몬스터 마을의 경제학 - 읽기 쉬운 경제 우화
사이카린 신세이 지음, 부지영 옮김 / 프리미엄북스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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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일본 저자들의 책에는 독특한 취향이 있다. 우리로 치면 입시용 참고서 분위기로 정리된 다이제스트서를 잘 내는 것으로도 유명하지만, 지식의 대중화 내지는 지식의 세속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그네들의 주요한 출판 풍토의 하나가 아닐까 싶다.

아이카린 신세이가 지은 [몬스터 마을의 경제학]은 일테면 케인즈주의적인 입장에서 거시경제학의 화폐론과 유효수요의 중요성을 우화를 통해 풀어내고 있는 책이다. 이상하게도 역자는 이 책이 금융위기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며 일본의 낙후된 금융시스템을 꼬집고 있는, 즉 우리에게도 반면교사 노릇을 해주는 책이라고 설명하고 있다.(여담이지만, 가끔 조선일보 기자들이 옮긴 책의 서문을 보며 이렇게 눈을 다시 부비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물론, 이러한 역자의 오해는 저자 자신의 불명확한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책의 뼈대를 이루는 케인즈 경제학을 못보고 지나친 것은 역자의 무지라고 해야 마땅할 것이다.

어쨌든. 책은 화폐의 출현을 발생학적으로 따라가는 것에서 시작한다. 장인들이 옹기종기 모여사는 몬스터 마을은 화폐 경제가 서지 않은, 즉 욕망의 이중적 일치가 발생할 때만 교환이 일어나는 동네이다. 그 동네에 인간인 미스터X가 출현하여 화폐를 도입한다. 이를테면 화폐를 독점적으로 유통하는 중앙은행인 셈이다. 처음에는 금본위제를 실시하다가, 경제의 규모가 커지면서 화폐를 추가적으로 발행해야 하는 압력에 놓인다. 금본위제에서 중앙은행의 신용에 기초한 순수한 화폐경제의 출현을 보여준다. 그리고, 미스터X의 부인은 생산은 하지 않고 오직 사치하는 존재로 등장하여 몬스터 마을의 서비스업이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X의 부인은, 케인즈가 말한 바, 비록 비생산적일지라도 국가가 유효수요를 창출하는 것이 경제를 부양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주장을 실현한 존재인 셈이다.

몬스터 마을이 그럭저럭 굴러갈 즈음, 옆 아쿠아 마을의 미스터 푸가 등장한다. 그는 몬스터 마을이 지닌 금융시스템의 취약점을 이용하려는 악당. 이미 전면적인 화폐경제로 이행했음에도 몬스터 마을은 여전히 금과 화폐의 태환을 실시하고 있었다 . 이를테면, 화폐는 불태환 지폐가 아니라 태환 지폐였던 셈이다. 경제의 규모에 맞게 많은 돈을 풀었고 마을 주민들의 축적 욕구도 충분히 고무한 덕택에, 몬스터 마을의 금은 천정부지로 올라 있었다. 미스터 푸의 작전은 이렇다. 그는 몬스터 마을에 와서 시세보다 비교적 싼 값에 금을 판다. 금이 많이 풀리면서 가격이 떨어지고 점차 주민들 사이에 금에 대한 회의가 퍼지게 된다. 이때 미스터 푸는 자신의 하수인을 통해 원래 팔았던 값보다 훨씬 싸게 금을 되산다. 이렇게 미스터 푸는 아쿠아 마을에서 소용할 가치 기준인 금과 유통 수단인 화폐를 몬스터 마을에서 휩쓸어간다(다소 이해가 안 되지만, 책에서는 조폐기는 오직 미스터X만 소유하고 있으며, 그래서 미스터 푸가 부득불 이런 작전을 펼칠 수 밖에 없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미스터 푸의 이러한 '작전'은 고정환율제 하에서 영국 정부를 상대로 파운드 전쟁을 벌여 거대한 부를 쌓은 소로스의 꽁수와 무척이나 닮아 있다.

돌아온 미스터X는 이미 아쿠아 마을의 가치 기준이 된 몬스터 마을의 돈을 마구 찍어 다시 아쿠아 마을로 건너가 비슷한 방법으로 아쿠아 마을의 금을 바닥낸다. 몬스터 마을에서 가져온 제한된 화폐만을 지니고 있는 미스터 푸로서는 사람들의 금태환 요구를 모두 수용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일. 미스터 푸는 마침내 모라토리움을 선언하고 이번에는 아쿠아 마을이 초토화된다.

하지만, 두 마을 간의 전쟁에 승자없었다. 그 가치를 의심치 않았던 금의 가격 폭락으로 인해 몬스터 마을은 심각한 불황에 빠져들게 된다. 게다가, 이제 사치를 전담하는 미스터X의 부인도 없으니 불황을 탈출하는 일이 더욱 힘들게 되었다. 이른바 케인즈의 '저축의 역설'이 작용하게 된 것이다. 개인의 차원에서 잘살기 위해 소비를 줄일 수록, 국가 전체로서는 유효수요가 축소되어 되려 불황의 골을 깊게 한다는 것이다. 결국, 미스터X의 최종적인 해결책은 사람들에게 임의로 돈을 풀어 유효수요를 인위적으로 창출하는 것이었다. 정확히 대공황에 대한 케인즈의 해법이다.

여기까지는 나쁘지 않다. 정작 내가 갸우뚱해지기 시작한 것은 "노 비전이라는 이름의 나라"라는 제목의 장부터다. 노골적으로 일본을 지시하고 있는 가상국가 "노 비전"은 정부의 유효수요를 "낭비"적인 부분에 소모했기 때문에, 오늘날 자취를 감춘 것이라고 미스터X는 열변을 토한다. 즉, 정부의 지출은 "생산적인 쪽"으로 씌여야 한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이는 지금까지 책의 뼈대를 끌고 온 케인즈의 유효수요론이 지닌 본질을 완전히 호도하는 것이다. 즉, 케인즈의 유효수요는 대공황이라는 자본주의의 병리적 이상 상태를 벗어나기 위한 단기적인 해법이다. 극단적으로 말해, 책에 나온 것 처럼 사람들을 데려다가 오늘은 땅을 파게 하고 내일은 같은 자리를 묻게 하더라도 공황의 상황에서 그것이 선(善)이 된다. 그리고, 책의 테마와 기조 또한 이러한 분위기로 흘러왔다. 예를 들어, 미스터X의 부인은 비생산적인 존재였지만, 그 자체로서 서비스업이라는 확실한 유효수요를 창출하여 몬스터 마을의 경제 성장에 크게 기여했던 것이다.

이렇게 저자는 지금까지 잘 이끌고 나왔던 단기 거시경제학을 갑자기 '장기'로 틀어 일본 경제의 저성장과 침체, 그리고 나아가 창조성 부재까지 싸잡아 비난하고 나선다. "노 비전"이라는 국가에 대한 미스터X의 주장이 맞는지 틀리는지 나로서는 제대로 알수 없었다. 다만, 책의 제목이 표방하고 있는 "알기쉬운 경제 우화"라는 표제는 이 책에 절반만 적당하지 않을까 싶다. 차라리, 마지막 부분의 어설픈 일본 경제 비판이 없었다면 훨씬 좋았을 것인데 말이다. 덕분에 우스꽝스러운 역자 서문도 나왔으니, 책을 두번 죽인 격이나 다름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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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나라에서 온 스파이
최인석 지음 / 창비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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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석을 처음 접한건 실천문학사에서 나온 소설집을 통해서였다. 제목은 잘 기억이 안나지만, 그가 쓴 단편 제목은 [세계의 바닷가]였다. 소설은 당시의 ‘운동’ 소설 답지 않게 추리소설의 구성을 탄탄하게 따르며 흘러나갔다. 소설을 끝낸 후, 슬며시 눈시울이 젖었다. 운동권 소설치고는 꽤나 셌던 김하기, 권운상 등등의 소설도 심드렁하게 봤건만 최인석의 [세계의 바닷가]는 마음 깊은 곳을 울렸고, 이후 나는 그의 추종자가 되었다.

최인석의 초기 소설들은 '잔잔하게' 사회성을 추구한다. 사회성이 너무 추상적인가? 그의 소설은 그 핵심에 있어 실천 지향적이다. 다만, 지향을 앙상하게 드러내는 것을 미학으로 삼았던 시대의 조류와 달리 그의 소설은 탄탄한 서사를 갖추고 있는데, 단편집 [혼돈을 향한 한걸음], [나를 사랑한 폐인], [아름다운 나의 귀신] 등이 그렇다. 그런데, 내가 과문했는지 작가의 특성인지 그의 장편은 접하기 힘들었다. 자고로, 소설의 제대로 된 맛은 장편에서 우러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의 '장편' 소설 [이상한 나라에서 온 스파이]를 뒤늦게 흔쾌히 집어들었다.

이미 [나를 사랑한 폐인], [아름다운 나의 귀신]에서 그 흔적이 드러나긴 했지만, 이 소설은 환상적 리얼리즘의 백미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리얼리즘은 현실에 천착하는 것인데, 어찌 그것이 환상 혹은 마술과 어울릴 수 있을까? 그래서, 이 계열에 속하는 소설이 더욱 매혹적인지도 모르겠다. 남미 혹은 그곳의 삶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면 전적으로 가브리엘 마르께스의 [백년의 고독] 덕택이다. 최인석의 이 소설은 국내에서는 보기 드문 환상적 리얼리즘을 시도했고, 내친김에 한국적인 완성까지 이뤄내고 말았다.

심우영은 고아로 태어나 공장이라는 주변부 자본주의 착취 메커니즘의 핵심을 피해 미군부대로 흘러든다. 그곳에서 자신의 모범이었던 건전한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몰락을 목격하고, 순애보의 타락에 아파하며, 층층히 세워진 폭력의 구조를 열성적으로 학습한다. 이 주변부 자본주의에서도 떨어질 듯한 벼랑 끝에 무슨 희망이 있겠냐고? 이 위태로운 삶에 나타난 존재가 지장보살과 같은 밥어미 작은년이다. 그녀는 '열고야'의 스파이. 도대체, 무슨 이야기냐고? 이 책의 스토리를 요약하는 일은 한마디로 무의미하다. 곳곳에 등장하는 판소리적 문체의 리듬에 (말 그대로) 몸을 맡기게 되고, 인물의 마음 속으로 통채로 빨려들어가고 만다. 읽는 이의 이러한 경험을 통째로 떠내는 것은 어쨌든 불가능하니까.

동시에, 독서를 진행하는 것 역시 매우 불편하다. 누구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현대사의 주변부를 접하는 건 의례 그렇지만, 이 소설의 감응 정도는 지나치다. 책을 읽다가 몇 번이나 덮어 버렸으며, 공공 장소에서는 표정이 너무 찡그려질까 두려워 함부로 펴지 못했다. '지옥이 텅비지 않는다면 결코 성불을 서두르지 않겠나이다. 그리하여 육도의 중생이 다 제도되면 깨달음을 이루리다.' 인간의 죄를 대신 받는 보살, 극락도로 가는 것을 자발적으로 거부한 이가 지장보살이라면, 소설에 등장하는 열고야의 간첩 '작은년'이 똑 그렇다. 그는 어머니이자 누이이며 연인이다. 주변의 벼랑이라는 황폐한 삶의 조건에서 인간의 선성(善性)을 발견해내는 기인하고 놀라운 능력을 지닌 존재이다.

작은년은 왜 열고야라는 낙원을 버리고 이 저주받은 땅에까지 몸소 강림했는가? 이 질문은 소설이 끝까지 추구하는 바이며 동시에 끝까지 의문으로 남는 점이기도 하다. 작은년의 존재는 신비스럽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비현실적인 공상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이룰 수 있는 아름다운 무엇일지도 모른다. 아마도, 최인석이 이 소설을 통해 거둔 환상적 리얼리즘의 성과라면 마르께스처럼 이처럼 현실/환상, 이성/감성의 경계를 성공적으로 허물었다는 데 있을 터이다. 아마도, 우리네 이야기인지라 흥미롭다는 삼자적 감성보다는 거리없음의 불편함과 아픔이 더 컸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에 대한 기대는 '기대 이상'으로 충족되었다. 엄지 두 개가 모자란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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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멜
마우리체 필립 레미 지음, 박원영 옮김 / 생각의나무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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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쉰들러 리스트>가 나왔을 때 이렇게 생각했다. 왜 나찌의 유태인 학살을 고발한 작품보다도 그 학살을 줄여보고자 애쓴 한 가해자의 양심이 더 큰 호소력을 지니는 것일까? 당시 한 영화평론가는 영화의 호소력이 바로 ‘중산층적인 거리두기’에서 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피해자의 위치에 서는 것은 감정적으로도 꽤나 힘든 일이기 때문에 차라리 가해자라는 안전한 위치에서 양심의 모험을 거는 편이 낫다는 것이다. 맞나? 어쨌든.

마우리체 필립 레미의 [롬멜]은 나찌의 영웅 롬멜의 신화를 벗기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이 책의 의의라면 ‘군인’으로서 그리고 뛰어난 지휘관으로서 그가 지닌 진정한 용기를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롬멜은 히틀러를 더할 나위 없이 존경했고 국가사회주의의 이념에 찬동했지만, 그의 잘못된 결정에는 따르지 않았다. 그는 진정한 용기란 실수를 인정하고 후퇴할 줄 아는 것이라는 자신의 원칙에 충실했다. 때문에, 롬멜은 전쟁을 지속하려는 히틀러의 암살계획을 묵인했으며 체제 붕괴 이후 서방과 강화조약을 책임질 국가 수반의 자리까지도 염두하고 있었다고 한다. 책의 전략은 이처럼 롬멜에서 겹쳐진 신화와 영웅을 분리하는 것이다 . 다만, 책이 너무 사실에 매몰되어 롬멜과 나찌 체제의 관계, 특히 소련 침공의 좌절 이후 광기로 치닫던 체제의 단면을 드러내지 못한 점이 아쉽다. 롬멜이라는 인물의 굳은 의지는 잘 드러나지만, 그 의지가 체제 내에서 어떻게 좌절되었는지는 입체적으로 보이고 있지는 못하다. 전기문학으로서 인물과 역사를 잘 섞어낸 주세페 피오리의 [그람시]나 이론과 인물을 제대로 소화하고 있는 실비아 네이사의 [뷰티풀 마인드]와 비교해서 다소 격이 떨어지는 부분이라고 하겠다.

책을 통해 행간에서 엿본 나찌 체제에 관한 단상 두 가지는 이렇다.

우선, 나찌의 선전담당자였던 괴벨스의 의도와 역할이다. 괴벨스는 아프리카 전선에서 롬멜이 아프리카 전선에서 인상적인 승리를 일궈내자 그의 가치를 발견했고 그를 민족의 영웅으로 포장했다. 이때부터 롬멜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국가사회주의 아이콘이 되었다. 나찌와 같은 비정상적인 동원 체제에서 영웅의 존재는 매우 필수적이며 최고 통치자의 위치를 더욱 확고하게 만들어준다. 동시대인이든 과거의 인물이든 죽었던 살았든지 말이다. 박정희가 만들어낸 ‘이순신’의 신화, 김일성의 신화 등등에 대해 체제의 선전이라는 관점에서 재삼 음미해봐야 하지 않을까?

둘째, 나찌에 관한 경제사적 연구에 따르면 나찌 시대의 군비적 효율성은 서구의 상대국들에 비해 크게 뒤떨어졌다. 일사불란한 동원체제에서 그 효율성이 높을 것으로 판단하지만, 사실은 오히려 반대라는 것이다. 나찌에서 관료제의 폐해는 카프카의 [성]을 떠올리게 할 정도이다. 롬멜이 히틀러 체제에서 느꼈던 절망감은 여기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을까? 히틀러의 총명함을 죽는 순간까지 신뢰했지만, 관료제는 히틀러의 과대망상증을 제어하기는커녕 오히려 순수한 형태로 전개되도록 부추겼다. 신하의 구름에 둘러쌓인 조선의 절대군주제와 나찌의 체제가 이 점에서 크게 다를까?

다시 처음 문제로 돌아가보자. 롬멜은 어떤 인물인가? 저자는 잘못된 신화에 유폐된 롬멜을 구하여, 한 사람의 지휘관으로서 그리고 말년에는 나찌에 반대했던 진정한 애국자로서의 면모를 살려내고자 한다. 하지만, 어쨌든 그도 나찌라는 거대한 시스템의 유지에 동조했다. 유태인 학살을 단 한번도 승인한 적은 없지만, 저지하고자 적극적으로 행동하지도 않았다. 롬멜이라는 인물에 대한 판단은 구조에서 비롯되는가 개인에게서 비롯되는가? 진부한 질문 같지만, 나찌와 같은 중요한 역사를 대면할 때면 어쩔 수 없이 튀어나오는 질문이다. 혹시, 롬멜에 더 주목하게 되는 이유가 제삼자로서의 편안함이라는 비열함 때문은 아닐까?

책은 모두에 롬멜이 '명백한 나찌이자 명백한 영웅'이라고 적고 있다. 이 딜레마가 좀 더 역사적인 형태로 서술되었더라면 훨씬 흥미진진한 책이 되었을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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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박민규 지음 / 한겨레출판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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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집어든 날 바로 저녁 무렵에 끝내버렸다. 책이 워낙 재미있어서 일까? 가볍고 날렵한 문체가 속독을 부추긴 것일까? 크게 집중해서 읽은 것도 아니건만 단숨에 페이지가 지나가 버렸다.
소설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우선 첫 번째 부분은 어린 시절 삼미 슈퍼스타즈를 통해 배운 한국 사회의 쓴 맛을 해학적으로 풀어내고 있다. 책 전체에 걸쳐 가장 압권이라 불러도 좋다. 80년대 말부터 90년대 초반 학번들이 알아챌만한 농담과 수다의 코드를 모아놓고 타이틀전을 벌이는 격이다. 프로야구에 대한 서술이라든가 이를 풀어내는 소년들의 기지는 누구나 어린 시절 추억의 한 켠에 쟁여두었을 만한 내용이다.
더불어, 은근한 회고풍으로 쓰고 있는 초반부는 소설이 가져야 마땅한 두가지를 잘 구현하고 있다. 우선, 회고풍으로 서술된 슈퍼스타즈에 대한 추억은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의식을 담고 있다. “잡기 힘든 공은 잡지 말고 치기 힘든 공은 치지 말자.” 어린시절 끝까지 삼미의 팬으로 남았던 두 소년은 이 잠언을 아픔으로 새기지만, 이후 삶의 궤적에서 다시 중요한 깨달음으로 다가온다. 두 번째로는 전반부의 회고체 서술이 지닌 문체의 독특함이다. 표지 뒤에 나와 있는 황석영의 선정 이유에는 '가벼움'이 문제로 떠올랐다고 되어 있지만, 거꾸로 이러한 자조적이고 독백적인 농담이야 말로 이 시대의 수다를 특징짓는 것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정작 주인공이 박터지게 머리 속에 지식을 우겨넣어 일류대에 입성하는 이후를 다룬 대학 시절은 매우 실망스럽다. 일단, 이 가운데 토막은 소설 전체의 주제의식과 완전히 동떨어져 있다. 이 시기의 삶이 삼미에 대한 추억과 교훈, 그리고 이후 교훈의 재발견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고리를 좀처럼 발견하기 힘들다.
에피소드나 스토리 진행, 그리고 문체까지 살짝 바뀐 이 토막은 90년대 초반에 크게 붐을 이루었던 주인석, 박일문 등의 '(운동권)회고담 소설'과 퍽 닮아 있다. 혁명, 섹스, 록큰롤은 삼중주는 그것이 진짜 그 누군가의 삶을 관통해 지나쳤다고 해도, 전혀 자연스럽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런데, 이 개인적인 악감정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
한가지 흥미로운 점은 운동권에 몸이나 마음의 일부를 담궜던 작가들은 엽기발랄함으로 한 없이 달려가다가도 줄에 매인 짐승처럼 다시 과거로 끌려들어간다는 것이다. [무협학생운동사]로 데뷔했다는 사실을 은근히 감추는 김영하, 이 방면의 대표주자인 백민석, 이들 모두에게서 비슷한 흔적을 읽게 되는 것은 그들이 지니고 있을 법한 일종의 찜찜한 부채감 때문일까?
그나마 마지막 토막은 좋았다. 프로의 세계에서 칠 수 없는 공을 쳐내지 않는 것, 잡을 수 없는 공을 포기하는 것은 죄악에 가깝다. 더구나, '프랜차이즈'의 실현에 불과한 식민지 땅에서 그 죄악에 대한 질타는 더욱 가혹하기 마련이다. 슈퍼스타즈가 준 교훈, 이러한 가짜 프로 의식을 거부하고 이기는 것을 거부하고 오직 자기 수양을 위해 야구를 한, 목적보다는 수단을 중요시한 교훈이 주인공에게 새로운 삶의 가치를 일깨워준다. 맑스의 사위인 라파르그가 말한 ‘게으를 수 있는 권리’란 게 이것일터이고, 네그리가 말한 노동의 거부란 바로 쳇바퀴처럼 순환하는 자본의 당위를 물리칠 때 가능한 것임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더구나, IMF라는 황망한 배신의 시간을 통해 전개되는 삼미의 재발견은 더욱 설득력있고 감동적이다. 다만, 주인공에게 교훈 전달자로 갑자기 부활한 그 시절의 단짝 조성훈이 일본에서 겪은 일은 너무나 동화같아서 고대극에서 볼 수 있는 "데우스엑스마키나dues ex machine" 만큼이나 작위적이라는 느낌은 지울 수 없다.
전체적으로 단숨에 읽히는 흥미와 함께 진지한 고민거리를 더불어 지닌 흔하지 않은 작품이다. 다만,체험에 기반해 쓰는 작가가 지닐 수 있는 한계 또한 또렷이 보여주었다는 점은 실망스럽다. 회고담 소설이나 내면을 주절거리는 소설을 혐오하는 나로서는 이처럼 서사에 강한 소설가가 또 하나 등장했다는 것을 두 팔로 환영하는 바이다. 그를 소개받았다는 사실만으로 이 소설은 유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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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 인간의 동반자
제임스 서펠 지음, 윤영애 옮김 / 들녘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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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개를 키운 적이 있는 나는 가끔 ‘개고기 논쟁’에 휘말리면 혼란스러울 때가 있다. 약간의 논쟁을 거쳐 사람들이 도달하는 합의점은 ‘키우는’ 개와 ‘먹는’ 개를 구분하자는 것이다. 즉, 먹는 개는 식용이기 때문에 아무런 죄책감 없이 먹어도 괜찮지 않겠냐는 것이다. 한번은 이런 의문이 들었다. 일부의 개는 원래 인간의 친구로 태어나고, 다른 일부의 개, 그리고 모든 소나 돼지는 원래 인간의 식량으로 태어나는 것인가? 동물에게 부여한 인간의 질서를 과연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제임스 서펠의 <동물, 인간의 동반자>는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인간들은 잔인한 과정을 거쳐 도륙된 돼지를 태연하게 먹으면서도 애완 동물에 대해서는 그토록 한없는 애정을 쏟을 수 있는가? 서펠은 이러한 종류의 문제가 이른바 ‘사회과학’에서는 이상하게도 봉쇄되어온 질문이라고 지적한다.

서펠은 동물에 대한 인간의 태도를 단순한 차원으로 환원하려는 태도를 경계한다. 그는 애완동물이 다른 인간을 찾지 못해 끌어들이는 대용물이라는 해석, 인간정신이 지닌 미약함의 증거라는 시선, 그리고 잉여생산물의 존재와 함께 등장한 기생성의 단편이라는 비판 모두를 거부한다. 서펠은 애완동물에 대한 기존의 해석을 의학적인 증거와 역사적인 지식을 넘나들며 솜씨있게 비판하고 있다. 이러한 기능적인 관점과 단순한 설명을 거부하는 대신, 서펠은 동물이 인간 사회에 정서적인 도움을 준다는 사실을 ‘약하게’ 수용한다. 즉, 인간 사회에 대한 동물의 독특한 기여가 그들을 인간의 친구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사실, 동물에 대한 이러한 갑론을박은 서펠에게는 하나의 징검다리이다. 그는 여기서 자연에 대한 인간 중심의 신화를 추적한다. 그는 전형적인 사냥꾼과 채집자들은 자신의 사냥감을 열등한 존재로 보지 않았다고 말한다. 이들에게 동물은 정복해야 할 대상이라기 보다는 동반자였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농경사회는 전체 시스템이 자연 정복 그리고 생물에 대한 지배와 조작으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생산 조건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의식 속에 더욱 많은 균열을 일으켰고, 이는 어떻게든 봉합되어야 했다. 그리고, 자연 앞에 우뚝 선 인간이라는 관점이 그 역할을 담당했다. 서펠은 이러한 지배와 패권에 대한 집착, 그리고 이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가 다시 인간을 향해 겨눠진 것이 ‘제국주의’와 ‘노예제’라고 말한다.

개인적으로 농경 사회로의 전환에 대한 서펠의 관점이 매우 신선했다. 생태학에 큰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생태’라는 좌우를 아우르는 모호한 정치적 구호 속에 느꼈던 일말의 찜찜함이 해소되는 느낌이었다. 정교한 생태학이랄까? 서펠은 자연에 대해서 어떤 관점을 지니는지가 중요하다는 기본을 전혀 다른 방향에서 일깨워주고 있는 셈이다.

서펠의 인식론적인 전환은 분명 값진 것이다. 하지만, 망설여지는 부분이 없다면 거짓일 터이다. 자연에 대한 정복적 관점이 결국 인간에 대한 착취를 낳았다면, 관점의 탈식민화를 통해서 반대의 결과를 낳을 수 있을까? 여전히, 비참한 인간사회에 눈을 돌리는 것이 애완동물에 대한 애착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건 아직 근본적인 전환을 이루지 못한 탓일지 모른다.

언제나 그렇듯이, 전선은 하나씩 차례대로 걷어나가는 것이 아니다. 모두가 한번에 움켜쥐고 맞서나가는 것이 싸움인 법이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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