68년에 대해서는 많은 논의와 운동의 로망까지도 생겨났지만, 이러한 관심이 무색하리만치 일본의 전공투를 진지하게 소개한 책이나 글은 드물다. 일본에 대한 민족 보편의 거부감이 무의식적으로 이러한 무관심을 낳은 것은 아닐까?
어떤 면에서 보면, 일본의 전공투 운동은 서구의 68보다 한층 더 흥미롭다. 우선, 히로마츠 와타루가 사상사적으로 제기했다는 '근대의 초극론'을 운동과 담론의 형태로 미리 (상당히 온전한 형태로) 선취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서구의 68만큼이나 일본의 전공투 운동은 자본주의를 넘어서 근대라는 시대 자체에 대한 성찰이자 항의였다.(2) 요컨대, 전공투는 패전의 민족적 굴욕을 딛고 단숨에 세계 제 2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해버린 일본의 특수성에 입각한 구체적이고 진지한 문제제기였던 셈이다. 한국 사회가 몇몇 지점에서 일본과 상당히 닮았다는 현실을 고려한다면, 전공투 운동에 대한 반성적 검토에서 우리가 배울 것이 꽤 많을지도 모를 일이다.

책의 내용은 매우 훌륭하지만, 책 자체는 그리 권할만 하지는 않다. 책은 두권의 원저를 합쳐놓은 형태인데, 당시 미사마와의 대담에 참석했던 사람들의 후일담을 담고 있는 후편이 필요했는지 의문이다. 이 부분의 사료적인 가치가 얼마나 뛰어난 것인지 섣불리 판단하기 힘들겠지만, 근대의 초극론이나 신으로서의 천황과 인간으로서의 천황의 차이와 같은 미묘한 역사특수적 맥락과 쟁점에 무지한 나 같은 사람들이 감당하기에 벅찬 지적 생략과 축약이 너무 많았다. 오히려, 대담 자체와 참석자들의 후기만으로 구성된 전편과 역자의 친절한 해설이 곁들여진 형태로 마무리 되었다면 책 자체나 가격 모두에서 만족할 만 했으리라.

P.S. 집에 [전공투]에 대한 만화책이 한 권있다. 지금은 절판된 책인데, 무척 흥미로운 책이다. 이 대담집을 읽고 다시 보니 훨씬 더 쏙쏙 잘 들어오는 듯.


(1) 기사를 썼던 기자들도 최소한 앞 부분의 대담은 읽었을텐데, 왜 한결같이 위의 기조로 기사를 썼는지 모를 일이다.

(2) 자신있게 말할 수는 없지만, 한때 유행했던 가라타니 고진의 논의들 역시 이 맥락에서 보다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는 느낌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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