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나라에서 온 스파이
최인석 지음 / 창비 / 2003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최인석을 처음 접한건 실천문학사에서 나온 소설집을 통해서였다. 제목은 잘 기억이 안나지만, 그가 쓴 단편 제목은 [세계의 바닷가]였다. 소설은 당시의 ‘운동’ 소설 답지 않게 추리소설의 구성을 탄탄하게 따르며 흘러나갔다. 소설을 끝낸 후, 슬며시 눈시울이 젖었다. 운동권 소설치고는 꽤나 셌던 김하기, 권운상 등등의 소설도 심드렁하게 봤건만 최인석의 [세계의 바닷가]는 마음 깊은 곳을 울렸고, 이후 나는 그의 추종자가 되었다.

최인석의 초기 소설들은 '잔잔하게' 사회성을 추구한다. 사회성이 너무 추상적인가? 그의 소설은 그 핵심에 있어 실천 지향적이다. 다만, 지향을 앙상하게 드러내는 것을 미학으로 삼았던 시대의 조류와 달리 그의 소설은 탄탄한 서사를 갖추고 있는데, 단편집 [혼돈을 향한 한걸음], [나를 사랑한 폐인], [아름다운 나의 귀신] 등이 그렇다. 그런데, 내가 과문했는지 작가의 특성인지 그의 장편은 접하기 힘들었다. 자고로, 소설의 제대로 된 맛은 장편에서 우러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의 '장편' 소설 [이상한 나라에서 온 스파이]를 뒤늦게 흔쾌히 집어들었다.

이미 [나를 사랑한 폐인], [아름다운 나의 귀신]에서 그 흔적이 드러나긴 했지만, 이 소설은 환상적 리얼리즘의 백미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리얼리즘은 현실에 천착하는 것인데, 어찌 그것이 환상 혹은 마술과 어울릴 수 있을까? 그래서, 이 계열에 속하는 소설이 더욱 매혹적인지도 모르겠다. 남미 혹은 그곳의 삶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면 전적으로 가브리엘 마르께스의 [백년의 고독] 덕택이다. 최인석의 이 소설은 국내에서는 보기 드문 환상적 리얼리즘을 시도했고, 내친김에 한국적인 완성까지 이뤄내고 말았다.

심우영은 고아로 태어나 공장이라는 주변부 자본주의 착취 메커니즘의 핵심을 피해 미군부대로 흘러든다. 그곳에서 자신의 모범이었던 건전한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몰락을 목격하고, 순애보의 타락에 아파하며, 층층히 세워진 폭력의 구조를 열성적으로 학습한다. 이 주변부 자본주의에서도 떨어질 듯한 벼랑 끝에 무슨 희망이 있겠냐고? 이 위태로운 삶에 나타난 존재가 지장보살과 같은 밥어미 작은년이다. 그녀는 '열고야'의 스파이. 도대체, 무슨 이야기냐고? 이 책의 스토리를 요약하는 일은 한마디로 무의미하다. 곳곳에 등장하는 판소리적 문체의 리듬에 (말 그대로) 몸을 맡기게 되고, 인물의 마음 속으로 통채로 빨려들어가고 만다. 읽는 이의 이러한 경험을 통째로 떠내는 것은 어쨌든 불가능하니까.

동시에, 독서를 진행하는 것 역시 매우 불편하다. 누구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현대사의 주변부를 접하는 건 의례 그렇지만, 이 소설의 감응 정도는 지나치다. 책을 읽다가 몇 번이나 덮어 버렸으며, 공공 장소에서는 표정이 너무 찡그려질까 두려워 함부로 펴지 못했다. '지옥이 텅비지 않는다면 결코 성불을 서두르지 않겠나이다. 그리하여 육도의 중생이 다 제도되면 깨달음을 이루리다.' 인간의 죄를 대신 받는 보살, 극락도로 가는 것을 자발적으로 거부한 이가 지장보살이라면, 소설에 등장하는 열고야의 간첩 '작은년'이 똑 그렇다. 그는 어머니이자 누이이며 연인이다. 주변의 벼랑이라는 황폐한 삶의 조건에서 인간의 선성(善性)을 발견해내는 기인하고 놀라운 능력을 지닌 존재이다.

작은년은 왜 열고야라는 낙원을 버리고 이 저주받은 땅에까지 몸소 강림했는가? 이 질문은 소설이 끝까지 추구하는 바이며 동시에 끝까지 의문으로 남는 점이기도 하다. 작은년의 존재는 신비스럽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비현실적인 공상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이룰 수 있는 아름다운 무엇일지도 모른다. 아마도, 최인석이 이 소설을 통해 거둔 환상적 리얼리즘의 성과라면 마르께스처럼 이처럼 현실/환상, 이성/감성의 경계를 성공적으로 허물었다는 데 있을 터이다. 아마도, 우리네 이야기인지라 흥미롭다는 삼자적 감성보다는 거리없음의 불편함과 아픔이 더 컸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에 대한 기대는 '기대 이상'으로 충족되었다. 엄지 두 개가 모자란 작품!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